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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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간신으로 자는 사미(士美).
이방언은 태학생으로 수도에 들어가 휘종 대관(大觀) 2년(1108년)에 상사생으로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이 되었고 부보랑을 맡았다. 재주와 슬기가 뛰어났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문장을 짓는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오랫동안 민간에서 비열한 일들을 배우고 응대가 민첩하였으며, 농담과 축국을 잘 하였으며, 시가의 상말들을 노래로 전파할 때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이방언은 스스로를 이낭자(李浪子)라고 불렀다.
간관들이 이방언이 방탕하고 법도가 없다며 그를 탄핵하자, 이방언은 부보랑에서 파직되고 교서랑이 되었다. 이후 이부원외랑으로 예의국(禮議局)을 겸하였으며 지하양현(知河陽縣)을 맡고 기거랑(起居郎)으로 벽소되었다. 이방언은 조정에서 환관들에게 아첨하였고, 환관들 또한 앞다투어 이방언을 천거하고 칭찬하여 이방언은 중서사인, 한림학사승지까지 승진하였다.
선화(宣和) 3년(1121년) 이방언은 상서우승으로 임명되고 선화 5년(1123년)에 상서좌승이 되었다. 하지만 이방언은 이후 왕보(王黼)와 불화하였고, 몰래 채유(蔡攸)[1], 양사성(梁師成) 등과 결탁하여 왕보를 파직시켰다. 선화 6년(1124년)에는 소재(少宰)로 임명되었는데, 아첨으로 소재의 자리까지 올랐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방언에 대해서 낭자재상(浪子宰相)이라고 불렀다.
1125년, 요나라가 북송과 금나라의 협공으로 멸망한다. 하지만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 휘종은 요나라를 정벌할 때 금나라와 했던 약속을 어겼고, 금나라가 북송을 침입하기 시작하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덜컥 양위해버렸다. 이때 이방언은 용덕궁사(龍德宮使)로 임명되고 태재(太宰) 겸 문하시랑(門下侍郎)까지 승진하였다. 하지만 이방언은 금나라의 침입이 점점 다가오자 임명을 받지 않고 궁관사(宮觀祠)를 맡기를 원하게 된다. 금나라가 수도인 개봉부로 핍박해오고 이강(李綱)과 충사도(种師道)가 파면되자, 이방언은 주화파에서 서서 금나라와 화의하고 땅을 나누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세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고, 선덕문 앞에서는 진동(陳東)을 비롯한 태학생들이 나라를 그르친 이방언과 백시중(白時中), 장방창, 조야(趙野), 왕효적(王孝迪), 채무(蔡懋), 이탈(李梲)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방언이 퇴조할 때 북송의 백성들은 이방언을 비난하고 어떤 이는 이방언을 때리려고까지 했으나 이방언이 달아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결국 이방언은 특진(特進), 관문전(觀文殿) 대학사로 강등되고 태일궁사(太一宮使)를 맡았지만, 10일도 안되어 오민(吳敏)이라는 인물의 주청으로 인해 다시 태재로 기용되었고, 충격적인 인선에 경악한 간관들은 다시 이방언을 탄핵하였다. 이방언에 대한 규탄 여론이 갈수록 거세지자, 이방언은 지등주(知鄧州)를 맡으면서 남은 직책이라도 보존해달라고 청하여 박주(亳州) 명도궁(明道宮)의 제거(提擧)가 되었다.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휘종의 서자인 강왕 조구가 강남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송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게 되니, 이가 바로 송나라의 제10대 황제인 고종이었다. 고종은 금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나라를 그르친 이방언을 건무군(建武軍) 절도부사로 폄관하였고 심주(潯州)에 유배시켰다. 이방언은 유배지인 심주에서 사망하였다.
간관들이 이방언이 방탕하고 법도가 없다며 그를 탄핵하자, 이방언은 부보랑에서 파직되고 교서랑이 되었다. 이후 이부원외랑으로 예의국(禮議局)을 겸하였으며 지하양현(知河陽縣)을 맡고 기거랑(起居郎)으로 벽소되었다. 이방언은 조정에서 환관들에게 아첨하였고, 환관들 또한 앞다투어 이방언을 천거하고 칭찬하여 이방언은 중서사인, 한림학사승지까지 승진하였다.
선화(宣和) 3년(1121년) 이방언은 상서우승으로 임명되고 선화 5년(1123년)에 상서좌승이 되었다. 하지만 이방언은 이후 왕보(王黼)와 불화하였고, 몰래 채유(蔡攸)[1], 양사성(梁師成) 등과 결탁하여 왕보를 파직시켰다. 선화 6년(1124년)에는 소재(少宰)로 임명되었는데, 아첨으로 소재의 자리까지 올랐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방언에 대해서 낭자재상(浪子宰相)이라고 불렀다.
1125년, 요나라가 북송과 금나라의 협공으로 멸망한다. 하지만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 휘종은 요나라를 정벌할 때 금나라와 했던 약속을 어겼고, 금나라가 북송을 침입하기 시작하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덜컥 양위해버렸다. 이때 이방언은 용덕궁사(龍德宮使)로 임명되고 태재(太宰) 겸 문하시랑(門下侍郎)까지 승진하였다. 하지만 이방언은 금나라의 침입이 점점 다가오자 임명을 받지 않고 궁관사(宮觀祠)를 맡기를 원하게 된다. 금나라가 수도인 개봉부로 핍박해오고 이강(李綱)과 충사도(种師道)가 파면되자, 이방언은 주화파에서 서서 금나라와 화의하고 땅을 나누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세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고, 선덕문 앞에서는 진동(陳東)을 비롯한 태학생들이 나라를 그르친 이방언과 백시중(白時中), 장방창, 조야(趙野), 왕효적(王孝迪), 채무(蔡懋), 이탈(李梲)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방언이 퇴조할 때 북송의 백성들은 이방언을 비난하고 어떤 이는 이방언을 때리려고까지 했으나 이방언이 달아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결국 이방언은 특진(特進), 관문전(觀文殿) 대학사로 강등되고 태일궁사(太一宮使)를 맡았지만, 10일도 안되어 오민(吳敏)이라는 인물의 주청으로 인해 다시 태재로 기용되었고, 충격적인 인선에 경악한 간관들은 다시 이방언을 탄핵하였다. 이방언에 대한 규탄 여론이 갈수록 거세지자, 이방언은 지등주(知鄧州)를 맡으면서 남은 직책이라도 보존해달라고 청하여 박주(亳州) 명도궁(明道宮)의 제거(提擧)가 되었다.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휘종의 서자인 강왕 조구가 강남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송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게 되니, 이가 바로 송나라의 제10대 황제인 고종이었다. 고종은 금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나라를 그르친 이방언을 건무군(建武軍) 절도부사로 폄관하였고 심주(潯州)에 유배시켰다. 이방언은 유배지인 심주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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