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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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삼신(後周三臣) 李重進 | 이중진 | |
성 | 이(李) |
이름 | 중진(重進) |
생몰 기간 | ? ~ 960년 |
본적 | 창주(滄州) |
출신 | 병주(幷州) 태원현(太原縣) |
모친 | 복경장공주(福慶長公主) |
후주가 건국된 951년 내전직도지(內殿直都知)로 승진하고 사주자사(泗州刺史)를 겸임했으며, 소저도지휘사(小底都指揮使)로 전임되었다. 952년 대내도점검(大內都點檢)로 임명되고 은주단련사(恩州團練使)를 겸이하다가 점차 관직이 올라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로 승진했다. 953년, 사주방어사(泗州防禦使)를 겸임했으며, 곽위가 임종하기 직전 곽위의 부름을 받아 시영을 임금의 예로 받들 것을 명령받았다. 뒤에 곽위가 죽고 양자 시영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세종이었다.
이중진은 시영이 즉위하자 시위친군마보군도우후(侍衛親軍馬步軍都虞候)로 임명되었다. 954년, 북한이 후주를 공격하자 이중진은 시영과 함께 출정했으니 이 전투가 바로 고평 전투였다. 이중진은 고평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를 겸임하였으며, 북한을 정벌할 때 다시 행영마보군도우후(行營馬步軍都虞候)를 맡았다. 정벌을 마친 뒤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더해졌고 귀덕군절도사(歸德軍節使)로 전임되었으며, 시위마보군도지휘사(侍衛馬步軍都指揮使)를 겸임하였다.
이중진은 955년 시영이 남당을 정벌할 때도 출정하여 정양(正陽)으로 출병했다. 당시 이곡이 수춘을 공격했음에도 실패하여 정양으로 물러나자, 이중진은 회수를 건너 남당의 군사를 공격해 유언정(劉彦貞)을 격파해 참수하고 비장 성사랑(盛師朗) 등을 잡아 1만여 명을 죽였다. 시영은 이중진의 공을 칭찬하여 행영초토사(行營招討使)로 삼았다.
956년, 노수등주초토사(廬壽等州招討使)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계훈이 다시 수춘을 공격했는데, 이중진은 수춘성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키다가 성 남쪽의 동옥(洞屋)이 남당의 군대에게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퇴군을 논의하려고 했다. 마침 조광윤이 육합(六合)에서 귀환하다가 도중에 수주(壽州)로 출병하여 10여 일 동안 주둔하자, 이중진은 원군이 온 것으로 기대하여 다시 분전했다. 남당의 군대는 이중진을 두려워하여 그의 얼굴이 검었던 것에 빗대어 '흑대왕(黑大王)'이라고 불렀다.
곽위의 사위인 장영덕과 사이가 나빴고 장영덕이 표문을 올려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하자 이중진은 장영덕을 찾아가 제왕(곽위))의 가까운 친척으로 장수가 되었는데 어찌 서로 의심이 깊냐고 하자 장영덕이 의심을 풀었으며, 남당에서 이경이 이를 듣고 몰래 큰 이익으로 유인하면서 헐뜯거나 이간질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이중진은 이를 상주해 알렸다.
957년에는 후주에서 남당의 수춘을 포위했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 함락하지 못했는데, 남당에서 이경달, 응원사, 허문진, 변호, 주원 등을 보내 수춘을 구원하도록 하자 이중진은 이들을 격파해 5천 명을 죽이고 영채 두 개를 탈취했다. 호주를 공격하면서 호주의 남쪽인 관성을 공격해 격파했다.
959년에는 요나라를 공격하면서 조광윤이 와교관에 먼저 이르러 수장인 요내빈, 막주자사 유초신 등을 항복시키자 이중진은 뒤를 이어 도착해 영주자사 고언휘를 항복시키자 와교관의 남쪽이 평정되었다. 이중진은 곽영(시영)의 명령으로 북한을 공격해 백정에서 북한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공제가 계승하자 지방으로 나가 양주를 진수했다.
이중진은 시영이 즉위하자 시위친군마보군도우후(侍衛親軍馬步軍都虞候)로 임명되었다. 954년, 북한이 후주를 공격하자 이중진은 시영과 함께 출정했으니 이 전투가 바로 고평 전투였다. 이중진은 고평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를 겸임하였으며, 북한을 정벌할 때 다시 행영마보군도우후(行營馬步軍都虞候)를 맡았다. 정벌을 마친 뒤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더해졌고 귀덕군절도사(歸德軍節使)로 전임되었으며, 시위마보군도지휘사(侍衛馬步軍都指揮使)를 겸임하였다.
이중진은 955년 시영이 남당을 정벌할 때도 출정하여 정양(正陽)으로 출병했다. 당시 이곡이 수춘을 공격했음에도 실패하여 정양으로 물러나자, 이중진은 회수를 건너 남당의 군사를 공격해 유언정(劉彦貞)을 격파해 참수하고 비장 성사랑(盛師朗) 등을 잡아 1만여 명을 죽였다. 시영은 이중진의 공을 칭찬하여 행영초토사(行營招討使)로 삼았다.
956년, 노수등주초토사(廬壽等州招討使)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계훈이 다시 수춘을 공격했는데, 이중진은 수춘성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키다가 성 남쪽의 동옥(洞屋)이 남당의 군대에게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퇴군을 논의하려고 했다. 마침 조광윤이 육합(六合)에서 귀환하다가 도중에 수주(壽州)로 출병하여 10여 일 동안 주둔하자, 이중진은 원군이 온 것으로 기대하여 다시 분전했다. 남당의 군대는 이중진을 두려워하여 그의 얼굴이 검었던 것에 빗대어 '흑대왕(黑大王)'이라고 불렀다.
