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지
최근 수정 시각:
|
1219년 출생으로, 태어났을 때 그 집 들보 위에 영지가 자라고 동향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면서 남자아이를 낳을 상서로운 징조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하루에도 수천 자씩 읽었을 정도로 영특했고, 그 지혜로운 지식은 늘 장자, 노자 위에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18세 때 왕민이 수주지주로 부임했는데, 그는 숙부, 백부, 아버지에게 간한다.
왕민이 잔혹하고 아랫사람을 구휼하지 않으니 아랫사람의 불평이 많으면 반드시 주에서 난리가 날 것이니 덕안으로 이주하십시오.
숙부, 백부, 아버지가 겨우 그의 말을 듣고 거가를 옮겼고, 이주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왕민이 반란을 일으켜 민중이 많이 죽었다.
1240년에는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장강의 방무가 급박해 이정지가 향거를 얻지 못하자 형주의 장수 맹공을 책론하고 나라를 위해 힘써 달라고 청했다. 맹공은 관상에 능한 데다 밤에는 이상서라고 하는 차를 타고 절을 오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이정지가 도착했다. 덩치가 큰 그를 본 맹공은 아들들에게 이정지를 극찬하였다고 한다.
내가 만난 사람이 많은데 이정지 같은 사람이 없다. 그의 명성은 장차 나를 능가할 것이다.
가사도는 경호 지역을 수비하였고, 이정지는 처음에 제조사참의(制治司參議)를 맡았으나, 나중에 진수로 이주하여 양회를 수비하고, 가사도와 함께 청하의 다섯 하구에 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고, 회남봉수대 120곳을 증설하였다. 이어 호주 지주를 맡았고, 형산에 회남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 도절(都節)은 급소를 찔렀고, 개경 원년(1259년)에는 가사도가 경호선무사를 지냈으며, 이정지가 양주(揚州)에 남아 잠시 지주로 있었다. 얼마 후 대병이 파촉 일대에서 파촉 장강의 출구를 방어하기 위해 협주 지주를 요청했기 때문이다.[2] 조정에서는 조여정을 회남제치사로, 이응경은 참의관으로 임명하였다.이응경이 양로병을 지휘하여 남성에 주둔하였는데, 대서에 목말라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몽장 이단은 그가 모략이 없는 것을 관찰하여 연수삼성을 공격하고, 회하를 건너 남성을 공격하였다. 악주군은 포위를 풀고[3], 이정지는 모친상을 당해 사직했다. 조정에서 양주 수비 장수를 뽑자는 논의가 오갔고, 송이종은 이정지와 비교가 안 된다고 하면어 이를 거절했다. 그리하여 양회제를 주관하고 사무를 처리하게 된다. 이정지는 또 이단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수하 장수를 죽이고 남성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경정 원년(서기 1260년) 이정지는 교촌에서 이단을 물리치고 동해, 석포 등 성읍을 함락하였다. 경정 3년(서기 1262년), 이단은 투항하여 삼성으로 이주하던 민중들이 통주(通州)와 태주(泰州) 사이에 이르렀다. 또 치현을 쳐서 수장을 죽였다.
경정 원년(서기 1260년) 이정지는 교촌에서 이단을 물리치고 동해, 석포 등 성읍을 함락하였다. 경정 3년(서기 1262년), 이단은 투항하여 삼성으로 이주하던 민중들이 통주(通州)와 태주(泰州) 사이에 이르렀다. 또 치현을 쳐서 수장을 죽였다.
이정지가 양주로 처음 왔을 때 양주는 수해를 입어 가옥이 모두 불에 탔다. 양주는 소금업에 의존해 이익을 얻었지만, 제염정 농가는 대부분 도망가 공사 소금업이 모두 부진했다. 이정지는 민중에게 진 빚을 모두 빌려주고 돈을 빌려 집을 수리해줬으며, 집을 지은 뒤에는 빌린 돈을 탕감해 주는 등 1년간 관청 민가를 모두 수리했다.운하 40리를 굴착해 금사·여경염장까지 운송비를 아끼고 있다.아울러 다른 운하를 준설하여 정자 가구에 200여만 원의 음염을 방류하였다. 소금 생산업자들은 차량 운송의 노고가 없고, 소금의 빚도 탕감해 주고, 도망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자 소금업이 번창했다고 한다. 처음에 평산당은 양주성을 굽어볼 수 있었고, 원병들이 도착하면 망루를 만들어 그 위에 노를 치고 성을 쏘았다. 이정지는 이에 높은 성벽을 쌓고 변경 이남의 유민 2만여 명을 모집하여 성 안의 인구를 충실하게 하고 무예군으로 조명했다.
