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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虞允文, 1110~1174
남송 초기 명재상. 자는 빈보(嬪父)[1] 또는 빈보(嬪甫)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금군의 침공을 간파하였고, 1161년 채석기에서 금군을 격파한다. 송효종 시기 융흥북벌 실패 이후 다른 신료들이 북벌을 접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해 섬서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북벌을 주장하나, 조정으로 소환된 이후 다시 사천 지역으로 파견되어 북벌을 준비하던 와중 과로로 병사한다. 시호는 충숙(忠肅).
남송 초기 명재상. 자는 빈보(嬪父)[1] 또는 빈보(嬪甫)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금군의 침공을 간파하였고, 1161년 채석기에서 금군을 격파한다. 송효종 시기 융흥북벌 실패 이후 다른 신료들이 북벌을 접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해 섬서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북벌을 주장하나, 조정으로 소환된 이후 다시 사천 지역으로 파견되어 북벌을 준비하던 와중 과로로 병사한다. 시호는 충숙(忠肅).
1110년 출생으로, 융주 인수현[2] 출신이다. 당나라의 명신 우세남의 후손이다. 어릴 때 총명하여 일곱 살 때 붓을 들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의 연줄로 벼슬길에 오른다. 어머니 별세 후 우윤문은 극도로 슬퍼했다. 그는 아버지가 혈혈단신인 데다 병을 앓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7년 동안 전근을 하지 않다가 아버지 별세 후에야 다시 공명에 뛰어든다.
1154년 과거에 응시하여 중진사에 급제한다. 이후 팽주통판에 임명되었고 권지려주, 거주로 바뀐다. 이때는 진회가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라 사천 출신 사람들은 중용되지 못하였다. 1155년 진회 사후 등용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송 고종은 사천 출신의 인물들을 중용하려 하였고, 중서사인 조규에 의해 천거되어 부름을 받는다.
우윤문은 송 고종을 보자 먼저 인군은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달래며 조상의 성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둘째는 당시 사대부 풍조의 병폐를 논하여 문장, 언담, 정사로 이들 선비를 뽑을 때 그 중 경박함, 교위, 가혹한 자를 각각 제거해야만 선발된 관리 임중치원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마지막으로 사천재부과의 병폐를 진술한다. 송 고종은 말을 듣고 흔쾌히 받아들인 뒤 비서승으로 제수되어 예부낭관에 임명된다.
이 당시 금은 해릉양왕이 제위에 있었다. 해릉양왕은 수도를 상경회령부에서 연경으로 천도한 뒤, 변량을 증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송을 침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송 정권에서 보낸 사신인 왕륜은 금 정권을 가리켜 공손하고 화목하다고 하였고, 승상 탕사퇴도 마찬가지로 오직 화의만을 주장한다. 그 뒤 해릉양왕의 의도가 드러나자 우윤문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1154년 과거에 응시하여 중진사에 급제한다. 이후 팽주통판에 임명되었고 권지려주, 거주로 바뀐다. 이때는 진회가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라 사천 출신 사람들은 중용되지 못하였다. 1155년 진회 사후 등용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송 고종은 사천 출신의 인물들을 중용하려 하였고, 중서사인 조규에 의해 천거되어 부름을 받는다.
우윤문은 송 고종을 보자 먼저 인군은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달래며 조상의 성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둘째는 당시 사대부 풍조의 병폐를 논하여 문장, 언담, 정사로 이들 선비를 뽑을 때 그 중 경박함, 교위, 가혹한 자를 각각 제거해야만 선발된 관리 임중치원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마지막으로 사천재부과의 병폐를 진술한다. 송 고종은 말을 듣고 흔쾌히 받아들인 뒤 비서승으로 제수되어 예부낭관에 임명된다.
이 당시 금은 해릉양왕이 제위에 있었다. 해릉양왕은 수도를 상경회령부에서 연경으로 천도한 뒤, 변량을 증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송을 침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송 정권에서 보낸 사신인 왕륜은 금 정권을 가리켜 공손하고 화목하다고 하였고, 승상 탕사퇴도 마찬가지로 오직 화의만을 주장한다. 그 뒤 해릉양왕의 의도가 드러나자 우윤문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금인은 반드시 동맹을 깨뜨릴 것입니다. 오로에 출병한 뒤 중신에게 명령을 내려 비어지책을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1160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해릉양왕이 변경[3]으로 천도하여 변경을 수리하고, 전선을 만드는 것과 변경으로 곡식과 마초를 수송하는 것을 본 이후 귀국하여 금군의 침공을 간파한 뒤 회해 연변의 방어를 강화할 것을 주장하지만 기각당하고 만다.[4]
그 후 우윤문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직학사원(直學士院)에 임명된다. 당시 삼아관군(최고장관)은 환관이 맡았는데, 우윤문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예로부터 인주의 권력이 간신에게 넘어가지 않으면 친수행신에게 넘어간다고 합니다. 진회가 권력을 훔치던 18년, 진회가 죽은 후에야 대권은 폐하께 돌아왔습니다. 근래에 삼아 장관이 중관(환관)을 교제하고 선화(宣和)와 명수(明受)의 거울[5]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송 고종은 이를 깨닫고 즉시 금지한다.
