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전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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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33호 저무는 4286년에서 화재 영상 |
6.25 전쟁이 휴전하면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정부가 옮겨 가긴 했지만 여전히 부산 일대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전쟁 피난민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시발점이 된 중구 영주동 일대는 당시에도 그들이 만든 임시천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늦가을 건조한 날씨에 불이 딱 붙기 좋은 목조건물이[1] 밀집된 공간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당시 부산의 도심이었던 부산역~중앙동~동광동-영주동~대청동입구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되어 버렸다. 부산역은 1965년까지 10년 이상 가건물을 사용했으며, 1965년 7월 23일에 초량역의 영업을 정지하고 1965년 11월 1일에 부산역을 폐쇄하고 부산진역으로 통합하여 운영하였고 1969년 초량에 부산역이 신축 완공됨과 동시에 명실공히 부산의 종점 부산역으로서의 업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신축된 현 부산역은 구 초량역 위치가 아니고 3부두 옆의 물웅덩이 해변을 매립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화재에 앞서 1953년 1월 30일에 국제시장 대화재로 국제시장이 전소되고 부평동, 신창동, 광복동 일부가 피해를 입는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 국제시장 대화재와 부산역전 대화재를 같은 화재로 착각하여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까지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1954년 12월에 용두산공원 판자촌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3명이 사망하고 192명이 부상당하는 등 많은 판자촌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궁중유물을 임시 보관했던 국악원 창고가 전소되어 상당수의 내부 유물이 타 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부산이 아니고 불산이라고 불러야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고 한다.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6.25 시대의 미군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들이 죄다 전소되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후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무역항을 개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측면도 존재한다.
당시 2군수사령관이였던 리차드 위트컴이 군법을 어겨가며 텐트를 제공하고 이재민들을 도왔다. 이로 인해 청문회에 불려나갔지만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라고 발언했다. 1954년 전역 후 부산에 거주하며 한국인들을 돕다가 1982년 사망했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되어 버렸다. 부산역은 1965년까지 10년 이상 가건물을 사용했으며, 1965년 7월 23일에 초량역의 영업을 정지하고 1965년 11월 1일에 부산역을 폐쇄하고 부산진역으로 통합하여 운영하였고 1969년 초량에 부산역이 신축 완공됨과 동시에 명실공히 부산의 종점 부산역으로서의 업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신축된 현 부산역은 구 초량역 위치가 아니고 3부두 옆의 물웅덩이 해변을 매립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화재에 앞서 1953년 1월 30일에 국제시장 대화재로 국제시장이 전소되고 부평동, 신창동, 광복동 일부가 피해를 입는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 국제시장 대화재와 부산역전 대화재를 같은 화재로 착각하여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까지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1954년 12월에 용두산공원 판자촌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3명이 사망하고 192명이 부상당하는 등 많은 판자촌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궁중유물을 임시 보관했던 국악원 창고가 전소되어 상당수의 내부 유물이 타 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부산이 아니고 불산이라고 불러야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고 한다.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6.25 시대의 미군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들이 죄다 전소되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후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무역항을 개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측면도 존재한다.
당시 2군수사령관이였던 리차드 위트컴이 군법을 어겨가며 텐트를 제공하고 이재민들을 도왔다. 이로 인해 청문회에 불려나갔지만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라고 발언했다. 1954년 전역 후 부산에 거주하며 한국인들을 돕다가 198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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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피란민들로 인해 무허가로 지어진 집,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적산가옥 등 목조주택이 굉장히 많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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