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언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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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幷州) 태원현(太原縣) 출신으로, 아버지 나전덕(羅全德)은 후진에서 비주자사(泌州刺史)를 지냈고 나언괴는 내전직(內殿直)으로 보임되었다.
후진의 소제 석중귀가 전주(澶州)에 있을 때 하북의 도처에 거란의 기병들이 모여들자 나언괴는 석중귀의 명을 받아 대명부(大名府)로 파견되어 대명부의 백성들을 위무했고 당시 결국 군중의 군사 10명을 모아 따르게 하도록 명했으며, 나언괴는 밤에 조용히 출병하고 기일 내에 왕복하여 이로 말미암아 흥순지휘사(興順指揮使)로 보임되었다. 거란의 군주 야율덕광이 개봉부로 이르자, 석중귀는 나언괴를 말 1천 마리와 함께 계(薊)로 파견했다. 그러다가 원씨현(元氏縣)에 이르러 나언괴는 유지원이 태원에서 거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유지원에게 귀순하여 유지원이 개봉부로 입성한 뒤 호성지휘사(護聖指揮使)로 발탁되었다.
후주가 들어선 뒤 산원도우후(散員都虞候)로 옮겼다가 추밀사(樞密使) 왕준에 연루되어 등주교련사(鄧州敎練使)로 좌천되었다. 시영이 제위를 이은 뒤 반음지휘사(伴飮指揮使)로 임명되고 마보군도군두(馬步軍都軍頭)로 전임되었다. 나언괴는 상훈을 따라 진봉(秦鳳) 수복할 때 전공을 세워 산지휘도우후(散指揮都虞候)로 옮겼다.
960년, 조광윤가 진교(陳橋)에서 돌아올 때 재상 범질 등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언괴는 칼을 던지고 앞으로 나서며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진의 소제 석중귀가 전주(澶州)에 있을 때 하북의 도처에 거란의 기병들이 모여들자 나언괴는 석중귀의 명을 받아 대명부(大名府)로 파견되어 대명부의 백성들을 위무했고 당시 결국 군중의 군사 10명을 모아 따르게 하도록 명했으며, 나언괴는 밤에 조용히 출병하고 기일 내에 왕복하여 이로 말미암아 흥순지휘사(興順指揮使)로 보임되었다. 거란의 군주 야율덕광이 개봉부로 이르자, 석중귀는 나언괴를 말 1천 마리와 함께 계(薊)로 파견했다. 그러다가 원씨현(元氏縣)에 이르러 나언괴는 유지원이 태원에서 거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유지원에게 귀순하여 유지원이 개봉부로 입성한 뒤 호성지휘사(護聖指揮使)로 발탁되었다.
후주가 들어선 뒤 산원도우후(散員都虞候)로 옮겼다가 추밀사(樞密使) 왕준에 연루되어 등주교련사(鄧州敎練使)로 좌천되었다. 시영이 제위를 이은 뒤 반음지휘사(伴飮指揮使)로 임명되고 마보군도군두(馬步軍都軍頭)로 전임되었다. 나언괴는 상훈을 따라 진봉(秦鳳) 수복할 때 전공을 세워 산지휘도우후(散指揮都虞候)로 옮겼다.
960년, 조광윤가 진교(陳橋)에서 돌아올 때 재상 범질 등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언괴는 칼을 던지고 앞으로 나서며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주군이 없으니 오늘 모름지기 천자가 되어주십시오.
이 사건이 바로 진교의 변이었다. 범질 등은 이로 말미암아 조광윤을 황제로 받들었으며, 이가 바로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였다.
나언괴는 공학좌상도지휘사(控鶴左廂都指揮使)로 발탁되고 내외마군도군두(內外馬軍都軍頭) 겸 미주방어사(眉州防禦使)로 전임되었다. 택로(澤潞) 정벌에 종군하고 돌아와 조언휘(趙彦徽)를 대신하여 시위보군도지휘사(侍衛步軍都指揮使) 겸 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961년, 창덕군절도사(彰德軍節度使)를 맡았다. 964년, 안국군절도사(安國軍節度使)로 전임되고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 이계훈과 함께 거란을 대파하였다. 966년, 다시 각문사(閣門使) 전흠조와 함께 정양(靜陽)에서 북한의 군대 1천여 명을 죽이고 태원의 장수 녹영(鹿英) 등을 사로잡았으며, 말 300마리을 노획하였다. 965년 화주절도사(華州節度使)로 전임되었다. 969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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