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정신병원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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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서울신경정신과의원 화재 論山 特別神經精神病院 - 火災 騷動 Nonsan seoul psychiatry fire | ||
발생일 | ||
발생 위치 | ||
유형 | ||
원인 | 담뱃불 취급부주의 | |
인명 피해 | 사망 | 34명 |
부상 | 2명 | |
재산 피해 | 700만원 | |
영향 | 철거 |
우선 이 정신건강의학의원은 임시건물이었다. 거기다 규정을 어긴 운영에도 불구하고 논산보건소 측에서는 점검에서 아무런 하자가 없답시고 증설 허가를 내 줬다.
문제는 정신병동 시설에 대한 복지가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했던 시절이라[3] 해당 병동이 소방시설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19명 수용 규모인데 41명을 넘게 수용했고 스티로폼 판넬로 되어 있었고 애초에 정신병원 특성상 환자의 도주를 막기 위해 문들도 다 잠겨 있었으며 중증 환자들의 발작과 탈주를 막기 위해 환자들의 양 손발목에 비닐호스를 묶은 데다 수면제를 먹이는 고전적인 구속책을 썼다. 이렇다 보니 환자들은 전부 대피조차 못 했고 유독가스는 말 안해도 말 다했다. 그 때문에 시체들도 전부 심하게 타 버려서 성별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문제는 정신병동 시설에 대한 복지가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했던 시절이라[3] 해당 병동이 소방시설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19명 수용 규모인데 41명을 넘게 수용했고 스티로폼 판넬로 되어 있었고 애초에 정신병원 특성상 환자의 도주를 막기 위해 문들도 다 잠겨 있었으며 중증 환자들의 발작과 탈주를 막기 위해 환자들의 양 손발목에 비닐호스를 묶은 데다 수면제를 먹이는 고전적인 구속책을 썼다. 이렇다 보니 환자들은 전부 대피조차 못 했고 유독가스는 말 안해도 말 다했다. 그 때문에 시체들도 전부 심하게 타 버려서 성별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새벽 2시 25분에 남자 입원실 이불에서 발화되었다. 원인은 담배불 취급 부주의였으며 여성 환자 수용실 사물함 부근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되었고 병동 관리인이 남자 환자에게 담배불을 건네주어서 그 환자가 사물함 주변에 버린 담배꽁초가 이불에 옮겨붙어서 연소가 확대되었다. 불은 칸막이에 인화되어서 순식간에 임시건물 병동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화재 신고를 최초로 받은 공주소방서[4]는 신속하게 병원으로 도착했지만 출입문이 잠겨 있는 데다 한 술 더 떠서 아예 유리창들도 없어서 소방관들이 도끼로 뜯고 잠긴 문도 개방하고 들어가야 했다. 기사에 기재된 사망자들의 나이를 보면 알다시피 사망자 대부분이 중년[5]이었다. 일부 사망자들은 시신이 불에 타버려 성별 확인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훼손이 매우 심했다.
이 화재로 총 34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2명, 약 700만원(2022년의 가치로 약 1600만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소방 당국의 조사 결과 현장 도착 시 건물 전체가 연소 확대된 상태로 초기신고가 지연되었으며 주출입구 이외에는 비상 탈출구가 없고 창문 등 개구부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었으며 주출입구 이외에는 비상탈출구가 없고 유리창 등 개구부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었고 주출입구도 철문으로 닫혀 있어 신속한 내부진입, 인명 구조 활동에 큰 어려움이 되었다.
즉, 적정 수용인원을 초과하여 41명을 넘게 수용했고 조립식 건물의 내외부 출입문이 대부분 잠겨 있거나 아예 폐쇄되었으며 병원 측이 환자들의 바깥 출입 통제를 위해 비닐호스로 양쪽 손발끝을 묶어 놓고 있았다.
환자들은 폐쇄적인 건물 구조와 보수적인 병원의 태도로 인해 탈출 시도도 해 보지 못한 채 얌전히 누운 채로 엉켜서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화재로 총 34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2명, 약 700만원(2022년의 가치로 약 1600만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소방 당국의 조사 결과 현장 도착 시 건물 전체가 연소 확대된 상태로 초기신고가 지연되었으며 주출입구 이외에는 비상 탈출구가 없고 창문 등 개구부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었으며 주출입구 이외에는 비상탈출구가 없고 유리창 등 개구부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었고 주출입구도 철문으로 닫혀 있어 신속한 내부진입, 인명 구조 활동에 큰 어려움이 되었다.
즉, 적정 수용인원을 초과하여 41명을 넘게 수용했고 조립식 건물의 내외부 출입문이 대부분 잠겨 있거나 아예 폐쇄되었으며 병원 측이 환자들의 바깥 출입 통제를 위해 비닐호스로 양쪽 손발끝을 묶어 놓고 있았다.
환자들은 폐쇄적인 건물 구조와 보수적인 병원의 태도로 인해 탈출 시도도 해 보지 못한 채 얌전히 누운 채로 엉켜서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들인 데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보니 동시기의 대형 참사에 비하면 빠르게 잊혔다.[6][7] 무엇보다 같은 날 혜화동 무장 탈영병 총격 난동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이 사고는 더더욱 빠르게 묻혀버렸다.
소방법 위반으로 구속된 병원장 이○민은 사고 이후 취암동 시내에서 다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소방법 위반으로 구속된 병원장 이○민은 사고 이후 취암동 시내에서 다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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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논산군이었고 1996년에 시로 승격되었다.[2] 사고 이후 건물은 철거되었다.[3] 21세기에도 일부 시설은 마찬가지지만 장항 수심원 사건 같은 사례에서 보듯 20세기에는 더 심각했다.[4] 당시는 공주소방서 논산소방파출소였으며 1997년 12월 15일에 논산소방서로 분리, 개청하였다.[5] 그 중 일부는 장기입원으로 추정된다.[6] 21세기라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외신 보도까지 이루어졌을 참사였으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또는 광역시에 발생한 참사나 국가재난급의 사건사고가 아닌 이상 몇 꼭지 정도로 다루는 게 전부였다.[7] 여기에 더하여 21세기와는 다르게 SNS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인터넷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1993년 당시만 해도 대부분 휴대전화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겨우 1993년 말에 접어들어서야 전국 74개 시 전역 및 읍 단위까지의 이동통신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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