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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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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 본기(本紀) ]
1·2·3권 「태조기(太祖紀)」
4·5권 「태종기(太宗紀)」
6·7·8권 「진종기(眞宗紀)」
9·10·11·12권 「인종기(仁宗紀)」
13권 「영종기(英宗紀)」
14·15·16권 「신종기(神宗紀)」
17·18권 「철종기(哲宗紀)」
19·20·21·22권 「휘종기(徽宗紀)」
23권 「흠종기(欽宗紀)」
24·25·26·27·28·29·30·31·32권 「고종기(高宗紀)」
33·34·35권 「효종기(孝宗紀)」
36권 「광종기(光宗紀)」
37·38·39·40권 「영종기(寧宗紀)」
41·42·43·44·45권 「이종기(理宗紀)」
46권 「도종기(度宗紀)」
47권 「영국공기(瀛國公紀)」

※ 48권 ~ 209권은 志에 해당. 210권 ~ 241권은 表에 해당. 송사 문서 참고
[ 열전(列傳) ]
242·243권 「후비전(后妃傳)」
244·245·246·247권 「종실전(宗室傳)」
248권 「공주전(公主傳)」
249권 「범질등전(范質等傳)」
250권 「석수신등전(石守信等傳)」
251권 「한령곤등전(韓令坤等傳)」
252권 「왕경등전(王景等傳)」
253권 「절덕의등전(折德扆等傳)」
254권 「후익등전(侯益等傳)」
255권 「곽숭등전(郭崇等傳)」
256권 「조보전(趙普傳)」
257권 「오정조등전(吳廷祚等傳)」
258권 「조빈등전(曹彬等傳)」
259권 「장미등전(張美等傳)」
260권 「조한등전(曹翰等傳)」
261권 「이경등전(李瓊等傳)」
262권 「이곡등전(李穀等傳)」
263권 「장소등전(張昭等傳)」
264권 「설거정등전(薛居正等傳)」
265권 「이방등전(李昉等傳)」
266권 「전약수등전(錢若水等傳)」
267권 「장굉등전(張宏等傳)」
268권 「시우석등전(柴禹錫等傳)」
269권 「도곡등전(陶穀等傳)」
270권 「안간등전(顏衎等傳)」
271권 「마영종등전(馬令琮等傳)」
272권 「양업등전(楊業等傳)」
273권 「이진경등전(李進卿等傳)」
274권 「왕찬등전(王贊等傳)」
275권 「유복등전(劉福等傳)」
276권 「유보훈등전(劉保勳等傳)」
277권 「장감등전(張鑒等傳)」
278권 「마전의등전(馬全義等傳)」
279권 「왕계충등전(王繼忠等傳)」
280권 「전소빈등전(田紹斌等傳)」
281권 「여단등전(呂端等傳)」
282권 「이항등전(李沆等傳)」
283권 「왕흠약등전(王欽若等傳)」
284권 「진요좌등전(陳堯佐等傳)」
285권 「진집중등전(陳執中等傳)」
286권 「노종도등전(魯宗道等傳)」
287권 「양려등전(楊礪等傳)」
288권 「임중정등전(任中正等傳)」
289권 「고경등전(髙瓊等傳)」
290권 「조이용등전(曹利用等傳)」
291권 「오육등전(吳育等傳)」
292권 「이자등전(李諮等傳)」
293권 「전석등전(田錫等傳)」
294권 「장우석등전(掌禹錫等傳)」
295권 「윤수등전(尹洙等傳)」
296권 「한비등전(韓丕等傳)」
297권 「공도보등전(孔道輔等傳)」
298권 「팽승등전(彭乘等傳)」
299권 「적비등전(狄棐等傳)」
300권 「양해등전(楊偕等傳)」
301권 「변숙등전(邊肅等傳)」
302권 「왕진등전(王臻等傳)」
303권 「장온지등전(張昷之等傳)」
304권 「주위등전(周渭等傳)」
305권 「양억등전(楊億等傳)」
306권 「사필등전(謝泌等傳)」
307권 「교유악등전(喬維岳等傳)」
308권 「상관정등전(上官正等傳)」
309권 「왕연덕등전(王延德等傳)」
310권 「이적등전(李迪等傳)」
311권 「안수등전(晏殊等傳)」
312권 「한기등전(韓琦等傳)」
313권 「부필등전(富弼等傳)」
314권 「범중엄등전(范仲淹等傳)」
315권 「한억전(韓億傳)」
316권 「포증등전(包拯等傳)」
317권 「소항등전(邵亢等傳)」
318권 「장방평등전(張方平等傳)」
319권 「구양수등전(歐陽修等傳)」
320권 「채양등전(蔡襄等傳)」
321권 「정해등전(鄭獬等傳)」
322권 「하담등전(何郯等傳)」
323권 「울소민등전(蔚昭敏等傳)」
324권 「석보등전(石普等傳)」
325권 「유평등전(劉平等傳)」
326권 「경태등전(景泰等傳)」
327권 「왕안석등전(王安石等傳)」
328권 「이청신등전(李淸臣等傳)」
329권 「상질등전(常秩等傳)」
330권 「임전등전(任顓等傳)」
331권 「손장경등전(孫長卿等傳)」
332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333권 「양좌등전(楊佐等傳)」
334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335권 「충세형전(种世衡傳)」
336권 「사마광등전(司馬光等傳)」
337권 「범진전(范鎭傳)」
338권 「소식전(蘇軾傳)」
339권 「소철전(蘇轍傳)」
340권 「여대방등전(呂大防等傳)」
341권 「왕존등전(王存等傳)」
342권 「양도등전(梁燾等傳)」
343권 「원강등전(元絳等傳)」
344권 「손각등전(孫覺等傳)」
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426권 「순리전(循吏傳)」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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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권 「효우전(孝友傳)」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460권 「열녀전(列女傳)」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470권 「영행전(佞幸傳)」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북송의 역사가
司馬光 | 사마광
Sima Guang of So...
문정(文正)
재상임기
4년
온국공(溫国公)추봉
이름
사마광(司馬光)
군실(君實)
속수(涑水)
부친
사마지(司馬池)[1]
생몰
1019년 ~ 1086년
북송(北宋)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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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세[2]: 수만 개의 한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가 무엇입니까? 일생 살아가면서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한 글자를 골라 주십시오.
사마광: 그것은 (참될 성, 정성 성)이네.
유안세: 誠이란 무엇입니까?
사마광: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그 첫걸음(從不妄語始)이지.[3][4]

