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 BACK << -|- >> HOME <<)

김법린

최근 수정 시각:
2
편집
현재 사용중인 아이피가 ACL그룹 IDC #12915에 있기 때문에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정부상징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 펼치기 · 접기 ]


교육과학기술부장관 (2008~2013)
교육부장관 (2013~2014)
54-55대
서남수

김법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자유당 심볼(백색)자유당 투명 원내총무
[ 펼치기 · 접기 ]
초대-제2대
이재학
제3-4대
김법린
제5대
조순


[ 펼치기 · 접기 ]
제1대
권상로
제2대
백성욱
제3대
정두석
제4대
김법린
제5대
조명기
제6대
김동익
제7대
서돈각
제8대
이선근
제9대
정재각
제10대
황수영
제11대
이지관
제12대
민병천
제13-14대
송석구
제15대
홍기삼
제16대
오영교
제17대
김희옥
제18대
한태식
제19대
윤성이
제20대
윤재웅

대한민국 제3대 문교부장관
김법린
金法麟|Kim Beop-rin|Fa Ling Kin[1]
김법린 장관
초명
김진린(金振麟)[2]
범산(梵山), 철아(鐵啞)
본관
출생
경상북도 신녕군 치산면 치산리
(現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사망
1964년 3월 14일 (향년 64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계동 1-31번지[6] 자택
묘소
재임기간
제3대 문교부장관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김정택, 어머니 김악이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남
학력
신녕공립보통학교 (졸업)
사립명정학교 (보습과 / 1년 수료)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사교과 / 수료)
휘문고등보통학교 (중퇴)
불교중앙학림[7] (졸업)
소르본 대학교 문학부 (철학 / 학사)
고마자와대학 대학원 (산스크리트어·인도철학 / 수료)
종교
불교 (법명: 법윤(法允) → 법린(法麟))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경력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제3대 국회의원 (자유당 / 동래군)
원자력원장
제4대 동국대학교 총장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김법린(1927년)-2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유학 시절의 김법린.[8]

대한민국의 종교인,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899년 8월 23일 경상북도 신녕군 치산면 치산리(現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에서 아버지 김정택(金玎宅)[9]과 어머니 김악이(金岳伊)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신녕공립보통학교(現 신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되던 1913년 영천군 은해사에서 양혼허(楊渾虛)를 은사로 해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범산(梵山)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이듬해인 1915년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청룡리(現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사립명정학교(現 부산 금정중학교) 보습과에 입학해 이곳에 본적을 두었고, 1년 과정을 마친 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안국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40번지 선학원(禪學院)에 거주하면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18년 불교중앙학림(現 동국대학교)으로 편입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전에 범어사 대표의 자격으로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에서 한용운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았고, 3월 4일 그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뒤 범어사로 돌아와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이에 3월 18일 동래군 동래면 읍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일으킨 뒤 일본 제국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그해 4월, 불교중앙학림 산하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10] 대표 자격으로 파견되는 것을 구실로 해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망명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했다. 이어 임시정부 국내 파견원의 자격을 얻어 1919년 5월 다시 귀국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 소식을 조선 각지에 전달하기 위해 「화신공보(華新公報)」를 발간해 경기도 경성부를 비롯한 각 지방까지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김대용(金大鎔)과 함께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안동현(安東縣) 육도구(六道溝)[11]에 동광(東光)상점을 가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했고, 상해에 파견된 신상완(申尙琓)과 백성욱(白性郁), 국내에 남아 있던 김상헌(金祥憲)[12]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승려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해,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비밀결사인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창설할 것을 계획하고자 귀국했고, 자금조달 및 조선 내 유력 승려 모집, 선언서 및 의용승군 헌제(憲制) 작성 등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동지가 검거되는 바람에 다시 고국을 떠나 중화민국 상해로 망명했다. 1923년 11월 6일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문학부 철학과입학해 일반 철학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근대 철학사, 논리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지며 공부했고, 재학 시절이던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Egmont Palace)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이미륵·이극로·황우일(黃祐日)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파견돼 21개국 174개 단체 대표단 앞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3.1 운동 당시의 기미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일제의 조약을 무효화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는 결의안을 발표하는 등 활약했다.[13]
김법린(1927년)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14], 이미륵, 이극로.

이후 소르본 대학교 졸업 후 1928년 초 귀국했다.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했고,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 5월에는 한용운의 지도하에 조은택·박창두·최범술 등과 함께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해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고 정치체제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비밀투쟁을 전개했으며, 이후 도쿄도에도 지부를 창설하자 도쿄도 지부 책임을 맡았다.

이후 범어사 금정불교전문강원의 원감에 취임했으나 1938년 말 만당의 조직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돼 곧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힘을 쏟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일본 제국 경찰에 재차 체포되었고, 취조과정에서 '불로 지지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 태우기' 등 모진 고문을 당하고 2년간 수감되었다. 이때 원감으로 있던 금정불교전문강원은 폐원당했다. 이후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반탁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되었고 고시위원장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불교교무원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선공화당 김약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10월 30일 제3대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초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재임 중이던 1953년 당시 이승만이 주창하던 한글 간소화 방안에 대해 반대해 파문이 일면서 이로 인해 1954년 4월 20일에 사임하였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해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자유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조일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고, 1959년 1월 21일에는 초대 원자력원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7월부터 1964년 3월까지 제4대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총장 재임 중이던 1964년 3월 14일 밤 9시 50분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계동 1-31번지 자택에서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사망하였다. 향년 64세.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경남 16[15]
조선불교교무원
8,879표 (33.71%)
낙선 (2위)
1954
경남 17[16]
자유당 투명
13,989표 (48.39%)
당선 (1위)
초선
1958
경남 25[17]
14,570표 (47.48%)
낙선 (2위)

4. 둘러보기[편집]

[ 펼치기 · 접기 ]
직위
명단


[1] 소르본 대학교 철학과 유학 시절 학적부에 기재된 프랑스식 이름.[2] 이후 중화민국으로 망명한 뒤 김법린으로 개명했다.[3] 충의공파 26세손 ○규(○圭) 항렬. 족보명 김인규(金麟圭).()[4] #[5] 양력 9월 27일.[6] 현재 이 지번에는 신계역사공원이 자리해 있다.[7]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편입[8] 아래의 1927년 2월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 한국 대표단 참석시 단체 사진으로부터 복원한 사진이다.[9] 족보명 김형상(金炯相).[10] 불교중앙학림 내에 설치되었던 항일 비밀결사로 백초월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했다.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중화민국 상하이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길림성·봉천성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해 국외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기도 했다.[11]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전싱구(振興區) 류다오거우(六道溝).[12]憲이라고도 표기한다.[13] 당시 연설문의 전문은 한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독립유공자 조현균(趙賢均)의 현손이자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이 2006년 11월 독일 브레멘의 한 고서점에서 '에그몽 궁전의 봉화'라는 제목의 독일어 단행본을 발견했다.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제사회사연구소(IISG)에 '킨파린의 연설문(texte de discours de Kin Fa Lin, 연설문 제목 -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이라는 연설문 전문을 발견해 2019년 5월 7일 한국일보 기사를 통해 소개되었다. 연설문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위 기사 참조.[14] 일본공산당 공동 창립자이다.[15] 동래군[16] 동래군[17] 동래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  
  •  
  •  
  •  
  •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