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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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제9대 황제 소제 | 少帝 | |
출생 | |
즉위 | |
사망 | |
능묘 | 소제릉(少帝陵) |
재위기간 | 남송 황제 |
송도종의 7남이자 수용 유씨 소생으로 1272년에 태어났다. 1274년 아버지 도종이 죽고 이복형인 공제가 즉위한 이후 신왕(信王)에 봉해졌다가 다시 광왕(廣王)에 봉해졌다. 이후 다시 위왕(衛王)에 진봉되었다. 그러다가 1276년, 임안에 있던 공제가 사태후, 전태후, 종실, 대신들과 함께 항전 대신 성문을 열고 나와서 원나라에게 항복할 당시, 이복형인 단종과 함께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진의중(陳宜中) 등 일부 무관들과 문관들에 의해 보호되어 남쪽에서 항거했다.
그러다가 1278년 단종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요절하자 육수부에 의해 옹립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포수경(蒲壽庚)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들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군이 보강되어 전투에 매우 유리했다.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소제는 배 안에서 신하들과 동고동락했으며 육수부는 몸소 황제에게 경서 강독을 했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남송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3월에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패배하자 절망한 신하들은 차례로 물 속에 투신했다.
그러다가 1278년 단종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요절하자 육수부에 의해 옹립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포수경(蒲壽庚)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들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군이 보강되어 전투에 매우 유리했다.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소제는 배 안에서 신하들과 동고동락했으며 육수부는 몸소 황제에게 경서 강독을 했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남송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3월에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패배하자 절망한 신하들은 차례로 물 속에 투신했다.
이제 사직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바, 존망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오랑캐들에게 사로잡혀 욕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노신과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하시어, 구천에 계신 열성조를 뵘이 대송의 천자로써 떳떳한 바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육수부는 덕우 황제의 치욕을 보일 수 없다면서 어린 황제를 업고 물 속에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 때 소제는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기며 죽었다고 한다.[8] 뒤이어 태후, 황족들도 물 속에 뛰어내렸다. 이미 임안 함락으로 사실상 멸망했던 남송은 이 전투의 대패와 소제의 죽음으로 완전히 멸망했다.[9]
애산은 마카오 서쪽에 있다. 현재는 광동성 장먼시 애산진이라는 이름으로 존속중이다. 애산진은 당대에는 해안가였으나 지금은 6km 정도 내륙에 있는데 750년 정도 지나면서 퇴적작용으로 해안선이 확장된 것이다.
소제와 육수부 등의 시신은 파도를 따라 해변으로 밀려왔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송의 옛 백성들이 죽은 소제를 매장했다. 현재까지 소제릉, 송소제릉이라고 불리고 있다. 선전에 있는데 역사 유적이라고 찾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홍콩에도 송소제릉이라고 불리는 릉이 있고 송웡토이역이라는 이름으로 홍콩 지하철 마온산선 철도역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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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년 1개월 7일[A] 비공식 묘호.[B] 시호가 아니다. 후대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4] 다만 회종이라는 사시(私諡)가 있기는 하다.[5] 어린 군주라는 뜻.[6] 즉위하기 전까지 받았던 작위.[7] 고려사 연표에서도 이렇게 지칭하고 있다.[8] 이 말을 했을 때 겨우 만 7세, 오늘날의 초등학교 1학년 나이였다. 공교롭게도 이 유언은 정확히 800년 전, 유송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가 남긴 유언과 비슷하며, 순제 역시 이 말을 했을 당시 만 9세로 매우 어린 나이였다.[9] 사실 항복한다고 쳐도 당장 살해됐을 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송공종처럼 온갖 수모를 당하다 일족 전원이 사사됐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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