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용서
최근 수정 시각:
|
역임한 직위 | ||||||||||||||||||||||||||||||||||||||||||||||||||||||||||||||||||||||||||||||||||||
|
![]() | |
출생 | |
사망 | |
본관 | |
재임기간 | 초대 한국은행 총재 |
제10대 상공부 장관 | |
1899년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현 부산광역시)에서 출생했다고 본인은 주장하나 아버지를 따라 망명하여 일본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4][5] 경성부 경성중학교 (서울고등학교 모태), 일본 도쿄상과대학 (현 히토츠바시대학) 졸업 후, 1925년부터 조선은행에서 근무하였다. 이 당시는 조선은행이 구조조정을 당하여 경성본점이 폐쇄되는 시기였고 공채도 없었던 시기였는데 유일하게 일본 본토에서 특채되었고 그 이후 10년간 신입행원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해방 이후에는 몇 안되는 금융통일 수 밖에 없었다.
1942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조선은행의 지점장(여수)이 되었다. 그러나 직원 중 하나가 편지에서 무심코 "여수에도 곧 일본 해군의 비행장이 생긴다더라"고 적은 것이 검열에 걸려 당사자는 구속되고, 구용서는 대리로 강등되어 오사카 출장소로 좌천당했다.#
8.15 광복 후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자 초대 한국은행 총재, 제4대 대한석탄공사 총재, 초대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 초대 한국산업은행 총재, 제10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다.
1942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조선은행의 지점장(여수)이 되었다. 그러나 직원 중 하나가 편지에서 무심코 "여수에도 곧 일본 해군의 비행장이 생긴다더라"고 적은 것이 검열에 걸려 당사자는 구속되고, 구용서는 대리로 강등되어 오사카 출장소로 좌천당했다.#
8.15 광복 후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자 초대 한국은행 총재, 제4대 대한석탄공사 총재, 초대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 초대 한국산업은행 총재, 제10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다.
|
[1] 부사공파 부산동래문중 20세.[2] 송병준이 구용서의 외할아버지라고 언급하는 기사가 있는데, 정확히는 아내의 할아버지다. 구용서의 아내는 송병준 아들인 송종헌의 딸이었다.[3]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구용서 묘비에 "一愚昌原具公鎔書之墓 配恩津宋氏智惠子 祔左(일우창원구공용서지묘 배은진송씨지혜자 부좌)"라고 써져 있으며, 보명(譜名)이 20세손 옥(鈺)자 항렬을 써서 구용옥(具鎔鈺, 출처 사진.)인 것을 보아 창원 구씨인 것이 확실하다.[4] 한국 근대사의 흐름만 제대로 이해만 하고 있어도 부산광역시 출생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을미사변때 세워진 친일내각도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과 함께 붕괴되고 친러내각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시해범들은 대역죄인으로 지목되었고 이들은 일본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다. 고종은 일본으로 망명한 을미사변 시해범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냈으며, 을미사변 시해범들 중 한명이었던 우범선은 결국 고영근의 손에 암살당했다.[5] 구용서의 아버지 구연수는 을미사변때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을 뿐만아니라 우범선의 명령으로 시신까지 소각하는데 가담한 역적인데 1899년 친러내각이 정권을 잡고 있던 조선에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