또 학교를 건설하여 《시》와 《서》를 가르치고, 도마콩을 만들어 사대부들과 함께 습사의 예를 수행하였다. 군에서 수해와 가뭄이 들면 창고를 열라고 명령하고, 창고가 부족하면 사재를 털어 이재민을 구제하였다. 양주의 백성들은 대덕에 감사하고, 그것을 부모처럼 존경한다. 유찬이 회남에서 상경해 입조하고, 이종이 그에게 회남 지역의 상황에 대해 묻자, 유찬은 이정지가 다스리고 있는 회남 지역을 고평가하였다.
또 학교를 건설하여 《시》와 《서》를 가르치고, 도마콩을 만들어 사대부들과 함께 습사의 예를 수행하였다. 군에서 수해와 가뭄이 들면 창고를 열라고 명령하고, 창고가 부족하면 사재를 털어 이재민을 구제하였다. 양주의 백성들은 대덕에 감사하고, 그것을 부모처럼 존경한다. 유찬이 회남에서 상경해 입조하고, 이종이 그에게 회남 지역의 상황에 대해 묻자, 유찬은 이정지가 다스리고 있는 회남 지역을 고평가하였다.
함순 5년(1269년) 몽골군이 양양을 포위 공격하여 전쟁이 급박하게 되자 하귀는 양양을 지원하였으나 호미주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어 범문호가 각 길의 군사를 모아 다시 양양을 증원하여 패하여 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고 많은 사졸이 한수에 빠져 익사하였다. 겨울에 조정에 의해 경호제치대사로 임명되어 양양에 파견되었다. 범문호는 이정지가 양양에 간다는 말을 듣고 가사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장병 수만 명이 양양에 들어와 일전을 벌이고 있지만, 부디 경내[4]의 명을 따르지 않고 일이 성사되면 은상이 될 것이옵니다.
가사도는 이에 범문호를 복주관찰사로 임명했고, 그 군대는 그가 통솔했다. 범문호는 매일 예쁜 첩을 거느리고 술을 마시며 오락을 즐겼다.이정지가 여러 차례 출병을 희망하자 범문호는 조서가 내리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았다. 이듬해 6월 한수가 범람하자 범문호는 마지못해 출병을 명령했고, 군대는 녹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중도에 도주했다. 이후 유정을 이간계로 제거하려 하나, 실패한다. 그 뒤 여러 차례 그 자리를 대신 달라고 직접 아뢰었고 결재를 하지 않아 결국 양양을 잃었다. 진의중이 범문호를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는데, 가사도는 그를 두둔하고 범문호를 안경부지부로 한 계급 강등시켰고[5], 이정지와 부장인 소유의와 범우신은 광남으로 좌천되었다. 이정지는 파직되어 경구에서 살았다.
얼마 후 원나라군이 양주를 포위 공격하여 제치사 인응뢰가 폭사하자 이정지를 양회제치사로 기용하였다. 이정지는 회남을 동서로 나눠 하귀에게 회서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회남 동로를 수비하는 데 전념했다.
함순 10년(서기 1274년), 청하구를 축조하고 청하군으로 조명했다. 12월에 원군이 악주를 공격하고, 송도종이 천하의 군대에 근왕을 명령하자, 이정지는 먼저 군대를 파견하여 명령을 이행했다.
