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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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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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소암(昭庵) |
본관 | |
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58호 |
재임기간 | 제9대 농림부장관 |
1898년 8월 5일 전라북도 전주군 창덕면 태평리(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영명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했다. 독립선언서를 자전거 뼈대에 숨겨 전주로 이송해 3월 13일 전주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또한 그해 4월 초에는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에 거주하던 최종삼(崔宗三)에게 '일본 동포에게 고하는 글'과 독립신문 등 조선독립과 관련한 문서들을 일반인들에게 배포하게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배를 당하던 중 조선총독부 참의원 전라북도 대표 김윤정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이승만, 임병직 등과 교우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되어 활약했다. 1922년 이승만의 권유로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교 정치경제학과로 진학해 1927년 5월 졸업했다.
1929년 겨울 살인미수죄 공소시효가 끝나자 본국으로 귀국해 완주군에서 봉상산업노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8.15 광복 이후 군산에 있는 농기구 회사 조선이기공업사를 인수했다.
1954년 제9대 농림부장관에 발탁되었으나 쌀값을 흉년으로 폭등하는 쌀값대책에 큰 마찰을 빚은 데다 농림부 직원의 비리사건에 책임을 지고 재임 56일 만에 사임했다.
장관직 퇴임 이후 전북대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를 지냈으며, 삼례여자고등학교와 읍사무소 건립을 위해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1987년 3월 23일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신상마을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0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이로 인해 수배를 당하던 중 조선총독부 참의원 전라북도 대표 김윤정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이승만, 임병직 등과 교우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되어 활약했다. 1922년 이승만의 권유로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교 정치경제학과로 진학해 1927년 5월 졸업했다.
1929년 겨울 살인미수죄 공소시효가 끝나자 본국으로 귀국해 완주군에서 봉상산업노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8.15 광복 이후 군산에 있는 농기구 회사 조선이기공업사를 인수했다.
1954년 제9대 농림부장관에 발탁되었으나 쌀값을 흉년으로 폭등하는 쌀값대책에 큰 마찰을 빚은 데다 농림부 직원의 비리사건에 책임을 지고 재임 56일 만에 사임했다.
장관직 퇴임 이후 전북대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를 지냈으며, 삼례여자고등학교와 읍사무소 건립을 위해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1987년 3월 23일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신상마을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0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3월 22일에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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