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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 가스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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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고 과정3. 사고 조사4. 사고 이후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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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21일 목요일,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리오 피에드라스의 움베르토 비달(Humberto Vidal) 신발가게 본사 빌딩[1]에서 가스가 폭발해 건물의 일부가 붕괴되고, 33명이 사망, 8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 사고다.

2. 사고 과정[편집]

1996년 11월 14일, 호세 데이고 거리의 백화점에서 이상한 가스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직원은 방향제를 뿌려가며 냄새를 제거했다. 냄새는 옆의 삼거리에 위치한 움베르토 비탈 신발가게에서도 나고 있었다. 지하실의 신발 창고에서 가스냄새가 났지만, 가게 주인이 건물에 입주한 8년간 가스를 공급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상히 여겼다. 그날 오전 8시 22분, 신발 가게 주인은 냄새를 참지 못하고 엔론의 계열사인 산후안 가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1시간 20분후 가스회사의 기술자가 도착해 가스 탐지기를 작동했다. 지하실 주변을 체크했지만 가스 누출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기술자는 하수도에서 올라온 가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인에게 말했다.[2]

11월 20일 수요일 오전 6시 45분 신발가게를 오픈했지만 냄새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가게를 오픈한 아르투로 오닐은 동생 올랜도가 오자 지하실에 이상한 게 없는지 살펴 달라고 했다. 동생은 지하실로 내려갔지만 너무 뿌얘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 다시 올라왔다. 7시 15분 미라그로스 사베트로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투로는 미라그로스에게 지하실 점검을 부탁했지만 미라그로스는 불안한 느낌에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만 말하고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았다. 7시 28분, 아투로는 다시 가스 회사에 전화를 걸어 가스 누출을 확인해 달라고 했고 9시가 되자 가스회사에서 다른 직원을 보냈다. 직원들은 지하실에서 냄새를 맡았지만 가스가 아닌 플라스틱과 고무로 만들어진 신발에서 나온 냄새가 창고에 고인 것이라 설명한다. 9시 30분, 가스회사 직원이 나와 본부에 연락을 취한 뒤 가스누출을 알아보기 위해 표준 절차에 따라 도로 아래를 검사하기 위해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땅에 18개의 구멍을 뚫고 가스 누출을 확인했지만 가스는 검출되지 않아 11시 45분에 회사로 돌아갔다.

11월 21일 오전 6시 45분, 에어컨 정비를 위해 아버지와 아들로 이뤄진 정비사 2명이 움베르토 비달 빌딩에 도착했다. 아르투로 오닐은 다시 가스냄새를 맡았지만 정비사 2명은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7시 30분, 가스회사의 다른 점검팀이 도착하고 오늘 아침 냄새가 더욱 심해졌다는 얘기를 듣고, 어제 점검한 구멍을 재조사 하기 시작했다. 7시 50분, 정비사 중 아들은 일을 끝내고 다른 일을 하러 떠나갔다. 8시, 길 바로 건너편 미라그로사 수녀회 학교 마당엔 10여명의 학생들이 야외수업을 나와 있었다. 8시 29분, 아르투로 오닐은 냄새가 걱정되긴 했지만 가게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후 움베르토 비달 건물에 사무원과 손님, 직원들을 포함해 50여명이 들어섰고, 8시 30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건물 외벽이 날아가고, 주변의 차량들이 날아가 전복됐다.[3] 길을 걷던 행인들도 폭발의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근처 학교의 학생들은 간신히 폭발을 피했다. 그리고 911로 산후안 소방국에 폭발이 발생해 불이 크게 났고 부상자도 수두룩하다며 구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몇 분 뒤 911 신고에 대응하여 산후안 경찰국 소속 경찰관들과 산후안 소방국 소속 소방관들이 소방차, 구급차를 동원해 도착, 구조를 시작하고, TV서는 카메라를 가져와 생중계를 시작했다. 지하층과 1층, 2층은 붕괴되어 강철 콘크리트 골조만 남았고, 3층은 안내데스크쪽이 무너졌다. 4층과 5층은 폭발의 충격으로 유리가 박살났다.[4] 이때 미라그로스와 안내원은 폭발로 건물 밖으로 날아가 콘크리트 파편 위에 떨어졌다. 미라그로스는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안내원은 사망했다. 4층과 5층의 직원들은 살아남았지만 폭발로 인해 모든 계단이 무너져내려 건물에 갇혀버렸다. 소방관과 경찰들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사다리를 구하러 다녔다. 부모가 실종된 아이들은 TV에 생중계되며 엄마를 찾는 방송에 나왔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의 엄마는 사망한채로 발견됐다. 그리고 9시 30분, 아직까지도 4, 5층의 직원들은 사다리로 구조되고 있었다. 이후 소방구조대들은 며칠간 부서진 건물을 오르내리며 생존자들을 찾아나섰지만 상점 매니저 아르투로 오닐을 비롯해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건 5일 후인 11월 26일, 사망자수가 29명에 이르렀다. 이때 건축업자들은 '건물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조 총 지휘 책임이 있는 경찰서장 페드로 톨레도 총경에게 구조작업 중단을 요청했다. 경찰 측에서는 강철 골조로 건물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지만 이는 몇 주가 걸리는 작업이었다. 아직까지 생존자들의 구조 요청 소리가 파편 아래에서 들리는 상황에서 경찰서장 페드로 톨레도는 힘든 결정을 내린다. 소방관들에게 사실상 구조 중단 지시를 한 것인데 실종자들의 친지가 근처에 온 가운데 엔지니어들에게 중장비로 작업을 하라 지시한다. 이후 사고 27일만에 소방대원들은 파편들을 모두 들어내고 지하실에 들어갔다. 이후 에어컨 정비사와 아르투로 오닐의 시체가 발견되며 사망자 수는 33명이 됐다.

