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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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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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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아 왕조
아비도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9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9세
Ptolemy IX Soter
PtolemyIX-Statue...
이름
프톨레마이오스 9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출생
기원전 143/2년
사망
기원전 81년 12월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1차
기원전 116년 ~ 기원전 107년[1] (약 9년)
이집트 파라오 2차
기원전 88년 ~ 기원전 81년[2] (약 7년)
전임자
후임자
부모
배우자
자녀
종교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9대 파라오.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상대로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2. 생애[편집]

프톨레마이오스 8세클레오파트라 3세의 장남으로, 출생년도는 기원전 143년 또는 기원전 140년이다. 별명인 라튀로스(Lathyros)는 '병아리콩'이라는 뜻. 형제자매로는 동복형제로 평생의 숙적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동복자매로 트뤼파이나, 클레오파트라 4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이복형제로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3],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4]이 있었다.

기원전 117년,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키프로스로 파견되어 그곳의 총독을 지냈다. 그 직전에 여동생 클레오파트라 4세와 결혼한다.

기원전 116년 6월 28일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붕어했을 때, 클레오파트라 3세는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파라오에 선출하고 싶어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유언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파라오로 세우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자, 결국 그녀는 장남이 파라오가 되는 걸 받아들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형의 즉위 직후 키프로스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여러 신하를 포섭해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지지하게 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내이며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4세가 남편을 부추겨서 자신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들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당장 그녀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하도록 강요해 관철시켰다. 클레오파트라 4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9세와 결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한 뒤 베레니케 3세를 낳았다. 셀레네는 파라오가 되지 않았고, 정치에 간섭하지 않아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를 만족시켰다. 기원전 109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 요한 히르카노스 1세에 대항하는 원정을 단행하려는 안티오코스 9세를 지원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던 10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신을 모시던 하인들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이 상처들을 두루 보이며,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에 따르면, 이 공격은 클레오파트라 3세가 아들을 축출하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일부러 부상입히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비밀리에 키프로스를 떠나 펠루시움에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왔고,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무사히 탈출하자 분노하여 체포 임무를 맡았던 장교들을 처형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재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키프로스로 달아났지만, 클레오파트라 3세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그를 몰아냈다. 그는 다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로 도주했고, 거기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기원전 106년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정복에 성공했다.

기원전 103년 하스몬 왕조의 새로운 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하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함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가서 야나이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도록 만들었다. 이후 갈릴리를 침공하여 요르단 강 근처의 아소폰에서 전투를 벌여 유대군을 격파하고 유대 일대를 약탈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유대를 발판삼아 이집트를 침공할 걸 우려하여 유대로 군대를 파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군대는 바다를 통해 페니키아를 침공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그들이 병력을 다른 데 보낸 틈을 타 이집트로 곧장 밀어붙이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급히 돌아와 이를 막았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가자에서 겨울을 보낸 뒤 기원전 102년 초 키프로스로 돌아갔다.

이후 키프로스에서 조용히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기원전 88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베레니케 3세 부부를 추방하고 자신을 초대하자 즉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서 파라오에 복위했다. 당시 상이집트 일대는 기원전 91년부터 반란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기원전 88년 11월,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히에락스 장군의 지휘하에 대군을 그쪽으로 파견했다. 테베는 얼마 안가 진압군에게 공략되어 심하게 약탈되었고, 필라이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메로에 왕국이 이집트가 양분된 틈을 타 빼앗아 간 영토는 되찾지 못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어떻게든 이집트를 되찾기 위해 로마 원로원에 방문하여 막대한 돈을 빌렸고, 그 대가로 자신의 왕국을 로마인들에게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렇게 해서 받아낸 자금으로 용병대를 고용한 뒤 키프로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그는 피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로마가 이 일을 빌미삼아 이집트를 완전히 장악할까 두려워하여, 가급적 로마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기원전 86년 루쿨루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에 맞서고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들렀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루쿨루스를 융숭하게 대접했지만, 국내 사정이 좋지 않아서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못했다.

기원전 81년 8월 5일,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딸 베레니케 3세를 공동 파라오로 승격시켰으나 얼마 후 사망했고, 베레니케 3세가 한동안 홀로 통치했다. 그러나 로마의 집권자 술라가 일전에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유언장을 빌미삼아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공동 파라오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베레니케 3세는 요구를 받아들여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19일 후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가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피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시민들의 추대로 파라오에 즉위했다.

[1] 기원전 116년 ~ 기원전 115년(클레오파트라 3세, 클레오파트라 4세와 협치)
기원전 115년 ~ 기원전 107년(클레오파트라 3세와 협치)
[2] 단독 통치[3] 클레오파트라 2세 소생.[4] 서자. 에이레네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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