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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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의왕(秦正懿王) 왕심기 | 王審琦 | |
시호 | 정의(正懿) |
작위 | 낭야군왕(琅琊郡王) → 진왕(秦王) |
성 | 왕(王) |
이름 | 심기(審琦) |
자 | 중보(仲寶) |
출신 |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 |
생몰연대 | 925년 ~ 974년 |
왕심기의 조상은 요서(遼西) 출신으로 뒤에 낙양(洛陽)으로 옮겨 살았다.
왕심기는 후한 건우(乾祐) 연간 초에 곽위의 막하에 소속되었으며, 성품이 순박하고 신중하여 곽위가 매우 신임하였다. 곽위가 이수정(李守貞)을 평정할 때 종군하고 공적을 세워 청직좌번부장(廳直左番副將)으로 서임되었다. 곽위는 후한 조정을 전복시키고 951년 후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였다.
후주가 들어선 뒤, 왕심기는 동서반행수(東西班行首)·내전직도지(內殿直都知)·철기지휘사(鐵騎指揮使)를 역임하고 시영에게 종군하여 유민을 정벌할 때 적을 세워 동서반도우후(東西班都虞候)로 옮겼고 철기도우후(鐵騎都虞候)로 전임되었으며, 우제2군도교(右第二軍都校)로 전임되었다. 시영이 금군의 장수들을 불러 후원에서 활을 쏘게 했는데, 왕심기가 연달아 과녁에 명중하자 시영은 왕심기를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 이윽고 왕심기는 근주자사(勤州刺史)를 겸임하였다. 시영은 954년 곽위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세종이다.
세종이 남당을 친정할 때 서주(舒州)의 방비가 견고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조서를 내려 곽영도(郭令圖)에게 자사를 겸임하게 하고 왕심기와 사초에게 정예 기병을 이끌게 했으며, 서주성을 공격하여 하룻밤 사이에 함락시키고 자사를 사로잡았으며, 수십만에 달하는 남당의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곽영도가 이윽고 입성하자, 왕심기 등은 마침내 황주(黃州)를 구원했다. 며칠이 지나 곽영도가 서주에서 쫓겨나자, 왕심기는 경기병을 선발하고 밤에 조용히 출발하여 이틀 밤을 머무르다가 서주성 아래에 이르러 서주를 함락시켜 곽영도는 다시 치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세종은 왕심기의 공적을 칭찬하여 산원도지휘사(散員都指揮使)로 제수하였다. 다시 자금산(紫金山)에서 남당(南唐)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선봉에 서다가 화살에 맞았으며, 공학우상도교(控鶴右廂都校) 겸 건주단련사(虔州團練使)로 전임되었다. 세종이 호주(濠州)를 포위할 때 왕심기는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 수천 명을 이끌어 수채(水砦)를 함락시키고 월성(月城)을 탈취하여 호주성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초주(楚州)를 공격할 때 남면순검(南面巡檢)으로 임명되었고 초주성이 함락되기 직전 왕심기는 초주성에 주둔한 남당의 군대가 반드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복병을 배치하여 남당의 군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뒤이어 왕심기의 예측대로 성내의 병사들이 초주성 남문을 열고 달아나자, 왕심기의 복병이 이를 공격하여 수천 명을 참수하고 5천여 명을 붙잡아 세종에게 바쳤으며, 명마, 옥대, 수백 필의 비단을 하사받았다. 회남이 평정되자, 철기우상도교(改鐵騎右廂都校)로 전임되었다. 와교관(瓦橋關)을 평정할 때도 종군하였다.
시영이 죽고 시영의 4남인 시종훈이 즉위하니, 이가 마지막 황제인 공제였다. 왕심기는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 겸 목주방어사(睦州防禦使)로 옮겼다. 1년 뒤인 960년, 진교의 변을 통해 조광윤이 신하들로부터 추대되고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송을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였다.
