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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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1960.8.13.~1961.5.16.) |
(창당) | → | 민주당 | (해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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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 |
영문명 | Democratic Party (DP) |
창당일 | |
해산일 | |
선행조직 | (사사오입 개헌 반대 세력 통합) |
이념 | |
주소 | |
당색 | 남색 (#000080) |
당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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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발기인 대회 | 창당 당시 민주당 지도부 |
대한민국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활동한 정당.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단일 야당이자 한국 정당정치의 주요 계보 중 하나인 '민주당계 정당'의 시초가 된 정당이기도 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 집권여당인 자유당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제1야당 민주국민당과 자유당 내 개헌 반대파, 기타 재야 인사들이 '반독재'를 기치로 단결하여 1955년 9월 18일에 창당하였다.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몰락하고 들어선 제2공화국의 첫 선거에서 압승하여 절대적 다수당의 지위를 획득하였지만,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사회 개혁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채 계파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집권 1년여 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한 뒤 강제 해산되었다.[1]
강경한 반공 우익 성향의 이승만·자유당에 대항했다는 이미지와 오늘날의 민주당계를 창시한 정당으로 대우받는다는 상징성 때문에 활동 당시 좌익과 북한에 우호적인 진보·개혁 진영의 대표 격이었을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엄연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반공을 내세운 보수 우익 정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 집권여당인 자유당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제1야당 민주국민당과 자유당 내 개헌 반대파, 기타 재야 인사들이 '반독재'를 기치로 단결하여 1955년 9월 18일에 창당하였다.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몰락하고 들어선 제2공화국의 첫 선거에서 압승하여 절대적 다수당의 지위를 획득하였지만,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사회 개혁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채 계파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집권 1년여 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한 뒤 강제 해산되었다.[1]
강경한 반공 우익 성향의 이승만·자유당에 대항했다는 이미지와 오늘날의 민주당계를 창시한 정당으로 대우받는다는 상징성 때문에 활동 당시 좌익과 북한에 우호적인 진보·개혁 진영의 대표 격이었을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엄연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반공을 내세운 보수 우익 정당이었다.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야당 세력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한 정당에 여러 계파가 모여 있다 보니 창당 이후에도 이합집산으로 모인 계파와 과거 정당 출신들이 갈등을 벌였다. 구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출신 구파,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 신파의 내부적 갈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민주당 창당에는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으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밀려나있던 우익 정치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으나 노선갈등으로 물러난 뒤에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혁신계(진보세력)의 조봉암도 참여하려 했다. 장택상과 조봉암은 사상적으로 정반대였지만, 사적으로는 대단한 절친으로 장택상이 조봉암은 혁신계지만 사상적으로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라고 보증하고 김성수도 호응하면서 민주당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민주당 창당 직전 사망하고, 구 한민당, 민국당 출신들은 장택상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의심스러운 조봉암은 안 된다"면서 거부하면서 조봉암은 민주당에서 배제된다. 이렇게 되자 조봉암의 절친인 장택상도 민주당 창당에서 빠지고 자유당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조봉암은 혁신계를 결집시켜서 독자적으로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
한편 민주당 창당에는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으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밀려나있던 우익 정치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으나 노선갈등으로 물러난 뒤에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혁신계(진보세력)의 조봉암도 참여하려 했다. 장택상과 조봉암은 사상적으로 정반대였지만, 사적으로는 대단한 절친으로 장택상이 조봉암은 혁신계지만 사상적으로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라고 보증하고 김성수도 호응하면서 민주당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민주당 창당 직전 사망하고, 구 한민당, 민국당 출신들은 장택상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의심스러운 조봉암은 안 된다"면서 거부하면서 조봉암은 민주당에서 배제된다. 이렇게 되자 조봉암의 절친인 장택상도 민주당 창당에서 빠지고 자유당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조봉암은 혁신계를 결집시켜서 독자적으로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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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그 유명한 "못살겠다 갈아보자!" 선거 구호를 앞세워 정권교체에 도전한다. 