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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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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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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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81호 | |||||||||||||||||||||||
본관 | ||||||||||||||||||||||||
재임기간 | 제35대 내무부차관 | |||||||||||||||||||||||
제50대 내무부장관 | ||||||||||||||||||||||||
제14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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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50대 내무부장관이자 제14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1934년 11월 18일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제천군으로 이주하여 제천남당초등학교, 제천중학교, 제천고등학교(2회), 육군사관학교(14기)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안무혁, 이종구, 배명국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할 때 사회정화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1년 육군 준장으로 전역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2년 1월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4월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으로 서정화 내무부 장관이 경질되고 노태우 체육부(現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임명되자 노태우와 가까워졌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제천시-제원군-단양군 선거구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이택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6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제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5월부터 12월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4년 제14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95년 1월 김종필 前대표가 민주계와의 갈등으로 탈당하자 당 수습을 위해 대표최고위원을 맡았다.(국회부의장직은 사임) 김덕룡 사무총장과 함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였으나 사실상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대표직과 부의장직을 사퇴하였다.
1996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의 국회 상정에 반발하였다.[9] 그리하여 안무혁 등과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11년 9월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
이후 안무혁, 이종구, 배명국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할 때 사회정화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1년 육군 준장으로 전역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2년 1월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4월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으로 서정화 내무부 장관이 경질되고 노태우 체육부(現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임명되자 노태우와 가까워졌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제천시-제원군-단양군 선거구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이택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6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제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5월부터 12월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4년 제14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95년 1월 김종필 前대표가 민주계와의 갈등으로 탈당하자 당 수습을 위해 대표최고위원을 맡았다.(국회부의장직은 사임) 김덕룡 사무총장과 함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였으나 사실상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대표직과 부의장직을 사퇴하였다.
1996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의 국회 상정에 반발하였다.[9] 그리하여 안무혁 등과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11년 9월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
위원회 간사로 있는 육군 준장이 인상적이었다. 얼굴이 굉장히 차갑고 날카롭게 생겼는데,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렵게 생각하면서 아예 접근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위원장보다 더 실세 있는 파워맨으로 보였다. (중략)
그 육군 준장이 나중에 내무부장관과 신한국당 대표,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이춘구 씨로,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가까운 인연을 맺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김종인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 中
-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강직한 성품과 깔끔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런 본인의 성격은 정치행보에서도 드러나는데, 자신이 민자당 대표로서 지방선거를 이끌었지만 사실상 패배하여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으며 대통령의 수 차례 반려 끝에 결국 사퇴를 하게 되었다. 또한 정계은퇴도 대통령과 당직자들이 15대 총선 출마를 해줘야 한다며 만류했지만 자신이 모셨던 두 대통령이 5.18특별법 제정과 구속으로 곤욕을 겪는 상황을 겪자자 정치현실에 회의를 느껴 제천 지역구 당원 모임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그 후 여의도 인근에 사무실을 차려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독서 등의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 본인의 운전기사와의 일화도 있는데, 본인이 차에 탑승 후 바로 출발하지 않고 뜸들이면 시간과 기름 낭비라며 질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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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주시·중원군·제천시·제원군·단양군[2] 충북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이다.[3] 충북 제천시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이다.[4] 충북 제원군·단양군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이다.[A] 5.1 5.2 충북 제2선거구(충주시·중원군·제천시·제원군·단양군)의 제12대 국회의원이다.[7] 충북 제천시·단양군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8] 견성군파# 15대손, 시조 43세손 ○九(구) 항렬.[9] 그러나 아이러니한 건 정작 5.18 당시 포병학교장 시절 군 출동을 막다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분노를 사고 사령관실에서 전두환에게 직접 조인트를 심하게 까이고 준장 진급 직후 강제 예편을 당했다는거다. 이후로 후배 포병장교들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전까지 진급에 불이익을 심하게 받게 되었다. 실제로 6.29 선언의 숨은 공신이 공교롭게도 그의 육사 1년 후배인 민병돈 前 특전사령관이라고 한다. 그는 고명승과 더불어 육사15기 하나회 성골(전두환 라인)이지만 실제로 특전사 출동 논의가 오갈 때 그의 수하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의 동기인 고명승 보안사령관한테 군 출동 거부 의사를 밝히게 되고 결국 전두환은 백기를 들게 된다.[10] 충주시, 제천시, 중원군, 제원군, 단양군[B] 충주시, 제천시, 중원군, 제원군, 단양군[1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3]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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