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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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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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악면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가던 이 시외버스는 1970년부터 노선이 운용됐는데 하루에 2회만 다니고 정원 한계는 53명이었다. 사람이 많아 언제나 과적 운용했는에 경찰은 단속을 잘 안 했다. 사고 당일에도 학생들과 군장병, 방생기도를 하러 가던 스님, 신체검사를 하러 가던 청년들을 포함해 무려 94명이 버스에 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버스는 1970년에도 차량 한 대가 추락한 적이 있는 청평호를 지나는 폭 4.5m의 위험한 커브길을 달리다 미끄러져 높이 11m 아래로 떨어져 깊이 20m의 청평호로 가라앉았다.
당시 청평호엔 300여대의 배가 있었으나 이 중 수상경찰 배는 보트 1대만 있어서 구조작업이 늦어졌다. 버스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사람들만 구할 수 있었는데 탑승객 중 구출된 사람은 겨우 14명 뿐이었고 다른 승객 80명은 버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다.
사고 현장은 청평댐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이었는데, 평소에도 유원지를 찾는 관광객 차량이 많이 다녔으나 도로 폭은 좁고 포장도 되어 있지 않았고 위험표시조차 없어 이전부터 위험 지역으로 소문났다. 1971년 3월 5일 전국 도로 교통안전진단을 실시해 전국 3만 4천km 가운데 비탈길, 커브 등 고로 사정이 나쁜 곳이 6천개가 있고 그 중 이 사고 장소를 포함한 560곳에 안전시설을 설치해야 한다고 경고했고 군수와 시장에게 그런 곳에 위험지역표시를 하라고 지시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여기에 정원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인원이 탑승했는데도 제대로 단속을 하지 않은 경찰의 나태함이 큰 참변을 불렀다. 또 운전자가 10일 넘게 퇴근을 못해 생긴 피로, 차량 정비 불량도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1] 정원초과가 잦다 보니 승객들로부터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쇠로 된 줄이 창가에 쳐져 있었기 때문에 탈출이 더욱 어려웠던 것도 희생자 수를 늘린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쇠줄은 다른 곳에서도 일상이었는지 여객 회사들의 요청으로 조립업체들에서 나올 때부터 장착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
분노한 유가족 300여명은 시신 50여구를 실고와 시위를 벌였고, 기동경찰 500여명이 출동해 유가족과 마찰을 빚은 끝에 다음날 강제로 해산되는 일도 있었다.#
사고 당시 방생기도를 하러 가다 사고를 당했지만 생존한 일성스님은 대전의 금강사에서 수행을 하면서 희생자들을 위해 사십구재를 손수 지내고 불공을 드렸다. 또 2000년 동국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가던 버스가 미시령에서 전복되어 7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나자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나 괴로웠다며 평생 모은 돈 2,000만원을 성금으로 내면서 동국대 불교 종합병원 건립에 써 달라고 부탁했다. # 일성 스님이 구한 생존자 중에는 태어난 지 80일 정도였던 신생아가 있었는데 의료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있던 남편을 면회하러 가던 엄마 품에 있다가 사고를 만나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이에 아이의 아빠는 판사의 직권으로 보석으로 풀려나 아이를 양육할 수 있게 되었다.#
해당 사고 당시의 사진을 검색하면 저수지에 빠진 사고 차량을 크레인으로 끌어올리는 뉴스 사진이 뜨는데, 버스 안의 시신이 그대로 사진에 찍혀 있으니 주의하자.
당시 청평호엔 300여대의 배가 있었으나 이 중 수상경찰 배는 보트 1대만 있어서 구조작업이 늦어졌다. 버스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사람들만 구할 수 있었는데 탑승객 중 구출된 사람은 겨우 14명 뿐이었고 다른 승객 80명은 버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다.
사고 현장은 청평댐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이었는데, 평소에도 유원지를 찾는 관광객 차량이 많이 다녔으나 도로 폭은 좁고 포장도 되어 있지 않았고 위험표시조차 없어 이전부터 위험 지역으로 소문났다. 1971년 3월 5일 전국 도로 교통안전진단을 실시해 전국 3만 4천km 가운데 비탈길, 커브 등 고로 사정이 나쁜 곳이 6천개가 있고 그 중 이 사고 장소를 포함한 560곳에 안전시설을 설치해야 한다고 경고했고 군수와 시장에게 그런 곳에 위험지역표시를 하라고 지시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여기에 정원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인원이 탑승했는데도 제대로 단속을 하지 않은 경찰의 나태함이 큰 참변을 불렀다. 또 운전자가 10일 넘게 퇴근을 못해 생긴 피로, 차량 정비 불량도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1] 정원초과가 잦다 보니 승객들로부터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쇠로 된 줄이 창가에 쳐져 있었기 때문에 탈출이 더욱 어려웠던 것도 희생자 수를 늘린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쇠줄은 다른 곳에서도 일상이었는지 여객 회사들의 요청으로 조립업체들에서 나올 때부터 장착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
분노한 유가족 300여명은 시신 50여구를 실고와 시위를 벌였고, 기동경찰 500여명이 출동해 유가족과 마찰을 빚은 끝에 다음날 강제로 해산되는 일도 있었다.#
사고 당시 방생기도를 하러 가다 사고를 당했지만 생존한 일성스님은 대전의 금강사에서 수행을 하면서 희생자들을 위해 사십구재를 손수 지내고 불공을 드렸다. 또 2000년 동국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가던 버스가 미시령에서 전복되어 7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나자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나 괴로웠다며 평생 모은 돈 2,000만원을 성금으로 내면서 동국대 불교 종합병원 건립에 써 달라고 부탁했다. # 일성 스님이 구한 생존자 중에는 태어난 지 80일 정도였던 신생아가 있었는데 의료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있던 남편을 면회하러 가던 엄마 품에 있다가 사고를 만나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이에 아이의 아빠는 판사의 직권으로 보석으로 풀려나 아이를 양육할 수 있게 되었다.#
해당 사고 당시의 사진을 검색하면 저수지에 빠진 사고 차량을 크레인으로 끌어올리는 뉴스 사진이 뜨는데, 버스 안의 시신이 그대로 사진에 찍혀 있으니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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