진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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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민왕(南康愍王) 陳曇朗 | 진담랑 | |
작위 | 남강군왕(南康郡王) |
시호 | 민(愍) |
성 | 진(陳) |
이름 | 담랑(曇朗) |
생몰 | 529년 ~ 556년 |
부친 | 부친 진휴선 |
진담랑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서 진패선이 다른 아이들보다도 총애하였다. 진패선은 담력이 있었고 안정적인 통치에 대한 재간이 있었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 저작좌랑(著作佐郞)에 임명되었다. 진패선이 장강을 건너 북상하여 광릉(廣陵)을 포위할 때 숙예(宿預) 출신의 동방광(東方光)이 진패선에게 호응하자 진담랑과 두승명을 회하에서 사수(泗水)로 보내 동방광을 지원하게 했다. 북제의 원군이 도착하자, 진담랑은 두승명과 함께 성벽을 쌓아서 북제의 원군을 막았다. 진담랑은 진패선의 명으로 건강으로 귀환했으며, 이때 숙예의 의병 3만 명을 데리고 장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555년, 진패선이 왕승변을 제거할 때 진담랑을 경구(京口)에 남겼다. 이후 진담랑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제수되고 감남서주(監南徐州)를 맡았다.
556년, 서사휘와 임약이 북제를 끌어들여 건강을 침공하였다. 양나라에서 북제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할 때 북제에서는 강화조건으로 진패선의 조카를 인질로 요구했다. 당시 양나라는 후경의 난을 거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건강 정권은 특히 매우 취약해서 군량의 운송이 끊이지 않았다. 양나라의 대신들은 북제와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패선은 여기에 대해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조정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 저작좌랑(著作佐郞)에 임명되었다. 진패선이 장강을 건너 북상하여 광릉(廣陵)을 포위할 때 숙예(宿預) 출신의 동방광(東方光)이 진패선에게 호응하자 진담랑과 두승명을 회하에서 사수(泗水)로 보내 동방광을 지원하게 했다. 북제의 원군이 도착하자, 진담랑은 두승명과 함께 성벽을 쌓아서 북제의 원군을 막았다. 진담랑은 진패선의 명으로 건강으로 귀환했으며, 이때 숙예의 의병 3만 명을 데리고 장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555년, 진패선이 왕승변을 제거할 때 진담랑을 경구(京口)에 남겼다. 이후 진담랑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제수되고 감남서주(監南徐州)를 맡았다.
556년, 서사휘와 임약이 북제를 끌어들여 건강을 침공하였다. 양나라에서 북제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할 때 북제에서는 강화조건으로 진패선의 조카를 인질로 요구했다. 당시 양나라는 후경의 난을 거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건강 정권은 특히 매우 취약해서 군량의 운송이 끊이지 않았다. 양나라의 대신들은 북제와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패선은 여기에 대해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조정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왕실을 잘못 보좌해서 오랑캐들이 우리를 침범하게 했고 오랑캐들을 평정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책임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 있는 대신들은 전쟁을 멈추고 제나라와 화해하여 변경이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제가 만약 대신들의 건의를 저버린다면 대신들은 틀림없이 제가 자식과 조카를 아까워한다고 생각할 것이니 지금 조카인 담랑을 오랑캐에게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제나라는 믿을 수가 없어서 우리의 틈을 엿보며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할 것이니 반드시 맹약을 저버릴 것입니다. 제나라가 침공하면 대신들은 반드시 힘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진패선은 진담랑이 인질이 되려는 것을 꺼려서 도망치지 않았을까 염려해서 직접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경구(京口)로 가서 진담랑을 맞이하여 건강으로 돌아왔으며, 진담랑은 북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후 북제에서 강화조약을 깨고 소궤 등이 서사휘를 데리고 장강을 건너 건강을 침공하자, 진패선은 이를 격파하여 소궤와 동방로 등을 사로잡았다. 북제는 소궤와 동방로의 신병을 인도받는 조건으로 영토의 할양과 더불어 말과 소를 요구했으나 진패선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궤 등이 주벌되자, 북제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담랑을 살해하였다. 이때 양나라와 북제는 관계가 이미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소식은 양나라에 전해지지 못했다.
557년, 진패선이 양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경제 소방지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남진의 초대 황제인 무제였다. 진패선은 진담랑이 북제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아직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담랑을 남강군왕(南康郡王)으로 봉하고 진휴선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561년, 남진과 북제의 관계가 복원되면서 진담랑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마침내 남진에 전해지게 되었다. 문제 진천은 진담랑의 죽음을 슬퍼하여 진담랑을 시중(侍中), 안동장군(安東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남서주(南徐州) 자사로 추증하고 민(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수빙사(隨聘使) 강덕조와 유사지를 보내 진담랑의 관을 맞이하도록 명했으며, 562년 진담랑의 관이 비로소 건강에 돌아왔다.
진담랑은 북제에 인질로 가기 이전에 진방태와 진방경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후 북제에 인질로 향할 때 2명의 첩을 데리고 갔으며, 북제에서 진방화(陳方華)와 진방광(陳方曠)을 낳았다. 진방화와 진방광은 남진과 북제의 관계가 복원되면서 남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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