3. 사고 조사[편집]

당시엔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으로 부터 독립시키려던 테러 단체가 존재했고 실제 몇 번 테러도 일어난 상황이라 테러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FBIATF의 과학수사관들이 파편을 살피고 폭발물의 침전물과 화학 지문을 찾기 시작했고 확보한 증거물들을 분석을 위해 실험실로 보냈다. 또한 방화의 가능성도 제기되어 조사를 시작했다. 휘발유, 라이터 기름 같은 가연성 기체를 찾아 나섰지만 폭약이나 폭발물질의 흔적과 방화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테러가 아니란 결론이 나오자 FBIATF는 사건 조사에서 손을 뗐고 푸에르토리코 경찰이 사건을 전담하게 된다. 며칠 후 안전 관계당국이 건물을 철거한 예정인 가운데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 푸에르토리코 경찰 수사팀은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목격자들의 탐문 수사를 시작해 110여명의 진술을 확보했다. 대부분이 스페인어여서 통역사까지 고용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쾌한 냄새에 대해 언급했지만, 건물에 가스가 공급되지도 않았고 가스 누출 검사를 여러번 했지만 아무런 가스도 검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5] 가스의 출처는 산후안 가스회사가 공급한 프로페인 가스거나 하수구에서 발생한 메테인 가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과달라하라 가스 폭발 사고때와 같은 원인일 수도 있다는 설도 나왔다. 프로페인일 경우 공기보다 무거워 지하실 지하에, 메테인일 경우 공기보다 가벼워 지하실 위로 쌓였을 것이다. 그러던 도중 수사팀은 철근이 약간 위쪽으로 구부러진 것을 발견한다. 이는 폭발이 밑에서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이곳에 초점이 맞춰지자 가스회사는 반발하며 자체 표본과 사진을 확보할 수 있게 해달라 주장했지만 거절당했다.