곽위의 사위인 장영덕과 사이가 나빴고 장영덕이 표문을 올려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하자 이중진은 장영덕을 찾아가 제왕(곽위))의 가까운 친척으로 장수가 되었는데 어찌 서로 의심이 깊냐고 하자 장영덕이 의심을 풀었으며, 남당에서 이경이 이를 듣고 몰래 큰 이익으로 유인하면서 헐뜯거나 이간질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이중진은 이를 상주해 알렸다.
957년에는 후주에서 남당의 수춘을 포위했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 함락하지 못했는데, 남당에서 이경달, 응원사, 허문진, 변호, 주원 등을 보내 수춘을 구원하도록 하자 이중진은 이들을 격파해 5천 명을 죽이고 영채 두 개를 탈취했다. 호주를 공격하면서 호주의 남쪽인 관성을 공격해 격파했다.
959년에는 요나라를 공격하면서 조광윤이 와교관에 먼저 이르러 수장인 요내빈, 막주자사 유초신 등을 항복시키자 이중진은 뒤를 이어 도착해 영주자사 고언휘를 항복시키자 와교관의 남쪽이 평정되었다. 이중진은 곽영(시영)의 명령으로 북한을 공격해 백정에서 북한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공제가 계승하자 지방으로 나가 양주를 진수했다.
960년, 진교의 변이 일어나 조광윤이 장군들의 추대를 받고 시종훈에게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북송을 건국하니 이가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였다. 태조는 한령곤을 시위마보군도지휘사로 삼아 이중진을 대신하게 했고 이중진에게 중서령을 더했으며, 뒤이어 청주(靑州)로 옮겼다.
이중진은 조광윤과 더불어 본래 후주 조정을 함께 섬기고 병권을 나눠 가졌지만 항상 조광윤을 꺼렸는데, 태조가 즉위하고 또한 자신이 청주로 가게 되자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태조는 이중진의 마음이 불안하다는 걸 알고 육택사(六宅使) 진사회(陳思誨)를 이중진에게 보내 단서철권을 내리며 이중진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이중진은 진사회와 함께 입조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의견에 휘둘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가 자신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진사회를 유폐한 뒤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선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적수순(翟守珣)을 노주(潞州)로 파견하여 똑같이 북송 조정에 불만을 품은 이균과 접촉하려고 했다. 그러나 태조를 잘 알고 있던 적수순은 몰래 추밀승지(樞密承旨) 이처운에게 태조와의 회견을 주청했고 이때 태조와 적수순 사이에 다음의 문답이 오갔다.
이중진은 조광윤과 더불어 본래 후주 조정을 함께 섬기고 병권을 나눠 가졌지만 항상 조광윤을 꺼렸는데, 태조가 즉위하고 또한 자신이 청주로 가게 되자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태조는 이중진의 마음이 불안하다는 걸 알고 육택사(六宅使) 진사회(陳思誨)를 이중진에게 보내 단서철권을 내리며 이중진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이중진은 진사회와 함께 입조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의견에 휘둘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가 자신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진사회를 유폐한 뒤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선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적수순(翟守珣)을 노주(潞州)로 파견하여 똑같이 북송 조정에 불만을 품은 이균과 접촉하려고 했다. 그러나 태조를 잘 알고 있던 적수순은 몰래 추밀승지(樞密承旨) 이처운에게 태조와의 회견을 주청했고 이때 태조와 적수순 사이에 다음의 문답이 오갔다.
태조: 내가 이중진에게 철권을 내리려고 했는데, 그는 짐을 믿었소?
적수순: 이중진은 폐하께 귀순할 뜻이 끝내 없어서 폐하를 믿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적수순에게 후한 상을 내린 뒤 작위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또한 이중진에게는 거사를 늦추리고 권했다. 이는 이중진이 이균에게 호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태조의 조치였으며, 이균을 진압할 군대와 이중진을 진압할 군대를 나눠서 보냈다. 적수순이 돌아와서 이중진에게 위력을 키우고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되 경망하게 군대를 일으키지 말라고 권하자, 이중진은 적수순의 말을 덥석 믿었다.
또한 남당의 이경과 몰래 연락을 취했는데, 이경이 두려워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사실을 북송에 알렸다. 이중진의 감군(監軍)이었던 안우규(安友規)는 항상 이중진으로부터 시기를 받고 있었는데, 자신의 측근 몇 명과 함께 탈출하여 저주자사(滁州刺史)로 임명되고 전군을 감호하였다. 이중진은 자신을 따르지 않은 군교 수십 명을 모두 죽였다.
태조는 석수신, 왕심기, 이처운, 송악을 파견하여 금병을 거느리며 이중진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이때 태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주나라의 옛 신하들에게 시기와 이간을 받은 적이 없지만 이중진은 짐의 마음을 따르지 않았고 스스로 반역할 마음을 품었소. 지금 육사(六師)가 바깥에 있으니 잠깐 가서 이중진을 위무하겠소.
태조가 이중진에 대한 친정을 결심하고 대의진(大儀鎭)에 이를 때 석수신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이중진이 머지않아 패배할 것이니 폐하께서 직접 보시길 바란다고 알렸다. 그리고 태조가 도착한 바로 그날 이중진이 패배하였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중진의 부하들은 이중진에게 진사회를 죽이라고 권유했으나 이중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온 일족과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하는데 진사회를 죽인다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이중진은 결국 스스로 불을 놓아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고 진사회 역시 이중진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중진의 형인 심주자사(深州刺史) 이중흥(李重興)은 이중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으며, 아우인 해주자사(解州刺史) 이중찬(李重讚)과 아들인 상식사(尙食使) 이연복(李延福)은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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