덕우 원년(서기 1275년) 봄, 가사도가 무호에서 대패하고[6], 장강 각 주의 장수를 따라 내려오거나 도망치는 데 누구도 지켜낼 수 없었다. 이정지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군현읍을 지켰다. 이호가 양주에서 투항하자 이정지는 이호를 죽이고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총제 장준은 출전하여 맹지진의 책을 들고 투항을 불렀고, 이정지는 또 그 책을 불태워 장준 등 다섯 사람의 머리를 베어 시중을 들었다. 그 다음에 다시 남쪽에서 모가 되어 싸우고, 허문덕은 북쪽에서, 강재는 성에서 충성을 다해 수비에 임했다. 그는 황금과 비단, 소고기와 막걸리를 꺼내 놓고 군사를 위로하는 등 사투를 벌였다. 조정에서도 독부의 금은으로 사졸을 위로하고, 이정지를 참지정사로 승격시켰다. 7월에 지추밀원사(知秋密院事)로 입조하여, 하귀는 양주지주로 임명되나, 하귀는 양주(揚州)에 오지 않아 일을 그만두었다.[7]
1275년 10월, 바얀이 임안으로 들어가자, 아술은 회남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진강에 주둔하였다.아술이 양주를 공격하여 오랫동안 함락하지 못하자, 오랫동안 양주를 포위하였다. 겨울에는 성 안의 음식을 다 먹고 죽은 사람들로 거리에 가득하였다. 이듬해 2월, 기근이 더욱 심해져 호수로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매일 몇 백 명씩 길을 가다가 죽은 사람이 있어, 모두들 앞다투어 그의 고기를 베어먹었다. 송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영국공이 사태후의 조서로 항복을 권하자 이정지는 성벽에 올라 조서를 받들어 성을 지키며 항복하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국공이 이에 반문했으나, 이정지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노를 쏘라고 명령해 한 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물러났다. 강재는 출병하여 궁을 탈환하려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고 또 성문을 닫고 수비하였다. 3월에 하귀가 회서를 들어 원에 투항하자 아술은 양주성 아래로 항복해 깃발을 들게 하고 막객 중 말로 이정지를 시험하자 이정지는 항복을 거부했다. 아술의 사자가 조서를 들고 항복을 요청하자, 이정지는 사자를 죽이고 성벽 위에 조서를 올려 태우고 그 뒤 허문덕, 장사총, 유흥조가 모두 식량이 소진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정지는 또 민간의 곡식을 수거해 군대에 공급했고, 그걸 다 먹고 나면 관원들에게 조를 내도록 했으며, 장교들에게 조를 내도록 하고, 소가죽과 밀기울 귀뚜라미를 함께 먹도록 했으며, 병사들은 자신의 아들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고, 매일 고전을 거듭했다.
함순 10년(서기 1274년), 청하구를 축조하고 청하군으로 조명했다. 12월에 원군이 악주를 공격하고, 송도종이 천하의 군대에 근왕을 명령하자, 이정지는 먼저 군대를 파견하여 명령을 이행했다.
덕우 원년(서기 1275년) 봄, 가사도가 무호에서 대패하고[6], 장강 각 주의 장수를 따라 내려오거나 도망치는 데 누구도 지켜낼 수 없었다. 이정지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군현읍을 지켰다. 이호가 양주에서 투항하자 이정지는 이호를 죽이고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총제 장준은 출전하여 맹지진의 책을 들고 투항을 불렀고, 이정지는 또 그 책을 불태워 장준 등 다섯 사람의 머리를 베어 시중을 들었다. 그 다음에 다시 남쪽에서 모가 되어 싸우고, 허문덕은 북쪽에서, 강재는 성에서 충성을 다해 수비에 임했다. 그는 황금과 비단, 소고기와 막걸리를 꺼내 놓고 군사를 위로하는 등 사투를 벌였다. 조정에서도 독부의 금은으로 사졸을 위로하고, 이정지를 참지정사로 승격시켰다. 7월에 지추밀원사(知秋密院事)로 입조하여, 하귀는 양주지주로 임명되나, 하귀는 양주(揚州)에 오지 않아 일을 그만두었다.[7]