왕심기는 후한 건우(乾祐) 연간 초에 곽위의 막하에 소속되었으며, 성품이 순박하고 신중하여 곽위가 매우 신임하였다. 곽위가 이수정(李守貞)을 평정할 때 종군하고 공적을 세워 청직좌번부장(廳直左番副將)으로 서임되었다. 곽위는 후한 조정을 전복시키고 951년 후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였다.
후주가 들어선 뒤, 왕심기는 동서반행수(東西班行首)·내전직도지(內殿直都知)·철기지휘사(鐵騎指揮使)를 역임하고 시영에게 종군하여 유민을 정벌할 때 적을 세워 동서반도우후(東西班都虞候)로 옮겼고 철기도우후(鐵騎都虞候)로 전임되었으며, 우제2군도교(右第二軍都校)로 전임되었다. 시영이 금군의 장수들을 불러 후원에서 활을 쏘게 했는데, 왕심기가 연달아 과녁에 명중하자 시영은 왕심기를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 이윽고 왕심기는 근주자사(勤州刺史)를 겸임하였다. 시영은 954년 곽위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세종이다.
세종이 남당을 친정할 때 서주(舒州)의 방비가 견고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조서를 내려 곽영도(郭令圖)에게 자사를 겸임하게 하고 왕심기와 사초에게 정예 기병을 이끌게 했으며, 서주성을 공격하여 하룻밤 사이에 함락시키고 자사를 사로잡았으며, 수십만에 달하는 남당의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곽영도가 이윽고 입성하자, 왕심기 등은 마침내 황주(黃州)를 구원했다. 며칠이 지나 곽영도가 서주에서 쫓겨나자, 왕심기는 경기병을 선발하고 밤에 조용히 출발하여 이틀 밤을 머무르다가 서주성 아래에 이르러 서주를 함락시켜 곽영도는 다시 치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세종은 왕심기의 공적을 칭찬하여 산원도지휘사(散員都指揮使)로 제수하였다. 다시 자금산(紫金山)에서 남당(南唐)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선봉에 서다가 화살에 맞았으며, 공학우상도교(控鶴右廂都校) 겸 건주단련사(虔州團練使)로 전임되었다. 세종이 호주(濠州)를 포위할 때 왕심기는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 수천 명을 이끌어 수채(水砦)를 함락시키고 월성(月城)을 탈취하여 호주성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초주(楚州)를 공격할 때 남면순검(南面巡檢)으로 임명되었고 초주성이 함락되기 직전 왕심기는 초주성에 주둔한 남당의 군대가 반드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복병을 배치하여 남당의 군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뒤이어 왕심기의 예측대로 성내의 병사들이 초주성 남문을 열고 달아나자, 왕심기의 복병이 이를 공격하여 수천 명을 참수하고 5천여 명을 붙잡아 세종에게 바쳤으며, 명마, 옥대, 수백 필의 비단을 하사받았다. 회남이 평정되자, 철기우상도교(改鐵騎右廂都校)로 전임되었다. 와교관(瓦橋關)을 평정할 때도 종군하였다.
시영이 죽고 시영의 4남인 시종훈이 즉위하니, 이가 마지막 황제인 공제였다. 왕심기는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 겸 목주방어사(睦州防禦使)로 옮겼다. 1년 뒤인 960년, 진교의 변을 통해 조광윤이 신하들로부터 추대되고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송을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였다.
북송이 들어선 뒤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 겸 태령군절도사(泰寧軍節度使)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이균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심기는 이균을 토벌할 때 어영전동옥도부서(御營前洞屋都部署)로 종군하다가 석궁에 다쳐서 태조가 직접 문안하였다. 이균가 평정된 뒤 왕심기는 무성군절도사(武成軍節度使)를 겸임하였다. 한편 이균에 이어 이중진 또한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전군부서(前軍部署)가 되어 석수신을 보좌하며 이중진을 토벌하였다.
