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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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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발생일
1990년 9월 1일 14시 50분 경
발생 위치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강천리
영동고속도로 신갈방향 62km[1] 섬강교 인근(현 섬강로)

유형
버스 추락
원인
버스 기사의 무리한 과속 및 우천으로 인한 수막현상
인명피해
사망
26명
부상
4명
재산 피해
-

1. 개요
1.1. 들어가기 전에 : 왕복 2차로 고속도로의 악명
2. 사고 경위3. 사고 원인4. 사고 여파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당시 MBC 뉴스 보도
당시 KBS 뉴스 보도
당시 경기일보 기사

1990년 9월 1일 14시 50분 강릉에서 출발하고 동서울터미널으로 가던 강원여객 소속 시외버스[2]가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강천면 강천리 영동고속도로 신갈방향 62km 지점 섬강교 상에서 과속 및 추월을 하다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섬강교 다리 아래로 떨어져서 승객 29명과 버스기사 1명 포함 30명 중에서 단 4명만 살아남은 참사로 1981년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와 1985년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와 더불어 3번째로 대참사가 벌어졌던 버스 사고다.

1.1. 들어가기 전에 : 왕복 2차로 고속도로의 악명[편집]

1990년 당시에는 88올림픽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영동고속도로[3]는 신갈부터 원주까지 왕복 4차로 고속도로를 확장 공사하는 중이었고 그때까지는 영동고속도로는 왕복 2차로 고속도로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분리대도 없었고 터널도 거의 없었으며 산을 그대로 타고 가야 하는 불량한 선형 때문에 운전하는 사람들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경험이었다고 하며 그만큼 사고 위험도 더욱더 높았다.

이 같은 도로 상태와 비슷한 환경으로 발생한 대형사고로 2000년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88올림픽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대형참사가 있다.

2. 사고 경위[편집]

1990년 9월 1일 태풍 에이브의 북상으로 한반도 전 지역엔 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같은 날 강원여객 소속 강릉 - 동서울간 시외버스가 운행하고 있었는데 버스 기사가 섬강교 인근에서 앞서가던 차가 느리게 주행하여 맞은편 차가 없어서 추월하는 순간 갑자기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중앙선을 침범하고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나서 20m 섬강 아래에 추락했다. 강으로 추락한 버스는 거센 물살에 휩쓸렸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승객 4명은 안전벨트를 풀고 버스 창문을 깨서 간신히 생존했다. 한편 버스에서 못 빠져나온 승객들은[4]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갔으며 사고 당일에는 강한 비로 인해 버스기사와 승객 2명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그쳤으나 이후 3일부터 수색 작업을 재개한 결과 21명이 사망한 상태로 발견됐고 사고 발생 14일후에 남은 실종 승객 한 명이 강화도 인근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총 26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했다.

3. 사고 원인[편집]

사고 원인은 버스 기사의 무리한 과속과 추월으로 당시 해당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80km였는데 사고 버스는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어긴 시속 100km로 과속 및 추월을 하다가 수막현상으로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추락했다. 또한 도로상태가 왕복 2차로 고속도로라서 중앙분리대 없는 고속도로에서 맞은편 차량이 없을 경우 추월을 빠르게 가능해서 운행하는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는 결과도 나왔다.

4. 사고 여파[편집]

이 사고의 여파로 당시 한국도로공사에서는 영동고속도로를 왕복 4차로 고속도로 확장공사를 빠르게 해서 사고 발생 4년 후신갈분기점 - 만종분기점까지 왕복 4차로 확장공사 및 개량공사를 완료했으며 이후 남은 왕복 2차로 고속도로 구간들이 차례대로 왕복 4차로 고속도로로 확장 및 개량공사를 완료했고 2001년에 마지막까지 왕복 2차로 고속도로 구간이었던 대관령 구간도 왕복 4차로 고속도로 확장공사 및 이설을 끝으로 영동고속도로 전구간이 왕복 2차로에서 4차로까지 확장 공사를 완료했다.

