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범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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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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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16일 오후 6시 20분경, 정부 직할 부산시 서구 하단동[2]의 에덴공원에 산책을 왔던 한창수(당시 43세)는 에덴공원 산꼭대기에 있는 변소에 들렀다가 국교생으로 추정되는 소년의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시신의 신원은 당시 동광국민학교[3] 5학년생 김상범 군(당시 12세)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 군은 영도구에 살았지만 중구에 위치한 동광국민학교에 다녔으며 4월 15일 오전 8시 5분경 여느날과 같이 학교를 다녀오겠다고 나간 뒤 실종된 상태였다.
▲김상범 군.
김 군의 시체는 변소의 가장 첫번째 칸에서 머리와 왼쪽 다리를 변기에 걸친 채로 발견되었으며 주변에는 핏자국이 떨어져 있었다. 범인은 김 군의 오른쪽 목에 3cm쯤 되는 예기를 찔러넣고 나일론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핏자국은 이 때 목에 상흔이 생긴 김 군이 흘린 것으로 추정되었다.[4]
시신의 신원은 당시 동광국민학교[3] 5학년생 김상범 군(당시 12세)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 군은 영도구에 살았지만 중구에 위치한 동광국민학교에 다녔으며 4월 15일 오전 8시 5분경 여느날과 같이 학교를 다녀오겠다고 나간 뒤 실종된 상태였다.
▲김상범 군.
김 군의 시체는 변소의 가장 첫번째 칸에서 머리와 왼쪽 다리를 변기에 걸친 채로 발견되었으며 주변에는 핏자국이 떨어져 있었다. 범인은 김 군의 오른쪽 목에 3cm쯤 되는 예기를 찔러넣고 나일론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핏자국은 이 때 목에 상흔이 생긴 김 군이 흘린 것으로 추정되었다.[4]
김 군의 시신이 발견된 다음날 이뤄진 부검의의 부검 결과 김 군은 4월 15일 오전 9시 30분~10시경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다. 이 시각은 당일 방공훈련을 진행하던 시각과 완벽히 맞아 떨어졌는데 경찰은 이를 토대로 범인이 타인의 눈이 다른곳에 팔려있는 시간을 틈타 김 군을 유괴한 뒤 훈련이 진행되는 시간동안 살해까지 초단시간에 끝마쳤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김 군이 실종된 배경에도 주목했다. 김 군은 당시 서구의 에덴공원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김 군의 등교 동선 중 가장 가까운 곳과 비교해도 직선거리로만 5-6km가 되는 곳으로 김 군이 등교길을 이탈해 이렇게나 멀리 위치한 에덴공원까지 자의로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음에 가까웠다. 아마도 살인은 등교길과 근거리에서 이뤄졌으며 범인이 시신 유기만 에덴공원에서 자행했거나 혹은 김 군이 무력을 사용한 범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을 가능성을 점쳤다.
사망 추정 시각에서도 이상함이 많았다. 김 군은 오전 8시 5분에 학교를 간다며 집을 나갔고 사망 추정 시각은 이미 1교시 수업 시작이 한참 지난 오전 9시~10경이었다. 그래서 일부 경찰과 뉴스를 접한 시민들은 김 군이 등교하던 중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범인의 꾀임에 넘어가 등교를 포기, 등교길을 이탈했다가 변을 당한 것 아니냐는 추정을 했다.
그러나 김 군이 땡땡이를 자주 쳤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김 군은 반에서 성적으로 2등을 차지하던 우수한 학생이었고[5] 지도위원을 맡았을 만큼 모범적인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건이 일어난 날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개근상까지 받았을 만큼 성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김 군이 실종된 배경에도 주목했다. 김 군은 당시 서구의 에덴공원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김 군의 등교 동선 중 가장 가까운 곳과 비교해도 직선거리로만 5-6km가 되는 곳으로 김 군이 등교길을 이탈해 이렇게나 멀리 위치한 에덴공원까지 자의로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음에 가까웠다. 아마도 살인은 등교길과 근거리에서 이뤄졌으며 범인이 시신 유기만 에덴공원에서 자행했거나 혹은 김 군이 무력을 사용한 범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을 가능성을 점쳤다.
사망 추정 시각에서도 이상함이 많았다. 김 군은 오전 8시 5분에 학교를 간다며 집을 나갔고 사망 추정 시각은 이미 1교시 수업 시작이 한참 지난 오전 9시~10경이었다. 그래서 일부 경찰과 뉴스를 접한 시민들은 김 군이 등교하던 중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범인의 꾀임에 넘어가 등교를 포기, 등교길을 이탈했다가 변을 당한 것 아니냐는 추정을 했다.