961년, 충정군절도사(忠正軍節度使)로 전출되어 8년 동안 충정군에 있으면서 너그러운 정치를 펼쳤다. 허주의 한 현령이 죄를 저질러 녹사의 직무가 정지되자, 왕심기의 막료들은 현령이 먼저 왕심기에게 의견을 자문하지 않았다며 현령의 죄를 다스릴 것을 왕심기에게 주청하였다. 왕심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961년, 충정군절도사(忠正軍節度使)로 전출되어 8년 동안 충정군에 있으면서 너그러운 정치를 펼쳤다. 허주의 한 현령이 죄를 저질러 녹사의 직무가 정지되자, 왕심기의 막료들은 현령이 먼저 왕심기에게 의견을 자문하지 않았다며 현령의 죄를 다스릴 것을 왕심기에게 주청하였다. 왕심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대 이래로 제후들이 횡포를 부려서 현령이 오로지 현의 사무에 전념하지 못했소. 지금은 천하가 평정되어 내가 다행히 번진을 지키고 있는데, 부내의 현령이 능히 교활한 관리를 물리친 것은 진실로 칭찬할 만한 일이지 어찌 그 죄를 추궁하려 하시오?
왕심기의 말을 들은 이들이 왕심기에게 탄복하였다.
969년, 북한을 정벌할 때 어영사면도순검(御營四面都巡檢)이 되어 종군하였다. 970년,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로 전임되고 저택을 받았으며, 수도인 개봉부에 머물렀다. 태조가 일찍이 왕심기를 불러 후원에서 연회를 열고 왕심기에게 화살을 쏘게 했는데, 왕심기의 화살이 연달아 과녁에 명중하자 태조는 말과 황금으로 된 안장을 왕심기에게 하사하였다. 973년, 고회덕과 더불어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더해졌으며, 974년 사망하였다.
왕심기가 갑자기 병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하자 태조가 직접 왕심기를 문안했으며, 왕심기가 죽자 다시 왕심기의 저택으로 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왕심기는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되고 낭야군왕(琅琊郡王)으로 추봉되었으며, 태조는 왕심기의 장례를 치른 날에 다시 정무를 중단하였다. 뒤에 다시 진왕(秦王)으로 추봉되고 정의(正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왕심기는 중후하고 방략이 있었으며,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났다. 수춘에 진수할 때 해마다 조세를 거둘 때마다 수입에 맞게 지출했고 가렴주구를 일삼은 적이 없었다. 왕심기는 본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 일찍이 태조가 연회를 베풀었을 때 태조는 술이 무르익은 뒤 하늘을 우러러보며 축복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술은 하늘의 미록(美祿)이요, 왕심기는 짐의 포의지교요. 바야흐로 짐과 함께 부귀를 누려고 하는데 왜 왕심기가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것이오?
축사를 마친 뒤 태조는 다시 왕심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반드시 경에게 주량을 내릴 것이니 두려워말고 술을 마셔 보시오.
왕심기는 술 10잔을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태조의 연회에 배석할 때마다 항상 항상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 마셨지만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서는 곧바로 술을 마시지 못해서 어떨 때는 억지로 마셔서 갑자기 병에 걸리기도 했다.
슬하의 아들로 왕승연(王承衍), 왕승간(王承衎), 왕승덕(王承德), 왕승우(王承祐), 왕승준(王承俊), 왕승악(王承偓), 왕승선(王承僎), 왕승근(王承僅), 왕승휴(王承休)가 있었다. 왕승덕은 서상각문사(西上閣門使)·회주자사(會州刺史)를 역임했고, 왕승우는 여경사(如京使)를 역임했고, 왕승준과 왕승선은 내전숭반(內殿崇班)를 역임했고, 왕승악은 각문지후(閣門祗候)를 역임했고, 왕승근은 좌신무장군(左神武將軍)을 역임하다가 물러났고, 왕승휴는 내전승제(內殿承制)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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