수사관들이 가스조사를 위해 땅을 파다가 가스가 새어나왔는지 알아보던 중 건물 주변 흙에서 고농도의 프로페인 가스를 발견했다. 가스 회사는 사고건물과 주변 건물에 가스를 공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가스관은 전화선, 수도관 등 20개의 관과 같이 묻힌 상태였고, 땅을 파던 도중 청사진이 잘못된 것이 밝혀진다. 누가 설치했는지도 모르고 사용도 안하던 관이 발견된것이다. 불활성 질소가스를 사용해 가스 누출을 검사하기 시작했고 가스가 새는 틈을 모두 조사했지만 그 틈들을 모두 합쳐도 지하실을 가득 채울 가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가스관에 새는 곳이 있을 수 있단 설도 나오지만 가스회사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1년 전 배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던 관을 설치할 때 손으로 그려낸 지도가 발견되었다. 이 관은 24m 위의 레스토랑에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관이었다. 또한 그 관에서 가스가 여전히 엄청나게 새고있다.는 사실도 알게되는데 시간당 무려 100 큐빅미터의 프로페인 가스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관이 곡선 상태로 설치되어 엄청난 압력을 받았고 관 밑의 수도관을 설치하면서 흙이 가스관을 눌러내려 가스관이 파열된 것이다. 하지만 가스관의 새는 지점은 신발가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조사팀들은 테스트 가스를 투입해 어떻게 흐르는지를 관찰하기로 한다. 가스는 지하 파이프관 주변의 흙 속으로 스며들고, 수도관 아래로 이동한뒤 움베르토 비달 건물 지하실의 전기배설로 들어갔다. 해당 건물 지하실이 주변 건물 중 유일한 지하실이었기에 가스가 고이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이런 가스를 가스회사에서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가스가 지하 122cm를 흐르고 있었는데 가스회사에서 가스를 측정하기 위해 판 구멍은 46cm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6] 거기에 인터뷰 도중 오염되지 않은 바깥에서 탐지기의 스위치를 켜야 프로페인 가스나 다른 가스를 탐지할 수 있는데 건물 안에서 탐지기를 켜서 가스를 검출하지 못했단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후 불꽃의 시작을 찾기위해 조명 스위치와 엘레베이터 장치를 조사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지하에서 검은 얼룩을 발견하며 이 곳에서 폭발이 시작됐단 사실을 알게되고 공조 장치의 전선이 녹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해당 장소는 에어컨 정비사의 시체가 발견 된곳과 매우 가까웠다. 정비사가 공조 장치의 스위치를 켜면서 온도 조절기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쌓여있던 가스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그러던 중 가스회사에선 변호인단을 내세워 하수가스에 의해 폭발이 일어났을 거라며 조사 결과를 부정했다. 이후 건물이 철거된 6개월 후 하수가스의 폭발을 부정하는 증거가 나왔다. 지하실 바닥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신발이 날아가 신발자국을 남긴 것이 발견된것이다. 메테인은 가벼워서 폭발한다해도 지하실 위에 쌓여 폭발하면 신발을 아래로 날려 보냈을 것이고 신발 자국은 아래에 남았을 것인데 신발자국은 위에 있었다. 공기보다 무거운 프로페인 가스가 폭발했다는 증거였다.

4. 사고 이후[편집]

사고로 형 아르투로 오닐을 잃은 올랜도 오닐은 여전히 움베르토 비달에서 근무중이고 미라그로스는 사고로 인해 흉터를 얻었다. 사고로 인해 트라우마를 얻어 해당 건물에서 일을 그만둔 사람도 있다.

NTSB에서는 산후안 가스 회사가 직원들의 교육을 소홀히 했다며 직원들의 재교육과 정기적 점검을 권고했다. 가스 회사는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다가 희생자 유족들로부터 소송을 받았지만 여전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산후안 시의 낙후한 지하 가스관 90%가 제거되고 컴퓨터로 전산화된 지도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땅을 파기 전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땅 아래의 가스관 위치를 알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됐다.

2020년대로 접어들면서 낙후한 가스관 시스템을 모두 손봐서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 그러나 산후안 소방대원들은 이 사고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셈이다.

5. 둘러보기[편집]

[ 2020년대 ]
발생일
사건명
2023년 8월 8일 ~ 8월 11일
101
2022년 6월 27일
53
2022년 5월 24일
22
2022년 1월 23일
39
2021년 6월 24일
98
[ 2010년대 ]
[ 2000년대 ]

