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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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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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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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본관 | |||||||||||||||||
재임기간 | 제39대 보건복지부장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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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11]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평화민주당 이철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반대로 이철용과의 공천 경합에서 승리하여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99년 국민연금 정책 관련 혼선으로 경질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노무현 후보와 가까운 범 친노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 참패로 노무현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떨어지자 민주당 내의 반노무현 세력 중에 일부가 결집해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실질적으론 정몽준으로의 대통령 후보 교체를 주장하면서 후보 단일화 협의회를 창립했는데, 동교동계 중진인 김영배가 회장을 맡았지만 자금줄을 쥐고 있던 부회장 김원길이 핵심이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오영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고[12] 이후 정계에서는 은퇴했다. 이후 1999년부터 맡고 있던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직에 전념하였다.
WKBL 총재로서는 자신의 마당발 인맥을 활용해서 발전기금을 모으고 스폰서나 경품 협찬을 땡겨오면서 고사 위기에 놓여있던 한국여자프로농구를 최소한 굴려가게는 만들어 놓는데 성공한다. 게다가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리그에서 운영의 원칙을 나름대로 세운다. 대회 타이틀 스폰서를 가맹 구단이 돌아가면서 맡게 했고 선수들의 연봉과 FA가 틀을 확립했다. 여자 농구 유망주 육성을 위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WKBL 회관을 건설했고 자체 방송국인 WKBL TV도 만들었다. 무엇보다 김원길 총재 체제의 가장 큰 업적은 구리 KDB생명 위너스 농구단을 만들어 리그 내 구단을 여섯 개로 늘리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로서 멸망 직전까지 갔던 여자 농구는 극적으로 회생하는데는 성공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이성구 선생의 잔여 임기 3년은 물론 세 차례 더 연임하면서 1999년부터 2012년 4월까지 재직한다.
윤후덕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경기 파주시 갑), 최종환 전 경기 파주시장이 국회의원 재직 시절 그의 보좌관(비서) 이었다. 다만 2002년에 본인은 후단협에 참가하고 단일후보로 노무현으로 확정되자 본인은 한나라당으로 이적하고, 보좌관 지냈던 두 사람은 한나라당 입당 제의에 거절했고 잔류를 선택하면서, 결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99년 국민연금 정책 관련 혼선으로 경질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노무현 후보와 가까운 범 친노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 참패로 노무현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떨어지자 민주당 내의 반노무현 세력 중에 일부가 결집해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실질적으론 정몽준으로의 대통령 후보 교체를 주장하면서 후보 단일화 협의회를 창립했는데, 동교동계 중진인 김영배가 회장을 맡았지만 자금줄을 쥐고 있던 부회장 김원길이 핵심이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오영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고[12] 이후 정계에서는 은퇴했다. 이후 1999년부터 맡고 있던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직에 전념하였다.
WKBL 총재로서는 자신의 마당발 인맥을 활용해서 발전기금을 모으고 스폰서나 경품 협찬을 땡겨오면서 고사 위기에 놓여있던 한국여자프로농구를 최소한 굴려가게는 만들어 놓는데 성공한다. 게다가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리그에서 운영의 원칙을 나름대로 세운다. 대회 타이틀 스폰서를 가맹 구단이 돌아가면서 맡게 했고 선수들의 연봉과 FA가 틀을 확립했다. 여자 농구 유망주 육성을 위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WKBL 회관을 건설했고 자체 방송국인 WKBL TV도 만들었다. 무엇보다 김원길 총재 체제의 가장 큰 업적은 구리 KDB생명 위너스 농구단을 만들어 리그 내 구단을 여섯 개로 늘리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로서 멸망 직전까지 갔던 여자 농구는 극적으로 회생하는데는 성공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이성구 선생의 잔여 임기 3년은 물론 세 차례 더 연임하면서 1999년부터 2012년 4월까지 재직한다.
윤후덕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경기 파주시 갑), 최종환 전 경기 파주시장이 국회의원 재직 시절 그의 보좌관(비서) 이었다. 다만 2002년에 본인은 후단협에 참가하고 단일후보로 노무현으로 확정되자 본인은 한나라당으로 이적하고, 보좌관 지냈던 두 사람은 한나라당 입당 제의에 거절했고 잔류를 선택하면서, 결별하였다.
2021년 6월 2일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 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8 | 서울 도봉 을 | 7,344 (7.30%) | 낙선 (5위) | |||
1992 | 39,749 (38.37%) | 당선 (1위) | 초선 | |||
1996 | 서울 강북 갑 | 31,171 (40.13%) | 재선 | |||
2000 | 34,629 (51.20%) | 3선 | ||||
2004 | 28,666 (36.02%) | 낙선 (2위) |
역대 선거 벽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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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도봉구 갑의 제15대 국회의원[B] 도봉구 을의 제15대 국회의원[C] 강북구 갑의 제15대 국회의원[D] 강북구 을의 제15대 국회의원[E] 도봉구 갑의 제14대 국회의원[F] 도봉구 을의 제14대 국회의원[G] 도봉구 병의 제14대 국회의원[8] 음력 1942년 11월 26일.[9] 한림공-모암공-현감공파 43세손.[10] 이때 KBS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11] 지금의 도봉구 일대가 아닌 당시 관할구역이 지금의 강북구 일대다. 강북구로 분구된건 1995년 부터다.[12] 애초에 강북 지역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지지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지역이었던데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불어서 웬만한 지역은 한나라당이 불리한 상황이었다.[1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5]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16]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17]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후단협 참가)[19] 노무현-정몽준 간 대선후보 단일화가 노무현 후보로 확정된 것에 반발하여 탈당한 뒤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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