중국 북송 대의 유학자, 정치가 및 역사가. 자치통감의 편저자로도 유명하다. 자는 군실(君實). 시호는 문정으로 온국공(溫國公)으로 봉해져 온공(溫公)이나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먼 조상 사마부(사마랑, 사마의의 동생)[5]는 하내군 온현 출신이다.

2. 생애[편집]

20세에 진사가 되고 이어 한림학사, 어사중승이 되어 정계의 요직을 거치던 차에 신종이 즉위해 왕안석을 중용하여 일련의 개혁 정책을 담은 신법을 시행하려 했다. 당초에는 개혁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온건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신법이 관료들의 기득권까지 개혁해 정계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추밀원을 중심으로 신법 반대 세력인 구법당의 우두머리가 되어 결국 왕안석의 최대 정적으로 입지를 굳혔다.

신법을 추진하려는 송 신종의 의향이 강경했기에 결국 개봉을 떠나 낙양에 은거하며 자치통감 편찬에 노력해 1084년 마침내 완성했다. 정치적인 견해는 달랐으나 학자로서의 입지를 송 신종 또한 매우 존중했기에 자치통감 편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6]

송 신종이 붕어하고 철종이 즉위해 황태후 고씨가 섭정하게 되자 정계에 복귀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신법 타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재상이 된 지 불과 8개월 만에 병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생의 맞수인 왕안석과 같은 해에 죽었다. 나이는 왕안석이 두 살 어리다. 신법 철폐 정책을 신법 추진 이상으로 급격하게 밀고 나갔기 때문에 소식 등 함께 신법을 반대하는 견해였던 동료들과도 크게 마찰을 빚었다.[7] 특히 노역을 금납화하는 모역법(면역법)에 대해서였다. 소식이 직선적이긴 했지만 사마광 역시 고집불통이라 소식(소동파)은 궐(정사당)을 나가면서 "사마우(司馬牛: 사마 황소 고집)[8]! 사마우"라며 절규했다고 한다.