[ 199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99년 10월 31일
217
1999년 5월 9일
23
1998년 8월 7일
224
1997년 8월 6일
228
1997년 3월 26일
39
1997년 1월 9일
29
1996년 11월 21일
33
1996년 7월 17일
230
1996년 5월 11일
110
1996년 4월 3일
35
1995년 12월 20일
159
1995년 9월 22일
24
1995년 4월 19일
168
1994년 10월 31일
68
1994년 9월 8일
132
1994년 7월 2일
37
1994년 3월 23일
24
1993년 9월 22일
47
1993년 2월 28일 ~ 4월 19일
86
1992년 3월 22일
27
1991년 10월 19일 ~ 10월 23일
25
1991년 10월 16일
24
1991년 9월 3일
25
1991년 4월 5일
23
1991년 3월 3일
25
1991년 2월 1일
35
1990년 3월 25일
87
1990년 1월 25일
73
[ 198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89년 10월 23일
23
1989년 9월 21일
21
1989년 7월 19일
111
1989년 4월 17일
47
1989년 2월 8일
144
1988년 12월 21일
270
1988년 5월 14일
27
1987년 12월 7일
43
1987년 11월 15일
28
1987년 8월 16일
156
1987년 5월 17일
37
1987년 4월 23일
28
1986년 12월 31일
97
1986년 8월 31일
82
1986년 6월 18일
25
1986년 5월 30일
21
1985년 12월 12일
256
1985년 9월 6일
31
1985년 8월 2일
137
1985년 6월 25일
21
1985년 1월 21일
70
1985년 1월 1일
29
1984년 12월 19일
27
1984년 7월 18일
21
1983년 10월 23일
307
1983년 6월 2일
23
1983년 4월 18일
63
1983년 2월 10일
31
1982년 9월 4일
25
1982년 7월 9일
153
1982년 1월 13일
78
1981년 7월 17일
114
1981년 1월 9일
20
1980년 12월 4일
26
1980년 11월 21일
85
1980년 9월 12일
34
1980년 6월 5일
20
1980년 5월 9일
35
1980년 1월 28일
23
[ 197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79년 5월 25일
273
1978년 11월 18일
918
1978년 9월 25일
144
1978년 4월 27일
51
1978년 1월 28일
20
1977년 12월 13일
29
1977년 11월 6일
39
1977년 7월 19일
40
1977년 6월 26일
42
1977년 5월 28일
165
1977년 3월 27일
583
1976년 10월 20일
78
1976년 6월 4일
46
1976년 5월 21일
29
1976년 4월 27일
37
1976년 3월 9일, 3월 11일
26
1976년 1월 30일
23
1976년 1월 10일
20
1975년 11월 10일
29
1975년 6월 24일
113
1974년 12월 1일
92
1974년 9월 11일
72
1974년 9월 8일
88
1974년 6월 30일
24
1974년 4월 22일
107
1974년 4월 4일
72
1973년 7월 31일
88
1973년 7월 23일
38
1973년 7월 22일
78
1973년 6월 24일
32
1973년 3월 22일
32
1973년 2월 10일
40
1972년 12월 29일
101
1972년 12월 8일
45
1972년 10월 30일
45
1972년 9월 24일
22
1972년 6월 9일
238
1972년 5월 2일
91
1972년 2월 26일
125
1971년 9월 14일
111
1971년 9월 9일 ~ 9월 13일
43
1971년 6월 7일
28
1971년 6월 6일
50
1971년 2월 3일
29
1970년 12월 30일
39
1970년 12월 20일
29
1970년 11월 27일
79
1970년 10월 2일
31
1970년 11월 14일
75
1970년 5월 2일
23
1970년 3월 20일
20
[ 196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69년 9월 9일
83
1969년 6월 3일
74
1969년 2월 18일
35
1969년 1월 18일
38
1969년 1월 14일
28
1968년 12월 27일
28
1968년 12월 24일
20
1968년 12월 12일
51
1968년 12월 2일
39
1968년 11월 20일
78
1968년 10월 25일
32
1968년 8월 14일
21
1968년 5월 27일
99
1968년 5월 22일
23
1968년 5월 3일
85
1968년 4월 6일
41
1967년 12월 15일
46
1967년 11월 20일
70
1967년 7월 29일
134
1967년 7월 19일
82
1967년 6월 23일
34
1967년 6월 8일
34
1967년 3월 9일
26
1967년 3월 5일
38
1967년 2월 7일
25
1966년 10월 26일
44
1966년 8월 6일
42
1966년 6월 16일, 6월 28일
37
1966년 4월 22일
83
1965년 11월 11일
43
1965년 11월 8일
58
1965년 8월 24일
59
1965년 8월 16일
30
1965년 8월 9일
53
1965년 2월 8일
84
1965년 1월 16일
30
1964년 11월 23일
50
1964년 11월 15일
29
1964년 7월 9일
39
1964년 5월 11일
79
1964년 5월 7일
44
1964년 3월 1일
85
1964년 2월 25일
58
1963년 12월 29일
22
1963년 12월 8일