그러나 김 군이 땡땡이를 자주 쳤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김 군은 반에서 성적으로 2등을 차지하던 우수한 학생이었고[5] 지도위원을 맡았을 만큼 모범적인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건이 일어난 날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개근상까지 받았을 만큼 성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다할 목격자도 용의자도 없던 와중 처음으로 유력한 제보가 들어왔는데 바로 김 군이 살해된 채 발견된 에덴공원 입구부근에서 매점을 하고있는 엄종배(당시 38세)의 목격담이었다. 김 군이 실종된 당일인 4월 15일 오전 11시경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회색 잠바에 청색 바지 착의의 30대 중후반 추정 남성이 김 군으로 추정되는 소년과 매점에 들러 라면튀김을 구매했고 이후 공원 변소쪽으로 같이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6]
이후 2번째 유력한 제보가 들어왔는데 이는 1번째 목격담을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당시 에덴공원 근처에는 삼미식품이라는 식재료 상점이 있었는데 그곳의 여종업원인 윤모 양(당시 23세)등 에덴공원 변소를 사용한 몇명이 4월 15일 오후 3시경까지 에덴공원의 변소에서 일을 보았을 때는 첫번째 칸은 물론이고 4개의 칸 어디에서도 김 군의 시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즉 앞선 매점 주인의 증언대로라면 오전 11시경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소년을 데리고 변소로 향한것은 그 시각 즈음 변소에서 살인 및 유기가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 가능했으나 그로부터 4시간이나 지난 3시경에도 김 군의 시체가 없었다는 것은 에덴공원이 살인이 일어난 장소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결국 수사는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고 김 군이 유기된 추정 시각이 15일 오후 3시부터 발견 시점인 다음날 오후 6시까지라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었지만 수사 권역이 너무 넓어져 살인이 일어난 장소가 어딘지를 추정하지 못해 경찰은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이후 2번째 유력한 제보가 들어왔는데 이는 1번째 목격담을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당시 에덴공원 근처에는 삼미식품이라는 식재료 상점이 있었는데 그곳의 여종업원인 윤모 양(당시 23세)등 에덴공원 변소를 사용한 몇명이 4월 15일 오후 3시경까지 에덴공원의 변소에서 일을 보았을 때는 첫번째 칸은 물론이고 4개의 칸 어디에서도 김 군의 시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즉 앞선 매점 주인의 증언대로라면 오전 11시경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소년을 데리고 변소로 향한것은 그 시각 즈음 변소에서 살인 및 유기가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 가능했으나 그로부터 4시간이나 지난 3시경에도 김 군의 시체가 없었다는 것은 에덴공원이 살인이 일어난 장소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결국 수사는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고 김 군이 유기된 추정 시각이 15일 오후 3시부터 발견 시점인 다음날 오후 6시까지라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었지만 수사 권역이 너무 넓어져 살인이 일어난 장소가 어딘지를 추정하지 못해 경찰은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경찰은 수집된 정황과 목격담을 토대로 김 군을 유괴해 살해한 인물이 김 군과 서로 잘 아는 면식범이었을 것으로 추리했고, 김 군의 아버지인 김덕겸(당시 46세)이 부산 중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소기업체 덕일합성수지의 사장이었기 때문에 이 회사에 근무했거나 관련된 사람 중 김 사장에게 앙심을 품을만한 인물을 물색하였다.
그 결과 유력한 용의자로 김덕겸과 김 군의 먼 친척인 유 모(당시 25세)를 지목하여 검거하였는데, 유 모는 김씨네 부자의 집에서 7년간 각종 잡일을 하던 사람이었으며 김 씨외 사이가 나빠져 그만 둔 뒤 현재는 인천에서 유조선 선원으로 취직해 승선을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경찰은 유 모를 경찰서로 연행해 며칠 간 강도높은 조사를 벌였으나 알리바이가 성립해 풀어줬다.