이후 고태후가 죽자(1093년) 송 철종은 신법당을 도로 복귀시켰으며, 그에 따라 원우 연간(철종 연간)에 득세했던 원우당(구법당)은 크게 몰락한다. 사마광 역시 황제가 친히 내린 비문을 부수고 후손들이 삭탈 유배를 떠나는 치욕을 겪는다. 부관참시까지 거론되었으나 이것만큼은 면했다.[9] 하지만 송 철종이 또 급서하면서(1100년) 동생 휘종이 즉위하고 향태후는 다시 구법당을 복권시켰다. 이와 같이, 왕안석(신법당)과 사마광(구법당) 사후에 계속 빚어진 신법당과 구법당의 진흙탕 싸움은 북송 멸망 때까지 계속되어 국력 약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10]

당대에 이미 매우 덕망 높은 인물로 알려졌으며, 보수 유학자들로부터는 공명정대한 인물로 대대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11]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측에서는 반동적인 정치가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다만 재상으로 있던 기간이 겨우 8개월이었기 때문에 신법을 대신할 정책을 구상하다가 끝내 실현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12]
"개보(왕안석의 자)가 천하에 큰 이름을 떨친 지 어언 30년. 우수한 재능과 풍부한 학식으로도 나아가 벼슬하는 건 어렵고 물러나는 것은 쉽다오. 천하 사람 누구나 그대가 가히 태평한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외치며, 백성들이 그대의 은택을 입었다고 외친다오"
-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보낸 서신 중에서

왕안석의 신법을 매우 반대했지만 실제로 왕안석과 사마광 개인 대 개인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 편지를 보면 "내가 그대의 벗으로서 하는 말"이라고 적혀 있으며 매우 허심탄회하게 왕안석의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나라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대의 목적은 좋았고, 나와 그대의 목적은 같지만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밝혔다. 즉, 이들 둘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사마광이 신법은 반대한 것은 신법이 성공하면 송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문제는 의도와는 달리 사회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우려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왕완석의 신법은 많은 논란이 되었다.

왕안석 역시 사마광이 사심 없는 인물임은 인정했기 때문에 답장에 사마광의 비판을 하나하나 논박하면서 "사사로운 면에서는 나 역시 그대를 벗으로 생각하나, 국사에 대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은 각자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오"라고 적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점이 워낙 조정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사마광도 왕안석을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정에서 더욱 강력하게 왕안석의 개혁안을 비판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마광과 왕안석은 죽을 때까지도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지켰다고 한다.물론 이 두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3. 여담[편집]

그의 기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릴 때 친구들과 놀다가 한 친구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 정원에 세워둔 인공 돌산 아래 물항아리에 빠졌다. 다른 친구들은 그저 모두 당황해서 방법도 몰라서 울고불고 왔다갔다 방황하는 등 우왕좌왕했지만, 사마광만큼은 침착하게 돌을 찾아들고 물항아리 아래를 깨뜨려 구멍을 내서 물을 빼고 친구를 구했다(파옹구우破甕救友)는 일화가 있다. 사마광이라는 사람을 몰라도 아동용 서적이나 교과서 등에서 옛날이야기로 소개되어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이 많은데, 이 일화의 실제 주인공이 바로 사마광이다.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도 있는데 제목은 사마광잡항(司馬光砸缸), 즉, '사마광이 항아리를 깨다'라는 뜻이다.

5세 때는 누이와 호두를 먹고 있었는데, 호두는 까기가 쉽지 않은 열매. 호두를 까지 못한 누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종이 호두를 뜨거운 물에 불려 까주었다. 얼마 후에 돌아온 누이는 사마광에게 어떻게 호두를 깠냐고 물었고 사마광은 여종이 했던 방법을 자기가 스스로 만든 방법인 양 거짓말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사마광의 아버지는 사마광을 불러 거짓말한 죄를 엄히 혼내고 성실과 정직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이때부터 사마광은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목 맨 위에 있는 유안세와의 대화도 이걸 보여주는 예. 7살 때는 좌씨춘추 강의를 듣고 집에 와서 들었던 내용을 정확하게 강의했다고 할 정도로 수재였다.

개인적인 덕망과 검소함은 고금의 재상들의 정성에 비할 만했다. 사마광에 대해선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사마광이 유서를 만나서 일을 맡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유서가 추운 날임에도 가난하여 홑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사마광은 자신도 그나마 겨우 가지고 있던 낡은 가죽옷 두 벌 중 한 벌을 유서에게 주고 길을 떠나게 했다. 사실상 사마광이 유서에게 가죽옷을 그냥 준 것. 그런데 이후 유서는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 가죽옷을 서신과 함께 고스란히 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가 평생 사표로 삼은 '誠'의 모습은 그의 열전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마광이 말하면 임금이 행하고 계교를 내면 임금이 그 계교를 따르자, 몸을 사직에 바칠 것을 각오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무(庶務)에 열중했다. 그러나 빈객이 그의 몸이 파리한 것을 보고 제갈량(諸葛亮)의 ‘식소사번(食少事煩)’의 말을 예거하면서 경계하니 광(光)은 "죽고 삶은 명(命)에 달려 있다" 하고 더욱 서무에 힘썼다.