81
1963년 11월 23일
63
1963년 11월 18일
25
1963년 10월 31일
81
1963년 9월 17일
32
1963년 6월 3일
101
1963년 4월 10일
129
1963년 2월 12일
43
1962년 11월 30일
25
1962년 10월 3일
23
1962년 7월 22일
27
1962년 5월 22일
45
1962년 3월 16일
107
1962년 3월 1일
95
1961년 11월 8일
77
1961년 9월 17일
37
1961년 9월 1일
78
1961년 1월 15일
28
1960년 12월 17일
52
1960년 12월 16일
134
1960년 10월 29일
22
1960년 10월 4일
62
1960년 9월 19일
80
1960년 3월 17일
63
1960년 2월 25일
61
1960년 1월 18일
50
[ 195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59년 12월 1일
25
1959년 11월 16일
42
1959년 10월 30일
26
1959년 9월 29일
34
1959년 6월 28일
23
1959년 5월 12일
31
1959년 3월 5일
21
1959년 2월 3일
65
1958년 12월 1일
97
1958년 11월 18일
33
1958년 9월 15일
48
1958년 8월 15일
25
1958년 4월 21일
49
1958년 4월 6일
47
1958년 3월 19일
24
1958년 2월 28일
27
1957년 11월 8일
44
1957년 2월 17일
72
1957년 3월 22일
67
1957년 2월 1일
20
1956년 10월 10일
59
1956년 6월 30일
127
1956년 4월 1일
22
1956년 1월 22일
30
1955년 11월 1일
44
1955년 10월 6일
66
1955년 8월 11일
66
1955년 8월 4일
30
1955년 2월 12일
29
1955년 3월 22일
66
1954년 5월 26일
103
1953년 9월 16일
28
1953년 7월 17일
43
1953년 6월 18일
129
1953년 3월 27일
21
1953년 2월 14일
46
1952년 12월 20일
87
1952년 11월 22일
52
1952년 8월 4일
50
1952년 4월 29일
28
1952년 4월 26일
176
1952년 4월 11일
52
1952년 2월 11일
33
1952년 1월 22일
23
1951년 12월 29일
26
1951년 12월 21일
119
1951년 12월 16일
58
1951년 9월 1일
45
1951년 8월 24일
50
1951년 6월 30일
50
1951년 4월 25일
43
1951년 3월 23일
53
1951년 2월 6일
85
1950년 11월 22일
78
1950년 8월 31일
55
1950년 8월 25일
23
1950년 6월 23일
58
1950년 5월 25일
34
1950년 2월 17일
32
1950년 1월 26일
32
[ 1940년대 ]
발생일
사건명
1949년 11월 29일
28
1949년 11월 1일
55
1949년 7월 12일
35
1949년 6월 7일
53
1949년 4월 4일
74
1948년 12월 28일
32
1948년 10월 27일 ~ 10월 31일
26
1948년 8월 29일
37
1948년 6월 17일
43
1948년 3월 12일
30
1948년 1월 28일
32
1947년 10월 23일
52
1947년 7월 24일
27
1947년 6월 13일
50
1947년 5월 30일
53
1947년 5월 29일
43
1947년 4월 16일
581
1947년 3월 25일
111
1946년 12월 7일
119
1946년 7월 19일
25
1946년 6월 5일
61
1946년 4월 25일
45
1945년 8월 9일
34
1945년 8월 9일
372
1944년 12월 31일
50
1944년 10월 20일
131
1944년 8월 23일
61
1944년 8월 4일
47
1944년 7월 17일
320
1944년 7월 6일
167
1944년 5월 21일
163
1944년 2월 10일
24
1944년 1월 6일
115
1944년 1월 3일
138
1943년 12월 18일
34
1943년 12월 16일
74
1943년 9월 7일
55
1943년 9월 6일
79
1943년 8월 30일
29
1943년 7월 28일
20
1943년 6월 12일
42
1943년 2월 27일
75
1942년 11월 28일
492
1942년 6월 5일
46
1942년 1월 24일
48
1941년 6월 19일
33
1940년 9월 12일
52
1940년 8월 31일
25
1940년 7월 31일
43
1940년 7월 15일
63
1940년 4월 23일
209
1940년 4월 19일
31



[1] 가로 17m, 세로 33m의 6층짜리 빌딩으로 콘크리트로 보강되어 있었다. 지하실은 신발 창고로 사용했고, 1층은 보석가게와 음반가게, 신발가게, 2층은 비어있었고, 위의 3층부터 6층은 사무실로 사용했다.[2] 당시 산 후안은 하수구가 오래되면서 새는 일이 잦았다.[3] 폭발 당시 충격은 TNT 148kg과 맞먹었다.[4] 재난의 청사진(Blueprint for Disaster) 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폭발 이전에 한 가스회사에서 조사를 하던도중 갑자기 가스 검침기가 요동을 치더니 폭발이 일어났다고 설명하기도 했다.[5] 이 당시 에어컨 정비사가 사용했던 정비용 가스도 검사하지만 폭발하지 않는 가스였고, 며칠전부터 가스 냄새가 났지만 에어컨 정비사는 그날만 왔기에 조사에서 제외되었다.[6] 가스회사에서는 구멍이 얕다는 것을 부정하며 46cm가 적당한 깊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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