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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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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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재임기간 | 제4대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
제27대 국방부장관 | |
1933년 6월 26일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6.25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과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벌어지자 육사 생도의 혁명 지지행진을 이끈 바 있다.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였으며 32사단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3군단장, 합동참모본부장 등을 거쳤다.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대장)을 지냈다.
전역 후에는 장관급인 국가안보회의 비상기획위원장에 임명됐으며 그가 장관급에 임명되자 하나회 내부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상훈은 비 하나회로 하나회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국방부 장관에도 하나회의 핵심, 정호용 대신 비 하나회인 이기백이 되었기에 불만은 더욱 컸다.[2] 이상훈의 중용은 지나치게 커진 하나회의 목소리를 줄이기 위한 전두환의 포석이었으며 서울 경기고 출신으로 능력이 우수하고 또한 강직하고 순수하여 군 안밖에서 신뢰가 컸던 그에 대한 포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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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재임 시에는 국방부장관을 약 2년간 지냈다. 재임 중에 통칭 '818계획'으로 불리는 군 조직 개편안을 추진하여 합동참모본부를 종전의 군사자문 기구에서 육-해-공 3군의 작전부대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최고 군령기구로 강화했다.[3]
1992년 KBO 총재에 취임했다.
이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다. 재임 중 참여정부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졸속추진이 논란이 되자 다른 예비역 장성들과 함께 반대를 주도했다..[4]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이 거세지자 이의 반대 집회를 재향군인회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 단체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대규모로 진행하여 보수단체의 대형 광화문 집회를 역대 처음으로 이끌어냈다
재향군인회장 이후에는 애국단체 총연합회장, 그리고 국가원로회의 상임의장을 맡아서 계속해서 보수단체들의 큰 어른으로써 역할을 했고 만 90세에도 집회에 자주 초대되어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했다.
2023년 9월 11일 저녁 8시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
전역 후에는 장관급인 국가안보회의 비상기획위원장에 임명됐으며 그가 장관급에 임명되자 하나회 내부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상훈은 비 하나회로 하나회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국방부 장관에도 하나회의 핵심, 정호용 대신 비 하나회인 이기백이 되었기에 불만은 더욱 컸다.[2] 이상훈의 중용은 지나치게 커진 하나회의 목소리를 줄이기 위한 전두환의 포석이었으며 서울 경기고 출신으로 능력이 우수하고 또한 강직하고 순수하여 군 안밖에서 신뢰가 컸던 그에 대한 포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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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재임 시에는 국방부장관을 약 2년간 지냈다. 재임 중에 통칭 '818계획'으로 불리는 군 조직 개편안을 추진하여 합동참모본부를 종전의 군사자문 기구에서 육-해-공 3군의 작전부대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최고 군령기구로 강화했다.[3]
1992년 KBO 총재에 취임했다.
이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다. 재임 중 참여정부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졸속추진이 논란이 되자 다른 예비역 장성들과 함께 반대를 주도했다..[4]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이 거세지자 이의 반대 집회를 재향군인회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 단체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대규모로 진행하여 보수단체의 대형 광화문 집회를 역대 처음으로 이끌어냈다
재향군인회장 이후에는 애국단체 총연합회장, 그리고 국가원로회의 상임의장을 맡아서 계속해서 보수단체들의 큰 어른으로써 역할을 했고 만 90세에도 집회에 자주 초대되어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했다.
2023년 9월 11일 저녁 8시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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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2] 다만 이건 후일 밝혀진 비화에 따르면 정호용의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청와대 참모인 장세동, 이학봉 등과 갈등을 빚다보니 전두환이 임명하기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다만 정호용은 국방장관 대신 내무부 장관으로 가게 되었으며 수차례의 개각을 거쳐 국방장관을 역임하는 등 5공 내내 승승장구했다.[3] 818 계획은 1990년 국군조직법 개정으로 현실화되었고, 정호근 육군 대장이 3군 총괄 군령권을 행사하는 첫 합참의장에 취임했다.[4] 이 당시 나왔던 유명한 연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끄러운줄 알아야지로 알려진 연설이다. 참고로 전작권 환수 문제는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논의되어 온 문제로 이상훈이 군에 재직중이던 5공화국 시절에도 꾸준히 논의가 되었었고 그 성과로 노태우 정부 시절에 평시작전권이 환수되기까지 했었다. 물론 참여정부 시절 전작권 환수가 졸속으로 추진된 감은 있었으나 대통령 입장에서는 전직 국방장관, 참모총장 등이 죄다 반대를 해버리니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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