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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18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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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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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18왕조
Eighteenth Dynasty of Egypt
기원전 1550년 ~ 기원전 1292년
위치
테베
아마르나(아케타텐)
정치 체제
국가 원수
주요 파라오
주요 사건
기원전 1550년 아흐모세 1세가 이집트 통일
기원전 1479년 하트셉수트의 섭정
기원전 1458년 투트모세 3세의 친정 시작
기원전 1353년 아케나톤 즉위
기원전 1350년 아톤 유일신교 국교화
기원전 1332년 투탕카멘 즉위
기원전 1319년 호렘헤브의 쿠데타
기원전 1292년 호렘헤브 사후 제18왕조 종료
성립 이전
이후

1. 개요2. 특징3. 역사
3.1. 이집트 전성기의 시작3.2. 아케나톤의 개혁3.3. 과도한 개혁에 대한 반동


1. 개요[편집]

기원전 1550년부터 기원전 1292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의 왕조이다. 이집트 신왕국에 해당한다.

2. 특징[편집]

제17왕조와 제18왕조는 하나의 왕조이다. 즉 17왕조 초대 파라오 라호테프와 18왕조 후반의 투탕카멘은 하나의 핏줄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17왕조와 18왕조를 나눈 것은 통일 이전이냐 통일 이후냐에 따른 것이다. 즉, 제17왕조는 제2중간기에 들어가고 제18왕조는 신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를 통일한 아흐모세 1세의 즉위 이후부터를 18왕조로 간주한다.

신왕국 시대를 시작한 첫 왕조로서,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3세와 같은 위대한 군주들이 이집트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신왕국 시대를 이집트 제국이라는 표현으로도 부른다.

또한 세계 최초의 유일신교인 아톤교가 등장하기도 했다.

쿠푸이집트 제4왕조, 클레오파트라 7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왕조이기도 한데, 왕조 번호는 몰라도 투탕카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사자의 서도 18왕조 때부터 대유행한 장례문화였다.

3. 역사[편집]

3.1. 이집트 전성기의 시작[편집]

그 기원은 기원전 1580년 라호테프가 세운 이집트 제17왕조이다. 17왕조의 카모세의 뒤를 이은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가 기원전 1550년에 즉위하면서 제18왕조가 시작되었다. 아흐모세 1세는 하이집트를 점유하던 힉소스이집트 제15왕조를 완전히 멸망시켰고 이집트를 재통일해 이집트 신왕국 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1525년 아흐모세 1세의 셋째 아들인 아멘호테프 1세는 이집트 외부로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북쪽으로는 지중해 동부 레반트를, 남쪽으로는 지금의 수단인 누비아의 쿠시 왕국을 공격해 영토를 넓혔다. 고대 이집트 하면 유명한 것들 중 하나인 사자의 서도 이 시기에 완성된 것.

기원전 1504년 즉위한 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의 경우에는 시리아 원정을 떠났다가 평소의 이집트인이 보던 나일 강과 흐름이 정반대인 유프라테스 강을 맞이했다. 이 때문에 투트모세 1세의 별칭으로는 '역류를 건넌 자'가 있다. 건축 사업을 벌이는 것도 잊지 않아, 많은 오벨리스크를 남겼다.

기원전 1493년 즉위한 4대 파라오 투트모세 2세는 후궁의 아들로 정통성이 불안정하여 이복 누이인 하트셉수트와 결혼했다. 누비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했다.

기원전 1479년 투트모세 2세가 사망하자, 아직 어린 아들 투트모세 3세를 대신하여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5대 파라오로서 즉위했다. 그녀의 치세에 이집트는 부강해졌다. 힉소스와 관련한 기록이 말살되었으며, 기원전 1460년대 중에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을 건설했다.

기원전 1458년 하트셉수트가 사망하자 마침내 6대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재위기간 첫 20년 간 17번의 정복 전쟁을 벌일 정도로 전쟁광이었다. 카데시 등을 정복하며 오리엔트 세계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탄니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바 있다. 기원전 1430년대에는 하트셉수트에 관한 기록을 지우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기원전 1427년 즉위한 7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 시기에는 전쟁이 줄어들고 미탄니와의 불편한 공존이 이루어졌다. 26년간의 치세 동안 평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원전 1401년에는 투트모세 4세가 8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그는 모래에 묻힌 스핑크스를 깨웠다는 설화로 유명하며, 이 일화는 최근 투트모세 4세의 불안정한 정통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창작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원전 1391년에 즉위한 9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는 건축과 문화 분야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면서 동시에 무예에도 뛰어난 성군이었다. 기원전 1370년대 즈음 페르하이 궁전을 짓고, 기원전 1360~50년대에는 파라오가 30년 이상 재위할 때마다 개최되는 세드 축제를 열었다. 그는 기원전 1353년에 사망했고, 아들인 아멘호테프 4세가 뒤를 이었다.
기원전 1353년 즉위한 10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는 아케나톤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재위 초반에는 기존 이집트 다신교를 유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1350년을 전후로 갑자기 아톤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선포하더니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탄압하며 아톤 유일신교를 국교화시켰다.

수도 또한 테베에서 아마르나(아케타텐)로 옮겼다. 아케나톤의 개혁은 민생을 살리는 것과는 큰 관련이 없었으며, 오히려 경쟁국가인 히타이트가 강해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이 시기의 국제정치에 대한 사료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르나 문서.

아케나톤의 개혁은 그가 죽는 기원전 133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스멘크카레로 불리는 남성 파라오와, 다른 여성 파라오가 연달아 즉위했는데, 이 여성 파라오는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로 추정된다.

그들의 뒤를 이어 기원전 1332년에 즉위한 13대 파라오가 바로 황금 마스크로 유명한 투탕카멘이었다. 그는 유약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기원전 1323년에 사망했고, 당시의 정권은 아이호렘헤브 등이 장악하고 있었다.

3.3. 과도한 개혁에 대한 반동[편집]

아케나톤 이후의 이집트는 여전히 무리한 개혁의 여파로 혼란을 겪고 있었고, 결국 아문 신을 섬기는 신관들이 이 모든 개혁을 없었던 것으로 갈아엎으려는 시도를 보였다.

14대 파라오 아이는 이집트의 실권자로, 즉위 당시 고령이었다. 그는 안케세나멘과 결혼하여 4년 간 통치했고, 기원전 1319년 사망할 때쯤 낙트민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또 다른 권력자 호렘헤브가 쿠데타를 일으켜 낙트민을 몰아내고 본인이 15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아케나톤에 대한 부정은 호렘헤브 때 극에 달해서, 아예 아케나톤부터 스멘크카레, 네페르티티, 투탕카멘, 아이를 파라오로서 부정하고 그들의 통치기간을 전부 본인의 통치기간으로 합쳐버렸다.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기원전 1292년 호렘헤브가 사망하자, 그의 친구이자 장군인 람세스 1세이집트 제19왕조를 개창하면서 제18왕조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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