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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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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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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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본관 | 여양 진씨 매호공파 |
재임기간 | 제2대 충청남도지사 |
제10대 내무부장관 | |
1902년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1]에서 태어났다. 양정고등보통학교, 일본 주오대학 예과 및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 및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본부 조사부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 이긍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충청남도지사 임기 중이던 1952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서리를 겸직하였다. 이어서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가 곡물 관리상의 문제로 경질되고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류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에 반발하여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보성전문학교 및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본부 조사부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 이긍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충청남도지사 임기 중이던 1952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서리를 겸직하였다. 이어서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가 곡물 관리상의 문제로 경질되고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류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에 반발하여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7월 12일 제1회 28차 본회의 당시 일본 지진으로 피해입은 재외동포에 대해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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