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민당(1949년)
최근 수정 시각:
(창당) | → | 대한국민당 | → | (해산) |
→ | ||||
대한노농당 (개별 합류) | ||||
신정회 (개별 합류) | → | |||
→ |
대한국민당 | |
영문명 | Korea Nationalist Party (KNP) |
창당일 | |
해산일 | |
국회의원 | 3석 / 203석 (0.6%) |
당 색 | 파란색 (#0087BD) |
1949년 11월 당시 대한민국 국회 원내에서 다수를 차지한 민주국민당이 반 이승만운동을 전개하고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꾸기 위한 개헌안을 제출, 통과시키려 하였다. 이에 11월 12일 명목만 남아있던 대한국민당을 중심으로 신정회(新政會),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 등의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한국민당을 재창당하였다. 재창당한 대한국민당은 71석을 확보함으로써 국회 내의 제1당이 되었다. 당시 조직은 최고위원 윤치영(尹致暎)·이인(李仁), 고문 이규갑(李奎甲)·이범승(李範昇)·임영신(任永信), 총무부장 신상학(辛相學), 조직부장 김훈(金薰), 훈련부장 권박영(權博英), 기획부장 정영삼(鄭永參), 선전부장 최운교(崔雲敎), 재정부장 이우세(李友世), 조사부장 양철호(梁鐵鎬), 노동부장 류홍렬(柳鴻烈), 청년부장 남윤상(南潤商) 등이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4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소속 의원들이 이후 자유당 등으로 이탈하여 원내 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하였다.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겨우 3석을 얻었으며 자유당의 존재에 따라 처음의 친여 성향과 달리 점차 친야 성향으로 변하였다. 이후 명목만 남아있다가 1958년 7월 해산하였다. 이후 전진한이 창당한 노농당 등으로 이적한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4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소속 의원들이 이후 자유당 등으로 이탈하여 원내 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하였다.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겨우 3석을 얻었으며 자유당의 존재에 따라 처음의 친여 성향과 달리 점차 친야 성향으로 변하였다. 이후 명목만 남아있다가 1958년 7월 해산하였다. 이후 전진한이 창당한 노농당 등으로 이적한다.
사건 순서 | 대한국민당(1949년)의 창당 과정 | |||||||||
1 | 무소속 의원 | 대한여자국민당(임영신) | ||||||||
2 | 무소속구락부 | 3.1구락부 | ||||||||
3 | 무소속구락부 | 통합한 대한국민당(1948년) | ||||||||
4 | 성인회[1] | 동인회[2] | 이정회[3] | 청구회[4] | ||||||
5 | 동성회 | 잔류 대한국민당(1948년) 세력 | ||||||||
6 | 대한노농당 | 신정회 | ||||||||
7 |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24/210 9.7%
- 1951년 제2대 부통령 선거 이갑성 73/151 낙선
- 시의원 2/378
- 읍의원 0/1,115
- 면의원 16/16,051
- 도의원 0/306
- 대통령 무공천
- 부통령 무공천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2/203 1.0%
- 대통령 무공천
- 부통령 윤치영 2.8% 낙선
|
1950.5.31. ~ 1954.5.30. | |||||
1954.5.31. ~ 1958.5.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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