송사(宋史)》 사마광열전(司馬光列傳)

선조사마의의 동생이자 삼국지의 인물 중 한 명인 안평왕 사마부로 무려 93세까지 살아서 장수를 누렸다. 현대인들의 잘못된 이해로 인해 자치통감에서 그가 위 정통론을 주장했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치통감은 연도만 조위 - 서진의 연도를 사용할 뿐 어느 정통론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이른바 '무통설'. 그가 사마씨의 후손이란걸 감안하면 여러모로 공정한 해석인 셈이다.[13]

조선에선 엄청나게 받들어졌는데, 정조 때 경연에서 "왕안석이랑 사마광이랑 비교해서 인품은 물라도 능력은 왕안석이 결코 사마광보다 못하진 않았다." 라고 했더니 신하들이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입니다. 오래 정치를 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유학자들이 본래 새로운 일 벌이기를 꺼리는 걸 생각하면 신법에 반대했던 사마광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4]

구법당의 당수였다는 이미지 때문에 보수주의자의 이미지가 강한 탓인지 신법당의 당수이자 개혁정치가의 이미지가 강한 왕안석과 나이 차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나이차는 사마광이 불과 2살 연상이다. 두 사람을 묘사한 초상화를 봐도 사마광은 흰수염이 성성한 노회한 정객의 이미지지만 왕안석은 그보다는 훨씬 젊게 묘사되었다. 공교롭게도 사마광과 왕안석 모두 같은 해에 사망했다.

남송원나라의 군대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사마몽구가 사마광의 후손이다.
2020년 드라마 청평악에 등장한다. 초반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작중 최고 발암캐릭터인 장귀비가 죽고 난 다음부터 발암 캐릭터를 맡게 된다. 인종이 사마광에게 하사한 유리잔을 깨뜨려 죽을 위기에 처한 내시를 '물건이 어찌 사람목숨보다 귀하겠느냐?'라고 말하고 살려줬다. 인종에게 '아름다운 것은 쉽게 부서지는 법이니 실수를 범한 자는 용서하시지요'라는 말을 올렸고 인종은 사마광을 어진 신하라고 평가했다. 인종에게 무려 4시간동안 간언을 올려서 듣는 인종이 힘들어하기도 했다. 자성광헌황후의 폐위를 처음으로 간언한 신하이다.

사마광은 인종의 장녀 연국공주가 시모에게 불손하고 부마를 무시하는 부덕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근래에 자연재해가 잦은 것은 인종이 여자, 술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인종이 말을 듣지 않자 10배의 상소를 올리고 언관들도 동원했다. 가뭄이니 연등회를 취소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인종이 거부했다. 연등회에서 황족들과 고관들이 여자씨름을 구경하는데 사마광만 손으로 눈을 가리고 보지 않았다.

여자씨름을 보던 인종이 자리에 앉자 사마광은 뜬금없이 여자씨름이 음탕하니 금지하자는 간언을 했다. 연국공주는 사마광에게 방금 시합에서 누가 이겼냐고 하문했는데 사마광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국공주는 다른 사람들은 훌륭한 씨름경기를 보았는데 사마광은 여인의 가슴만 본 것 같다며 사마광의 마음이 더 음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마광은 연국공주를 훈계하라는 간언을 했는데 인종은 사마광이 자식이 없으니 그따위 소리를 한다고 말했다. 구양수는 사마광이 융통성이 없고, 황제와 황족들이 천하만민에게 성인이자 모범으로서 존경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잦은 간언으로 황실의 명예를 오히려 떨어뜨렸으니 신하로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사마광은 매일 상소를 올렸다. 상소가 통하지 않자 대전에서 큰소리치고 구양수를 비난하기도 했다.