그러나 선거 유세 도중 신익희가 사망하면서 이승만에 맞서는 또 다른 세력, 진보당 창당 추진 모임의 대표 격인 무소속 조봉암이 이승만과 1대1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을 밀어주기보다는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를 던져달라고[3] 유세하였고 이승만이 당선되게 된다. 반면 진보당 창당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자신들 쪽 부통령 후보 박기출을 사퇴시키면서까지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을 밀어주었고, 2.4%p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장면이 승리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으나, 역시 선거 도중 사망한다.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사형당했고,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선거가 더 주목을 받게 된다. 부통령 선거 결과 이기붕이 장면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어 역사에 3.15 부정선거로 기록되었다.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이 하야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을 밀어주기보다는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를 던져달라고[3] 유세하였고 이승만이 당선되게 된다. 반면 진보당 창당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자신들 쪽 부통령 후보 박기출을 사퇴시키면서까지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을 밀어주었고, 2.4%p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장면이 승리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으나, 역시 선거 도중 사망한다.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사형당했고,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선거가 더 주목을 받게 된다. 부통령 선거 결과 이기붕이 장면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어 역사에 3.15 부정선거로 기록되었다.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이 하야한다.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의석의 약 75%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4] 민주당은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신-구 갈등은 더욱 악화되어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0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세력이 신민당을 창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도 신파가 의석수를 늘려가며 사실상 집권여당으로써 역할을 했지만, 고작 집권 1년차에 5.16 군사정변이 터져서 와해되어버렸고, 헌정이 재개된 이후로는 절차부심해서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지만 석패했고, 의회권력도 단일화 실패로 결국 민주공화당이 차지하고야 만다.
그러나 민주당의 신-구 갈등은 더욱 악화되어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0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세력이 신민당을 창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도 신파가 의석수를 늘려가며 사실상 집권여당으로써 역할을 했지만, 고작 집권 1년차에 5.16 군사정변이 터져서 와해되어버렸고, 헌정이 재개된 이후로는 절차부심해서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지만 석패했고, 의회권력도 단일화 실패로 결국 민주공화당이 차지하고야 만다.
민주당 구파는 구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계열의 인사들이다. 전라도(넓게는 기호 지방까지)의 토착 지주 등 유산계급 출신 정치인 위주였던 민주당 구파는 일제강점기부터 당대의 정치엘리트로서 민족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해온 그룹이었다. 1955년 사망해 민주당 창당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김성수는 소위 '민주당 구파 스타일' 정치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에 반해 민주당 신파는 민주당 구파보다 10살 연하의 비주류 신진 소장 세력으로, 장면을 위시하는 평안도·흥사단 계열의 인사들과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합류한 자유당 탈당파[5], 군정청과 이승만 정권에서 중용된 고급 관료·법조인 등 신흥 테크노크라트들의 연합이었다.
이 야당의 두 그룹은 교육수준, 이승만에 대한 적대감, 의원내각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욕망,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장려하는 경제관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많지 않았다.[6] 교육을 받은 장소, 종교, 독립운동과의 유대관계, 계급, 경력 및 직업, 부의 근원, 출신지, 미국과의 친밀감 등에서 두 그룹은 차이를 보였다.
구파는 구파동지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으며, 분당파와 협상파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분당파는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협상파는 신파로 넘어가 합작파가 되었다.
신파는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고, 노장파, 소장파, 합작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소장파 의원 32명이 신풍회를 조직하였고, 합작파는 정안회를 조직하였다. 노장파에서도 비주류로 구성된 중도파는 신풍회와 협력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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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직함 | 이름 | 임기 | 비고 |
임시 | 의장 | 1955년 9월 19일 ~ 1955년 9월 20일 | ||
초대 | 대표 | 1955년 9월 20일 ~ 1956년 5월 5일 | 서거 | |
권한대행 | 1956년 5월 6일 ~ 1956년 7월 18일 | |||
제2대 | 1956년 7월 18일 ~ 1956년 9월 28일 | |||
제3대 | 1956년 9월 28일 ~ 1957년 10월 18일 | |||
제4대 | 1957년 10월 18일 ~ 1958년 10월 30일 | |||
제5대 | 1958년 10월 30일 ~ 1959년 11월 27일 | |||
제6대 | 1959년 11월 27일 ~ 1961년 5월 16일 | 5.16 쿠데타로 정당 해산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식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4 | 7 | 1960년 8월 19일 | 1961년 5월 18일 | 장면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 간선 52.0% | 민주당 |