1161년 우윤문의 예측대로 해릉양왕이 남침하였고, 이에 양회 지역의 송군이 궤멸하였다.[6] 우윤문은 이때 엽의문의 참모로 활동했는데, 엽의문과 이현충[7]은 겁에 질려 전선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우윤문은 채석기에서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1161년 우윤문의 예측대로 해릉양왕이 남침하였고, 이에 양회 지역의 송군이 궤멸하였다.[6] 우윤문은 이때 엽의문의 참모로 활동했는데, 엽의문과 이현충[7]은 겁에 질려 전선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우윤문은 채석기에서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금군이 도강에 성공한다면 너희들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느냐? 우리 군이 장강을 장악하고 있는데 장강의 험준함을 빌미로 한다면 어찌 죽을 고비를 못 하겠는가. 하물며 조정에서 30년 동안 병사를 양성했는데 왜 그대들은 적과 싸워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병사들을 단결시키는 데 성공했고 군심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는 즉시 산재해 있는 강변 곳곳의 통할할 수 없는 군대를 신속하게 통합하고, 해릉양왕이 이끄는 군대가 공격해 오자 이에 맞서 우윤문의 군대가 금군에게 화약 무기를 난사해 금군을 공격하고, 부장 시준이 금군을 격파하는 등 해릉양왕이 이끄는 군대는 채석기[8]에서 대패한다(채석기 전투). 이후 완안량이 이끄는 군대는 양주로 이동하였고, 우윤문은 이에 맞서 진강으로 이동했다. 그 뒤 다른 지역에서의 군대가 남송군에게 가로막히고,[9] 이보가 이끄는 해군이 산동 지역에서 금의 해군을 격파하고 또 호북 지역의 수군이 장강 하류로 지원을 오는 등 금군의 상황이 불리해졌다. 그럼에도 해릉양왕은 병사들에게 사흘 안에 장강을 넘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고 금나라의 내부 갈등이 격화되고 말았다. 이에 야율원의가 반란을 일으켜 해릉양왕을 참살한다.[10]
금군은 30리를 후퇴하고 사절을 보내 화해를 논하였다. 채석기 전투 후 우윤문은 남송의 조야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채석기 전투 승리 뒤 송고종이 건강부에 도착한 후 북벌을 더욱 강력히 주장하였고, 사천 지역에서 오린과 함께 섬서 지역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송효종 시기 융흥북벌 실패 후 사호와 탕사퇴를 비롯한 신료들이 북벌을 접고 섬서 지역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윤문은 섬서 지역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북벌을 주장했다.[11]
이후 임안으로 소환되었고, 이후 상서우복사(尙書右僕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겸 추밀사(樞密使), 제국용사(制國用使)로 승진한다.
다시 사천 지역으로 파견되어 북벌을 준비하나, 피로가 누적되어 1174년 사망한다.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경원 원년(1195년), 영종 시기 태사로 추증된다.
[1] 父는 아비란 뜻도 있지만 사내의 칭호란 뜻도 있는데 이때는 보로 읽는다.[2] 오늘날 사천성 미산시[3] 카이펑 시[4] 이때 남송 조정은 금군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어 낙관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고 한다.[5] 송 휘종 시기 동관의 군권 장악, 양사성난정, 그리고 송 고종 즉위 초기의 묘유병변을 의미한다.[6] 회하 유역을 지키던 왕권이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다.[7] 남송 초기 항금명장으로, 초명은 이세보이다. 송 효종 시기인 융흥북벌 시기에 활동한다.[8] 오늘날 안후이성 지역. 이백이 빠져 죽었다는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9] 위승이 이끄는 군대가 완안량의 금군을 가로막았다.[10] 해릉양왕은 죽기 전 완안옹을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11] 사호를 위시한 신료들은 주화파였고, 우윤문을 위시한 무장들은 주전파였다.[12] 왕십붕은 당대의 재상이었던 누사덕을 흠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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