또 사고 희생자 중 홍천 내면고등학교 소속 여교사가 아들과 해당 버스를 탔다가 참변을 당했는데 여교사의 남편이 유서를 남기고 사고 발생 15일 후에[5] 전신주에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일도 있었는데 이 유서를 바탕으로 1991년에 섬강에서 하늘까지란 소설이 출간됐으며 출간 1년 후이경영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다.

5. 둘러보기[편집]

[ 2020년대 ]
[ 2010년대 ]
발생일
사건명
2019년 5월 29일
27
2018년 1월 26일
51
2017년 12월 21일
29
2014년 12월 1일
27
2014년 5월 28일
21
2014년 4월 16일
299
2010년 12월 13일
22
2010년 3월 26일
46
[ 2000년대 ]
발생일
사건명
2008년 1월 7일
40
2003년 2월 18일
192
2002년 4월 15일
130
2001년 9월 25일
25
2001년 7월 24일
20
2000년 10월 27일
22

[ 1990년대 ]
[ 198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1989년 7월 27일
79
1988년 3월 25일
22
1987년 11월 29일
115
1987년 8월 29일
32
1987년 6월 16일
29
1986년 7월 30일
21
1985년 1월 11일
38
1984년 1월 14일
38
1983년 10월 9일
25
1983년 9월 1일
269
1983년 4월 18일
25
1982년 6월 1일
53
1982년 4월 26일
62
1982년 2월 5일
53
1981년 11월 22일
33
1981년 5월 14일
55
1981년 2월 28일
24
1980년 6월 5일
23
[ 197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1979년 4월 14일
44
1978년 7월 23일
33
1977년 11월 11일
59
1976년 10월 28일
34
1976년 5월 18일
23
1976년 2월 28일
32
1974년 11월 3일
88
1974년 6월 28일
28
1974년 2월 22일
159
1973년 8월 12일
32
1973년 5월 16일
22
1972년 12월 24일
30
1972년 12월 2일
53
1972년 8월 1일
26
1971년 12월 25일
166
1971년 10월 13일
20
1971년 5월 10일
80
1971년 5월 10일
31
1970년 12월 15일
326
1970년 11월 5일
31
1970년 10월 14일
46
1970년 8월 21일
25
1970년 4월 8일
33

[ 196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1969년 1월 31일
41
1968년 10월 30일
48
1968년 1월 8일
41
1967년 10월 16일
42
1967년 9월 15일
29
1967년 4월 8일
80
1967년 1월 19일
39
1967년 1월 14일
93
1967년 1월 1일
41
1966년 1월 18일
22
1964년 7월 29일
95+
1963년 10월 23일
49
1963년 6월 25일
70
1963년 1월 18일
140
1962년 9월 7일
36
1960년 3월 2일
62
1960년 1월 26일
31
[ 195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1956년 1월 12일
66
1955년 3월 2일
42
1953년 11월 27일
29
1953년 1월 31일
56
1953년 1월 25일
66
1953년 1월 9일
330
1951년 7월 11일
94
1951년 7월 11일
30+
[ 194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1949년 8월 18일
51
1947년 8월 19일
23
1946년 11월 13일
42
1946년 10월 22일
59
1945년 9월 29일
73
1945년 8월 24일
549​~​5,000+


[1] 신갈안산고속도로가 개통하기전 1년전이었고 당시 영동고속도로의 공식적인 종점은 신갈JC이었다.[2] 아시아자동차AM928로 추정된다.[3] 당시에는 신갈안산고속도로가 공사 중이었고 영동고속도로 공식적인 종점은 신갈JC까지였다. 현재의 영동고속도로는 2001년 8월 25일에 서창JC가 종점이 되었다.[4] 대부분이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상태였다.[5] 아들의 시신을 찾은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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