4월 27일에는 이 사건과 김 군의 부고를 접한 동광국민학교 급우들이 김 군을 죽인 범인의 수사에 보태달라며 자의로 20여만원을 모아 경찰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경찰은 이후에도 범인에 대한 현상금으로 1백만원을 걸고 착의가 비슷한 여러 명을 용의선상에 올리는 등 수사에 열을 올렸으나 뚜렷한 범인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당해 말 수사본부가 해체, 1989년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 결과 유력한 용의자로 김덕겸과 김 군의 먼 친척인 유 모(당시 25세)를 지목하여 검거하였는데, 유 모는 김씨네 부자의 집에서 7년간 각종 잡일을 하던 사람이었으며 김 씨외 사이가 나빠져 그만 둔 뒤 현재는 인천에서 유조선 선원으로 취직해 승선을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경찰은 유 모를 경찰서로 연행해 며칠 간 강도높은 조사를 벌였으나 알리바이가 성립해 풀어줬다.
4월 27일에는 이 사건과 김 군의 부고를 접한 동광국민학교 급우들이 김 군을 죽인 범인의 수사에 보태달라며 자의로 20여만원을 모아 경찰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경찰은 이후에도 범인에 대한 현상금으로 1백만원을 걸고 착의가 비슷한 여러 명을 용의선상에 올리는 등 수사에 열을 올렸으나 뚜렷한 범인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당해 말 수사본부가 해체, 1989년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이 사건은 피해자인 김 군의 실종 추정 지점인 중구 대청동1가부터 서구 에덴공원까지의 굉장히 긴 거리를 생각했을 때 동선 상 목격자가 많을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경찰이 사건 초반부터 에덴공원을 살인이 일어난 장소라고 특정짓고 수사를 시작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사건이다. 또한 피해자의 부모인 김 씨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경찰 측에 더욱 큰 어려움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하다.[7]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3일 뒤인 4월 18일 서울에서도 김대현 군(당시 6세)이 유괴된 후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남성으로부터 16차례 괴편지와 50만원을 요구하는 협박 전화가 걸려오면서 전국 일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동년 9월 4일에도 이종찬(당시 5세)군이 유괴된 이후 20만원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두 사건 다 유괴된 어린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시체조차 찾지 못한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다.[8]
1967년에도 순천에서 이상범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유괴되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으나 이 사건의 범인은 잡혀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3일 뒤인 4월 18일 서울에서도 김대현 군(당시 6세)이 유괴된 후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남성으로부터 16차례 괴편지와 50만원을 요구하는 협박 전화가 걸려오면서 전국 일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동년 9월 4일에도 이종찬(당시 5세)군이 유괴된 이후 20만원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두 사건 다 유괴된 어린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시체조차 찾지 못한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다.[8]
1967년에도 순천에서 이상범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유괴되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으나 이 사건의 범인은 잡혀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 1965년생[2] 1983년 사하구 설치와 함께 사하구로 분리.[3] 1998년 제53회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 지금의 용두산공원 공영주차장 터에 있었다.[4] 예기를 사용하다가 손에 상처를 남긴 범인의 피였을수도 있었겠지만 당시는 혈흔을 통한 DNA대조라는 개념 자체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이라 그냥 그렇게 추정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채취한 혈흔의 혈액형은 AB형으로 김 군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그러나 워낙 변소라는 곳이 오염의 산실이기도 하고 당시의 기술력 한계상 검사가 잘못 나왔을 수도 있어서 지금에 와선 아무도 모른다.[5] 당시 국민학교는 반 하나에 60명이 기본이었다. 60명 중에 2등이라면 전교에서 가히 상위권이라고 할 만하다.[6] 실제로 부검당시 김 군의 위장속에는 라면사리가 조각난채 발견 되었고 이것이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만약 후술할 추가 증언을 배제한다면 매점 주인이 본 소년이 김 군이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7] 피해자의 아버지인 김 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여직원과 외도를 한 것 때문에 아내와의 부부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으며 실제로 이 여직원은 김 군 살해 용의점이 있는 인물로 수사까지 받았다. 아버지인 김 씨는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가 있음에도 끝까지 경찰에게 묵비권으로 응했다.[8] 이종찬 군 유괴 사건은 돈을 요구하는 협박편지가 두 차례 보내져왔는데 모두 서울 성동우체국 소인이 찍혀있었으며 어이없게도 두 번째 협박편지에서 요구하는 금액을 깎아주거나 필체 감정을 의식하지 않는 듯 편지를 길게 써서 보낸 것 등 범행이 허술한 것으로 보아 범인 혹은 범인들이 초범일 가능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필체를 너무나 또박또박 바르게 쓴 탓에 수사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으며 금품을 주고받기로 한 약속장소에 나타나지를 않아서 범인에 대한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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