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장승포 산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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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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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거제군은 봄부터 가뭄이 지속되어 농작물이 잘 안 자라고 식수도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5월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 숨통이 트이나 싶었지만 비는 계속해서 내려 오히려 피해가 더 커졌다. 태풍 샤리까지 오는 바람에 폭우 피해는 더더욱 커졌는데 무려 하루에 500mm에 달하는 비가 내렸다.
장승포읍 장승포리 3구 마을 뒷산도 폭우로 피해를 많이 봤다. 계속해서 오는 폭우로 땅이 점차 스스로 무게를 못 이기게 됐다. 24일 장승포 뒷산에서 균열이 일어나 주민들이 급히 대피했다. 하지만 아무 일이 없고 25일 아침엔 비도 어느 정도 그치자 주민들이 다시 돌아와 짐을 챙기려는 순간 오전 8시 30분, 폭우로 불어난 지하수를 이기지 못한 산 중턱 약 70m 정도가 무너졌다. 산사태로 도로 아래의 마을이 흙무더기에 파묻혔다. 주택 6동과 9세대가 흙으로 매몰됐다.
참사가 일어나자 당시 거제군 군수였던 변관영은 긴급 대책 위원회를 사고 지점 바로 아래에 위치했던 거제중.고등학교에 설치했고 변관영 군수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유가족 구호활동과 함께 매몰된 시신을 발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엔 1천여명의 주민과 공무원, 학생들이 삽과 괭이로 흙무더기를 파헤치고 시신을 수습했다. 이후 진해 해군통제부에서 불도저 등 중장비를 지원해 밤새 작업을 했으나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흙무더기에 파묻히면서 아예 신체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많아 유가족들은 잘려나간 신체 부위를 들고 누구의 신체 부위인지 알아내야 했다.
가족이 모두 사망한 집도 많았다. 그런 집은 공무원들이 시체를 수습했다. 박정희 장군은 홍종철 최고회의 무사위원장과 이계순 내무부 차관, 양찬우 경남지사와 경찰국장등과 함께 현장을 방문하여 시신 발굴작업을 지휘하고 깊은 애도를 표한 뒤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발굴 작업은 20일 정도 흐른 후에 끝났다.
이 사고로 70명이 사망했는데 61명은 주민, 9명은 경찰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거제교육연구소장 김문태도 있었다. 김문태는 당시 원고를 집필하던 도중 사고로 가족과 같이 목숨을 잃었다.
장승포읍 장승포리 3구 마을 뒷산도 폭우로 피해를 많이 봤다. 계속해서 오는 폭우로 땅이 점차 스스로 무게를 못 이기게 됐다. 24일 장승포 뒷산에서 균열이 일어나 주민들이 급히 대피했다. 하지만 아무 일이 없고 25일 아침엔 비도 어느 정도 그치자 주민들이 다시 돌아와 짐을 챙기려는 순간 오전 8시 30분, 폭우로 불어난 지하수를 이기지 못한 산 중턱 약 70m 정도가 무너졌다. 산사태로 도로 아래의 마을이 흙무더기에 파묻혔다. 주택 6동과 9세대가 흙으로 매몰됐다.
참사가 일어나자 당시 거제군 군수였던 변관영은 긴급 대책 위원회를 사고 지점 바로 아래에 위치했던 거제중.고등학교에 설치했고 변관영 군수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유가족 구호활동과 함께 매몰된 시신을 발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엔 1천여명의 주민과 공무원, 학생들이 삽과 괭이로 흙무더기를 파헤치고 시신을 수습했다. 이후 진해 해군통제부에서 불도저 등 중장비를 지원해 밤새 작업을 했으나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흙무더기에 파묻히면서 아예 신체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많아 유가족들은 잘려나간 신체 부위를 들고 누구의 신체 부위인지 알아내야 했다.
가족이 모두 사망한 집도 많았다. 그런 집은 공무원들이 시체를 수습했다. 박정희 장군은 홍종철 최고회의 무사위원장과 이계순 내무부 차관, 양찬우 경남지사와 경찰국장등과 함께 현장을 방문하여 시신 발굴작업을 지휘하고 깊은 애도를 표한 뒤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발굴 작업은 20일 정도 흐른 후에 끝났다.
이 사고로 70명이 사망했는데 61명은 주민, 9명은 경찰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거제교육연구소장 김문태도 있었다. 김문태는 당시 원고를 집필하던 도중 사고로 가족과 같이 목숨을 잃었다.
7월 20일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산사태 외에도 폭우로 인해 보리가 물에 잠겨 싹이 트지 못하는 바람에 흉년까지 들었다. 거제뿐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폭우로 인한 흉년이 들어 정부에선 수천석의 구호곡을 방출해 실업자와 노동자 구호를 위한 공사를 실시했고 태풍 피해 복구 사업을 추진해 일당 임금으로 하루에 일인당 쌀 또는 보리쌀을 3되와 4홉 씩 지급했다.
장승포동에서는 2011년 현재의 소공원(장승포동 385번지)으로 추모비를 이전하여 매년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산사태 외에도 폭우로 인해 보리가 물에 잠겨 싹이 트지 못하는 바람에 흉년까지 들었다. 거제뿐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폭우로 인한 흉년이 들어 정부에선 수천석의 구호곡을 방출해 실업자와 노동자 구호를 위한 공사를 실시했고 태풍 피해 복구 사업을 추진해 일당 임금으로 하루에 일인당 쌀 또는 보리쌀을 3되와 4홉 씩 지급했다.
장승포동에서는 2011년 현재의 소공원(장승포동 385번지)으로 추모비를 이전하여 매년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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