대통령 신익희 사망- 부통령 장면 46.43% 당선
- 시장 0/6
- 읍장 1/30
- 면장 9/544
- 시의원 54/416
- 읍의원 57/990
- 면의원 231/16,051
- 특별시·도의원 98/437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79/233 33.9%
대통령 조병옥 사망부통령 장면 17.5% 낙선
-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민의원 175/233 75.1%
- 참의원 31/58 53.4%
- 국무총리 장면 117/225 당선
- 대통령 윤보선 208/263 당선
- 특별시장·도지사 6/10
- 시장 12/26
- 읍장 23/82
- 면장 297/1,359
- 특별시·도의원 195/486
- 시의원 129/420
- 읍의원 142/1,055
- 면의원 2,510/15,376
오늘날 대한민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이자 민주당계의 중심인 더불어민주당은 이 당을 당의 시작점으로 보고 매년 9월 18일 창당 기념일 행사를 연다. 계파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에 이합집산을 반복하여 법적으로는 여러 정당이 뒤섞였지만 뿌리를 되짚어가면 성질이나 계파 등 많은 요소가 이 정당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특이점과 겹쳐 이때 민주당은 오늘날 더불어민주당과 성향상 다소 차이를 보인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외교적 노선에서 특징점이 있을 뿐 다른 지점에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8] 대북 문제의 경우에도 당시 민주당은 시대배경과도 엮여 좀 더 체제 경쟁적 반공 노선을 내세운건 맞지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장면 내각이 내세운 기본적인 대북 노선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아닌 평화통일론이었다. 이후 장면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김대중도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 다만 냉전 체제가 끝나며 사실상 체제 경쟁이 끝난 이후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 호불호를 떠나[9] 햇볕정책 등 좀 더 적극적인 대북화해 정책을 구사한 것일 뿐이다.
한편, 이런 특이점과 겹쳐 이때 민주당은 오늘날 더불어민주당과 성향상 다소 차이를 보인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외교적 노선에서 특징점이 있을 뿐 다른 지점에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8] 대북 문제의 경우에도 당시 민주당은 시대배경과도 엮여 좀 더 체제 경쟁적 반공 노선을 내세운건 맞지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장면 내각이 내세운 기본적인 대북 노선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아닌 평화통일론이었다. 이후 장면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김대중도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 다만 냉전 체제가 끝나며 사실상 체제 경쟁이 끝난 이후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 호불호를 떠나[9] 햇볕정책 등 좀 더 적극적인 대북화해 정책을 구사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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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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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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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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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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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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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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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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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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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5.31. ~ 1958.5.30. | |||||
1958.5.31. ~ 1960.7.28. | |||||
1960.7.29. ~ 1961.5.16. | |||||
[1] 이후 '반독재' 단일 야당 신민당 창당 전까지 민주당계 정당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게 된다.[2] 대표적인 인물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3] 당연히 사망한 후보를 향해 한 투표는 무효표 처리된다. 또한 당시 여론을 분석한 여러 자료에서 당시 민주당을 지지하던 유권자 중 신익희를 향한 기권표를 던지지 않은 상당수가 조봉암이 아니라 이승만을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4]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도 달성하지 못했던 마의 3/4선의 의석을 확보한 것이다. 90년대 초반의 민자당이 이에 비견되는 의석비율을 확보하긴 했지만 선거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고, 92년 총선에서 149석으로 쪼그라들았다.[5] 김영삼은 자유당 탈당파 출신임에도 유진산, 조병옥과 친분이 있어서였는지 신파가 아닌 구파로 분류되었다.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는 1930년대 말 정치망 멸치 어장과 어선 10여 척을 보유했던 거제도 제일의 갑부로, 김영삼 역시 계급적으로 구파와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김대중은 장면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해서 정일형과 가까웠던 신파였다.[6] 다만 이런 경우는 현대 양당제 국가의 정당내 계파들에서도 흔히 보이기 때문에 민주당만 특이한건 아니다.[7] 선출 당시 당적은 민주당이었으나, 2공화국 헌법상 대통령은 당적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취임 직전에 탈당했다.[8] 당장 신민당 시절에도 유진산, 김대중이 주도한 대중경제론이 정강/정책에 삽입되는 등 경제적 좌클릭한 바 있다.[9] 방법론적 측면에서 호불호가 나뉠 순 있지만, 평화통일이란 기조 자체는 오늘날 보수 세력들도 받아들인 것이다. 이미 북진통일을 당론으로 주장하는 제도권 정치 세력은 전무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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