1275년 10월, 바얀이 임안으로 들어가자, 아술은 회남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진강에 주둔하였다.아술이 양주를 공격하여 오랫동안 함락하지 못하자, 오랫동안 양주를 포위하였다. 겨울에는 성 안의 음식을 다 먹고 죽은 사람들로 거리에 가득하였다. 이듬해 2월, 기근이 더욱 심해져 호수로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매일 몇 백 명씩 길을 가다가 죽은 사람이 있어, 모두들 앞다투어 그의 고기를 베어먹었다. 송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영국공이 사태후의 조서로 항복을 권하자 이정지는 성벽에 올라 조서를 받들어 성을 지키며 항복하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국공이 이에 반문했으나, 이정지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노를 쏘라고 명령해 한 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물러났다. 강재는 출병하여 궁을 탈환하려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고 또 성문을 닫고 수비하였다. 3월에 하귀가 회서를 들어 원에 투항하자 아술은 양주성 아래로 항복해 깃발을 들게 하고 막객 중 말로 이정지를 시험하자 이정지는 항복을 거부했다. 아술의 사자가 조서를 들고 항복을 요청하자, 이정지는 사자를 죽이고 성벽 위에 조서를 올려 태우고 그 뒤 허문덕, 장사총, 유흥조가 모두 식량이 소진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정지는 또 민간의 곡식을 수거해 군대에 공급했고, 그걸 다 먹고 나면 관원들에게 조를 내도록 했으며, 장교들에게 조를 내도록 하고, 소가죽과 밀기울 귀뚜라미를 함께 먹도록 했으며, 병사들은 자신의 아들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고, 매일 고전을 거듭했다.
덕우 2년(서기 1276년) 7월, 아술은 이정지가 조명을 불태운 죄에 대해 사면을 구하고 투항하라고 요구하자 이정지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익왕은 소보(少保)·좌승상(左僧相)으로 사자를 보내 이정지를 불러들였고, 이정지는 주환(朱煥)[8]을 양주(揚州)에 머물게 하고 강재와 함께 7천 명을 동진시켜 태주로 가서 아술(阿術)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였다. 주환은 원에 투항하여 이정지의 군사이자 처자녀를 태주성 아래로 몰아냈고, 부장인 손귀·호유효 등이 문을 열고 투항하였다. 이정지는 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연못으로 뛰어들어 자결하려 했으나 물이 얕아 익사하지 않았다. 양주가 함락되자 아술에게 끌려왔는데, 아술이 할말이 있는지 묻자, 주환이 모든 화는 이정지와 강재가 자초한 거라 말하였고, 결국 죽게 되었다.
이정지와 강재가 처형당한 날, 양주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이정지와 강재가 처형당한 날, 양주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1] 맹공이 죽기 한 해 전 맹공은 가사도를 자기 후임 경호제치사로 추천했다. 맹공은 그를 가사도에게 추천하였고, 이정지는 고마운 마음에 그의 관을 부축하여 흥국현에 묻은 후 관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3년간 복상하였다.[2] 몽케 칸의 군대와 왕견의 군대가 조어성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3] 쿠빌라이는 대칸의 직위를 차지하기 위해 가사도와 문제의 화약을 체결하고 북상하였다.[4] 경호제치사 이정지를 의미[5] 범문호는 이후 원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안경부에서 싸우지도 않고 투항했다.[6] 몽골군이 송군을 신무기로 공격하고 심리전으로 송군을 혼란시키지만 강재가 군을 수습하고 싸우는 와중, 손호신이 자신의 애첩을 이끌고 도망치는 바람에 송군이 보수가 도망친다고 외치면서 송군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어 하귀의 군대도 회서로 도망치고, 가사도는 군을 수습하려고 하나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가사도도 양주 지역으로 도주하여 패잔병들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병사들에게 비아냥과 욕설을 듣는 등 무시당하고 말았다. 정가주 전투 뒤 가사도는 천도를 주장하나 파직당하고 유배되는 와중 정호신에게 살해당하고, 손호신은 장세걸과 함께 몽골군에 맞서 싸우다 죽었으며, 나중에도 나오듯 하귀는 원에 투항하고 만다.[7] 이 당시 하귀는 전의를 상실했고, 은연중에 원에 투항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8] 손오의 용장 주환과 동명이인이다.[9] 학경이 남송의 밀약 이행을 요구하러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학경이 억류된 장소는 양회제치대사가 관할하고 있는 진주였기 때문에, 학경은 실질적으로 이정지에게 억류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