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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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전임 강영훈 국회의원의 별세)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 후 제6대, 제7대, 제8대 국회의원(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을 지냈다. 그러나 10월 유신 선포 후 옥고를 치르고 피선거권도 제한되었다.
전두환이 집권하고 나서도 정치규제를 받았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이듬해인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민주당 이철 후보와 민주정의당 김정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유치송이 총선 참패로 민주한국당 총재직을 잠시 물러나자 며칠 동안 대신 총재가 되었다가 물러났다. 그리고 그 해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평화민주당에 합류하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고, 제13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91년 노승환, 정대철 등과 함께 정치발전연구회를 결성하여 김대중 총재의 2선 퇴진과 야권통합을 주장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 탈락하자 민주당을 탈당하여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였고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말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합류하였다.
14대 국회의원 임기를 지내던 도중 1996년 2월 2일에 사망하였다.
전두환이 집권하고 나서도 정치규제를 받았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이듬해인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민주당 이철 후보와 민주정의당 김정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유치송이 총선 참패로 민주한국당 총재직을 잠시 물러나자 며칠 동안 대신 총재가 되었다가 물러났다. 그리고 그 해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평화민주당에 합류하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고, 제13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91년 노승환, 정대철 등과 함께 정치발전연구회를 결성하여 김대중 총재의 2선 퇴진과 야권통합을 주장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 탈락하자 민주당을 탈당하여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였고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말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합류하였다.
14대 국회의원 임기를 지내던 도중 1996년 2월 2일에 사망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계진출 첫 선거가 전임이자 같은 당이자 민주당 구파였던 강영훈 의원이 재임 중에 지병으로 작고해 공백으로 인해 치룬 재보궐 선거를 통해서 정계에 처음으로 입문하였지만, 조윤형 본인도 정치활동 및 생애 마지막엔 14대 국회의원 재임 도중 지병으로 작고하였다.
서울 노원구 갑의 고용진 국회의원이 조윤형의 비서관으로 있었다. 원래 고용진 의원은 동년배들과 달리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고, 당시 암암리에 행했던 과외(당시는 '과외금지법'으로 인해 불법)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게 과외를 받은 사람이 조 의원의 아들이었다. 때문에 언론계로 가려던 그를 조 의원이 권유해 자신의 보좌관부터 시작해 재선 시의원과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울 노원구 갑의 고용진 국회의원이 조윤형의 비서관으로 있었다. 원래 고용진 의원은 동년배들과 달리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고, 당시 암암리에 행했던 과외(당시는 '과외금지법'으로 인해 불법)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게 과외를 받은 사람이 조 의원의 아들이었다. 때문에 언론계로 가려던 그를 조 의원이 권유해 자신의 보좌관부터 시작해 재선 시의원과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0 | 경기 7[20] | 14,390 (30.43%) | 당선 (1위) | |||
1963 | 서울 7[23] | 29,881 (54.07%) | 재선[24] | |||
1967 | 44,827 (66.51%) | 3선 | ||||
1971 | 서울 8[25] | 58,713 (66.47%) | 4선[26] | |||
1985 | 서울 5[27] | 79,991 (26.81%) | 낙선 (3위) | |||
1988 | 서울 성북 을 | 50,310 (38.57%) | 당선 (1위) | 5선 | ||
1992 | 3,574,419 (17.36%) | 당선 (4번) |
- 선거에서 단 한 번도 1번을 달고 출마한 적이 없다.[35]
소속 | 기간 | 비고 |
1960 - 1961 | 정계 입문 | |
1961 - 1963 | 정당 해산[36] | |
1963 - 1965 | 입당 | |
1965 - 1967 | 합당[37] | |
1967 - 1969 | 합당[38] | |
1969 | 자진 정당 해산 | |
1969 - 1980 | 정당 재등록 | |
1980 - 1984 | 정당 해산 정치활동 규제 | |
1984 - 1985 | 정치활동 규제 해제 입당 | |
1985 | 탈당[39] | |
1985 - 1987 | 입당 | |
1987 | 탈당[40] | |
1987 | 창당 | |
1987 | 탈당[41] | |
1987 - 1991 | 창당 | |
1991 | 당명변경 | |
1991 - 1992 | 합당[42] | |
1992 | 탈당[43] | |
1992 | 창당 | |
1992 | 탈당[44] | |
1992 - 1995 | 복당 | |
1995 | 탈당[45] | |
1995 - 1996 | 창당 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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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1 1.2 1.3 의정부시·양주군 선거구의 제6대 국회의원 이다.[2] 성북구의 제5대 국회의원 이다.[5] 구 서울 성북구.[B] 6.1 6.2 성북구의 제12대 국회의원 이다.[8] 절효공파-파서공파 25세 형(衡) 행(行) 항렬.[9] (趙炳玉, 1894년 5월 21일 ~ 1960년 2월 15일)[10] (盧禎冕, 1895년 ~ 1976년 12월 3일)[11] (趙仁元, 1865년 5월 2일 ~ 1932년 1월 25일)[12] (南陽洪氏, 1861년 - 1922년 11월 11일)[13] (趙準衡, 1921년 ~ 2000년)[14] 자매로 조자형이 있으나 생년은 알 수 없다.[15] (趙舜衡, 1935년 3월 10일 ~ 현재)[16] 1935년생이다.[17] 1남은 1958년생으로 추정된다.[18] 노병선(盧炳善)의 딸이다.[19] 동생 조순형도 서울고를 졸업했다.[20] 양주군 갑[21] 전임자 강영훈 의원 작고[22] 1961. 5. 16 자격정지 (5.16 군사정변)[23] 성북구 갑[24] 1965년 민주당에 흡수[25] 성북구 갑[26] 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27] 성북구[28] 5번의 선거 중 첫 낙선.[29] 1992.5.1 탈당, 민주당 입당[30] 당시 법률로는 전국구 의원이 탈당해도 의원직이 상실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시 통일국민당 전국구 후보(8번)였던 배우 강부자가 헌법소원을 건 적도 있다(92헌마153).[31] 1996. 2. 2 작고[32] 성북구 갑[33] 성북구 갑[34] 성북구[35] 선거벽보 자료는 없으나, 재보선 문서에 기재된 개표결과를 보면 기호 6번이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대선거정보시스템에 의하면 6대 총선에서는 기호 9번이었다. 그 시기의 기호 부여는 추첨이었다.[36] 5·16 군사정변로 인한 정당 해산.[37] 민주당과 신설 합당.[38] 신한당과 신설 합당.[39]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4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4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42] 민주당과 신설 합당.[43]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4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4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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