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두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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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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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에 거주하던 당시 36세였던 김순금은 남편 서모(당시 43세)씨가 성불구가 되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하지 못하게 되자 대한교과서 사원이었던 유장수(당시 40세)와 1969년께부터 내연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데 내연남 유 씨가 장금순(당시 36세)이라는 여관 종업원과 또다른 내연관계를 맺자 이에 앙심을 품어 왔다.
1970년 5월 30일 오전 11시 경 김순금은 유장수와 장금순을 상대로 담판을 짓기 위해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소재 유장수의 집 앞으로 갔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유장수의 딸 혜금 양과 장금순의 딸 서혜자 양이 놀고 있었다. 그들의 아이들을 본 김순금은 그들과 직접 담판을 짓는 대신 어린이들을 죽임으로써 보복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유혜금 양과 서혜자 양에게 "사탕을 사주고 차를 태워준다"고 유인하여 시내버스로 도봉동 서낭당 주차장까지 데려갔다. 김순금은 근방 가게에서 아이들에게 빵과 주스를 사먹이고 약국에서 진통제 40알을 사들고 아이들을 버스편으로 의정부를 거쳐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 새논골로 유인하여 그곳에서 포도당 드링크에 진통제를 타 나누어 먹였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해 아이들이 신음하자 김순금은 당황하여 아이들을 업고 웅덩이로 내려가 고무신짝에 물을 담아 입에 떠 넣었으나 둘 다 반응이 없고 끝내 숨이 넘어가자 웅덩이에 아이들의 시신을 그대로 넣어 버리고 도망친 후 버스를 타고 서울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피해자인 아이들의 시신이 다음 날 발견되었고 경찰은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김순금을 용의자로 지목해 다음 날인 31일 검거하였다. 처음에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김순금은 6월 3일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아이들의 유류품이 발견되면서 미성년자약취유인 및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1970년 5월 30일 오전 11시 경 김순금은 유장수와 장금순을 상대로 담판을 짓기 위해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소재 유장수의 집 앞으로 갔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유장수의 딸 혜금 양과 장금순의 딸 서혜자 양이 놀고 있었다. 그들의 아이들을 본 김순금은 그들과 직접 담판을 짓는 대신 어린이들을 죽임으로써 보복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유혜금 양과 서혜자 양에게 "사탕을 사주고 차를 태워준다"고 유인하여 시내버스로 도봉동 서낭당 주차장까지 데려갔다. 김순금은 근방 가게에서 아이들에게 빵과 주스를 사먹이고 약국에서 진통제 40알을 사들고 아이들을 버스편으로 의정부를 거쳐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 새논골로 유인하여 그곳에서 포도당 드링크에 진통제를 타 나누어 먹였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해 아이들이 신음하자 김순금은 당황하여 아이들을 업고 웅덩이로 내려가 고무신짝에 물을 담아 입에 떠 넣었으나 둘 다 반응이 없고 끝내 숨이 넘어가자 웅덩이에 아이들의 시신을 그대로 넣어 버리고 도망친 후 버스를 타고 서울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피해자인 아이들의 시신이 다음 날 발견되었고 경찰은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김순금을 용의자로 지목해 다음 날인 31일 검거하였다. 처음에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김순금은 6월 3일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아이들의 유류품이 발견되면서 미성년자약취유인 및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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