[1] 980년 ~ 1041년[2] 劉安世. 북송의 문신. 사마광의 제자이다.[3] 단순히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말란 게 아니라, 말만 앞서지 말고 행동으로 그것을 참되게 하라는 더 넓은 의미이다. 유안세는 이 가르침을 듣고서 '새삼 무슨 싱거운 소리를 하시나' 하다가도 이를 계기로 자기 언행을 곰곰이 한 번 되돌아 보게 되었고, 마침내 평소 자기 행실이 말을 따라가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언행일치에 힘썼는데,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을 만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입바른 선비들, 나아가 모든 지식인들의 고질적 문제인 '앉아서 말한 것을 일어서서 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꼬집을 때 종종 인용되는 일화이다. 입바른 명분을 대며 이것저것 일은 많이 저지르지만 그 폐단은 잘 돌아보지 않는 신법당을 사마광이 몹시 경계한 이유가 여기서 엿보인다.[4] 誠은 유교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용 문서 참조.[5] 초한쟁패기 은왕 사마앙의 후손들은 은나라의 봉지였던 하내군 온현에서 거주했다. 이후 사마염서진을 세운 이후로 수도인 낙양과 각지의 봉지로 흩어졌다.[6] 사실 자치통감 편찬 자체가 신종의 지시기도 했다.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이 격화되자 신종은 둘 다 버릴 수는 없지만 일단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게 해서 자연스레 일을 놓게 했다. 하지만 이것이 구법당에게 꼭 불리했던 것은 아니었고 구법당은 자치통감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은근히 어필할 수 있었다.[7] 사마광이 신법 혁파를 너무 강하게 밀어붙인 것처럼 왕안석도 신법 추진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였다. 당장 위에 나왔듯 사마광은 온건적일지언정 신법을 찬성했다가 너무 강경하게 밀어붙이자 반대하게 된 인물이었다.[8] 혹 여기서 사마우는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인 사마우라는 견해도 있다.[9] 자치통감도 없어질 뻔 했지만 송신종이 지시하여 만든 책인데다 지원까지 해주고 서문까지 써줘서 살아남았다.[10] 이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은 채경이 등장하면서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자기에게 반대하면 사이좋게 때려잡아 일단락되지만 채경이 또 이들보다 나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11] 심지어 정조 때 정조가 대놓고 왕안석에 대해 "인품은 모를까 능력은 왕안석이 사마광에 뒤지지 않는다." 라고 말하자 신하들이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이고 오래 정치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이뤘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12] 실제로 처음에는 신법 자체에는 찬성했으니 뭔가 바꿔야 한다는 것은 공감했을지도 모른다.[13] 4차 북벌 때 제갈량과 사마의가 정면대결한 노성 전투에서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촉군 1만 명의 목을 베며 대승을 거뒀다고 왜곡한 반면 촉서와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이 전투에서 이겼음을 명확히 하자 아무리 조상이라도 어디서 약을 파냐는 태도로 선제기의 기록을 아예 무시했다.[14]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마광은 그 조선 유학자들이 떠받들었던 맹자를 「의맹」(疑孟)이라는 책까지 출판하며 깠다. 오히려 왕안석에 의해 맹자가 정부 차원에서 공식 존숭되기 시작하여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되고 공묘에서 맹자 제사가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맹자 특유의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문장을 들먹이며 (사마광이 보기에는) 너무 급진적인 정책을 생각 없이 막 지르고 보는 신법당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때문에 사마광은 이를 비판,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그 수단으로서 짐짓 순수 고증학적 관심만 있는 양 '역사적 맹자가 과연 그딴 막 나가는 말을 했을까?'라는 화두를 제시하고, 당대 통용되던 『맹자』 내의 공자의 말에 반하는 부분, 논리가 박약한 부분, 맹자의 부적절한 처신이 드러나는 부분, 너무 신화스러운 부분 등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며 맹자적, 신법당적 무대뽀 급진주의를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유학자들이 더더욱 떠받든 후대의 주자(주자 역시 사마광이 그리하였듯 『맹자』 텍스트에 대한 고증학적 비판 형식을 취해 『맹자』 의 몇몇 내용을 '바로잡기'도 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주자학자들 내부에서는 실질적으로 맹자 말보다 주자 말이 더 떠받들어지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참고로 주자는 특히 『대학』에 이런 식의 적극적 개입을 많이 하였다)가 사마광을 다시 까기도 하였다(그러나 주자의 「의맹」 반박은 오늘날 시점에서 볼 때 실증적이지 않고 공상적인 부분이 많다). 또한 주자는 왕안석을 명신이라 평가했다. 주자를 따르자니 조상님이 울고 조상님을 따르자니 주자가 울고. 그래도 주자도 어디까지나 왕안석 개인만 좋게 평가하고 정작 그가 추진한 신법에는 비판을 가하며 심지어 북송의 멸망은 신법의 부작용이라고 말하였으며, 사마광의 다른 면은 대부분 좋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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