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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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경상북도 군위군(현 대구광역시 군위군)에서 의흥면장을 지낸 아버지 박채식(朴埰植, 1888 ~ 1974. 10. 15)[3]과 어머니 인동 장씨 장영래(張永來)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후반에 식산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전주지점장, 목포지점장, 대구지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군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재정경제위원회(현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자유당 중앙당 정책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부정선거로 기소되었고 1961년 초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이후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63년 석방되고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군위군-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봉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대일상호신용금융을 경영하였다.
1982년 11월 27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후반에 식산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전주지점장, 목포지점장, 대구지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군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재정경제위원회(현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자유당 중앙당 정책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부정선거로 기소되었고 1961년 초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이후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63년 석방되고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군위군-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봉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대일상호신용금융을 경영하였다.
1982년 11월 27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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