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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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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처장 (1948~1955)
초대
허정
제2대
김병연
제3대
전규홍
제4대
한동석
제5대
정운갑
국무원사무국장 (1955~1960)
제6대
문봉제
제7대
신두영
국무원사무처장 (1960~1961)
제8대
이호
제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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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정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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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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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수석비서관 (1968~1970)
민원수석비서관 (1970~1971)
초대
류승원
초대
안광석
민정수석비서관 (1971~1980)
민원수석비서관 (1980)
제2대
김시진
제3대
박승규
초대
이원홍


제17대 전반기
맹형규
제17대 전반기
김용갑
제17대 후반기
이윤성

선거구 개편
신상식[1]
제15대
김용갑
선거구 통합
김용갑[2]
선거구 통합
김용갑[4]
노기태[5]
제16-17대
김용갑
제18-19대
조해진
대한민국 제22대 총무처장관
김용갑
金容甲 | Kim Yong-gab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
출생
경상남도 밀양군 초동면
(現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본관
현직
국민의힘 상임고문
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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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김하야
자녀
3남
학력
밀양국민학교 (졸업)
동명중학교 (졸업)
밀양농잠고등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 석사)
UC 버클리 대학교 (국제정치학 / 수료)
종교
소속 정당
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6, 17
경력
군사 경력
임관
복무
1961년 3월 ~ 1971년
최종 계급
소령 (대한민국 육군)
1. 개요2. 생애3. 정치 성향4. 논란5. 여담6. 선거 이력7. 소속 정당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936년 경상남도 밀양군 초동면#에서 태어났다. 마포구에서 잠시 유년시절을 보낸 적이 있으며, 밀양국민학교, 밀양동명중학교, 밀양공립농잠학교, 육군사관학교(17기)를 졸업하였다. 허화평, 허삼수, 김진영, 안현태 등과 동기. 다만 하나회 소속은 아니었다. 수송 병과 장교로 복무하다가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여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하였다.

전두환 정부 때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6] 1987년 6월 항쟁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수용을 건의하였다. 노태우 정부 출범 후 1988년 총무처장관에 임명되었다. 총무처장관 재임 당시 좌경세력이 확대되고 있다고 발언하여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 야당의 반발을 야기했으며, 1989년 3월 노태우의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 이행을 촉구하면서 장관직을 사퇴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김덕룡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7]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밀양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7월 31일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남도 밀양시·창녕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산업자원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아무런 직도 맡지 않고 "보수정권이 권력을 되찾았으니 이제 정계를 떠나겠다. 그리고 퇴임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선 그리 호의적인 기억이 별로 없지만 고향마을 사람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나누는 모습에는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8]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한국당 - 한나라당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김덕룡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자 "참 치사한 사람"이라며 맹비난했다.[9][10] 현재는 국민의힘 상임고문이다.

3. 정치 성향[편집]

강성 우파의 아이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애초에 육군 출신인데다 5공 인사라서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5공 인사의 핵심이었던 허화평, 허삼수 같은 인물들보다 더 보수 성향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당에 좌경세력이 늘어나는 것 같다는 발언을 여러차례 해서 민주당 출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11] 노무현 탄핵 사태 때에는 노무현의 탄핵에 적극 찬성한 사람이기도 하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남경필, 원희룡, 고진화 등 소장파들을 여당의 프락치로 간주하고 열린우리당으로 가라는 발언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할 말은 하는 소신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례로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땡전뉴스에 대한 국민들의 솔직한 반응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6월 항쟁이 터졌을 때에는 직접 명동성당을 찾아가서 시위 현장을 살피기도 했다. 당시 시민들의 시위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두환에게 과감한 결단(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내려줄 것 등을 직언하기도 했다. 제17대 국회 시절에는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당하자 조승수 지키기 탄원서에 서명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으며[12]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7인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문창극국무총리 후보 파동 당시 이를 전격 비판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 당시 당대표 후보로는 이준석을 지지했다.#

4. 논란[편집]

아들들이 병역면제라서 욕을 먹었다.

5. 여담[편집]

애처가다. 1998년 2월 뇌출혈로 아내가 쓰러지자 1년 넘게 사물의 이름을 가르치고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어주며 병간호를 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아내 얼굴을 화장하는 남자’란 책도 출간했다.# 이후 17대 국회 말기에 정계 은퇴 선언을 한 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유인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내를 돌볼 겁니다.(중략) (아내하고) 해외 가면 렌트카 내가 얻고 부킹도 내가 할 거예요.” 라고 대답했다.#

2021년 11월 24일 전두환 장례식에 등장하여 조문을 한 뒤 기자들을 만나 1988년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이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반대하는 노태우 대표를 전 전 대통령이 설득해 직선제 개헌을 실현했다고 증언했다.#[13]

2023년 2월 1일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6·29 선언이 발표되기까지의 청와대 내 상황을 담은 자필 메모 2건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서울 서초 을
21,497 (22.08%)
낙선 (3위)
1996
경남 밀양
18,146 (28.55%)
당선 (1위)
초선[14]
2000
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
54,530 (54.74%)
재선
2004
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
43,685 (50.31%)
3선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88 - 1996
정계 입문
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1996 - 1997
입당
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
1997 - 2012
합당[15]
정계 은퇴
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2017 - 2020
당명 변경
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
2020
합당[16]
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
2020 - 현재
당명 변경

8. 둘러보기[편집]

[1] 밀양시·밀양군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 제14대 국회의원이다.[2] 밀양시·창녕군 선거구의 제16대 국회의원이다.[3] 현재 밀양시·의령군·함안군·창녕군 선거구이다.[4] 밀양시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5] 창녕군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6] 당시 땡전뉴스로 국민들이 뉴스를 5분 후에 켠다는 직언을 했다고.[7] 이 당시 김용갑의 출마로 보수 표가 분산되어 민자당 김덕룡 후보는 민주당 안동수 후보에게 592표 차로 간신히 승리했다.[8] '정계 은퇴' 김용갑 의원, 이 대통령에 '쓴소리' 서울경제 2008.4[9] 경향신문 2012.12[10] 위에 상술했듯이 20년전인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초구 을 지역에서 맞붙은 사이였다.[11] 다만 김용갑이 좌경세력으로 지목한 인사들 거의 대부분이 실제로 한나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하기는 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김원웅, 이부영, 이우재, 김부겸, 김홍신, 김영춘, 안영근 등.[12] 조승수 의원이 선거개시 직전에 지역 음식물쓰레기 처리장 건립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해서 지역 주민들과 합의 없이 해당 시설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서명운동에 동참했는데 검찰이 이걸 사전선거운동이라며 기소해버린 것. 사실 사전선거운동의 범위가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 수준으로 애매해서 정치보복으로 악용될 가능상이 높은 조항이기 때문에 여야를 막론하고 문제제기가 꾸준했었고 특히 조승수 의원의 사례는 사실상 헌법에서 규정하는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례라서 한나라당 의원들도 김용갑과 홍준표의 주도로 여럿 동참했었다. 특히 홍준표 의원은 자신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의원직을 잃어봤었고 검사 시절에도 검찰 주류의 상식 밖으로 행동하는 것을 여러번 보았기 때문에 정의심에서 동참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13] 본인이 이렇게 증언을 하는 이유는 그 날 노태우, 전두환 두 명 모두 사망했고 본인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이 사실들을 공개해야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4] 1996.7.31 신한국당 입당[15]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6]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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