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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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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폴 카가메가 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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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부통령 / 총리
(초임)
초대
초대 총리[1]
폴 카가메
베르나르 마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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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조아킹 시사누
제3대
올루세군 오바산조
제6대
자카야 키퀘테
제8대
빙구 와 무타리카
제10대
야이 보니
제12대
모하메드 아지즈
제20대
마키 살

Screen-Shot-2020...
출생
루안다-우룬디 탐브웨
(現 르완다 북부주 루항고)
재임기간
제6대 대통령
제7대 대통령
제8대 대통령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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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데오그라티아스 루타감브와
어머니 아스테리아 비신다
배우자
자넷 니이라몬기 카가메 (1989년 결혼)
자녀
3남 1녀[2][3]
학력
은타레 학교 (정학)
캄팔라 중학교 (졸업)
미국 육군사령부 종합참모대학 (수료)
연세대학교 (행정학 / 명예박사)
신체
188cm
직업
정당
종교
경력
제6대 국방부장관 (1994년 7월 19일 ~ 2000년 4월 22일)
초대 부통령 (1994년 7월 19일 ~ 2000년 4월 22일)
제16대 아프리카 연합 의장 (2018년 1월 28일 ~ 2019년 2월 10일)
제16대 영연방 의장 (2022년 6월 24일 ~ 현직)
군사경력
복무
우간다 국민저항군
참전
우간다 부시 전쟁
르완다 내전

1. 개요2. 생애
2.1. 르완다 내전2.2. 대통령 당선 후
2.2.1. 업적
2.2.1.1. 폴 카가메 정권의 경제성적표는 초라한가?
2.2.2. 비판
2.3. 3선 달성
3. 기타4. 선거이력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제6~8대 르완다 대통령이자 독재자. 투치족 출신이다.

21세기 가장 대표적인 개발독재자로, 현재 가장 평가가 좋은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일반적인 독재자들은 대부분 본인의 사리사욕만 챙기고 국민들이 가난하건 말건, 나라가 망하건 말건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지만 그와 달리 폴 카가메는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이 있는데다가 국민을 생각하고 있어서, 르완다 내전으로 파괴된 르완다를 재건하고 국가 발전과 국민 복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르완다 내전의 원인이 된 민족 분쟁 역시 막아낸지라 르완다 내에서도 지지도가 상당히 높고, 세계적으로도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서방에서도 평가가 좋은 편이다.

폴 카가메가 매번 90%가 넘는 비정상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는데도 큰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도 국민들과 정치인 대부분이 실제로 그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특히 후투족투치족이 피로 피를 씻었던 르완다 내전의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르완다를 강력한 국민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공적이 있어서인지 르완다 국민들 중에는 카가메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독재자이니만큼 후술하듯 부정부패나 인권 탄압 등 독재정권 특유의 문제점 역시 있어서 공과가 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민족분쟁을 막고 국가를 경제 성장 궤도로 돌입시켰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좋은 평가가 우세하다.

예전에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적 부모님에 의해 피난길에 올라 우간다에서 성장하였으며 젊은 시절에 우간다 저항군에 동참하기도 했다. 당시 저항군을 돕던 르완다 망명자들이 르완다 애국전선(RPF) 창설자들이다.

또한 동아프리카 공동체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2018년 1월 28일부터 2019년 2월 10일까지는 아프리카 연합의 의장이기도 했다.

2. 생애[편집]

2.1. 르완다 내전[편집]

1957년 르완다 남부 탐브웨(Tambw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투치족이었으며 그가 어렸을 때 투치족 학살이 일어나 1960년 우간다로 피난해 난민촌에서 살았다. 이후 1979년에 우간다독재자 밀턴 오보테[4] 대통령에 반대하는 게릴라 국민저항군에 입대했다.

1986년 국민저항군의 리더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이 집권하였는데[5] 카가메는 국민저항군의 장관이자 무세베니의 측근[6]이 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르완다는 쥐베날 하뱌리마나 독재정권 하에서 다수의 후투족이 소수의 투치족을 탄압하는 형편이었으며 이 무렵 카가메는 미국의 레번워스 기지의 미국 육군참모 대학에서 훈련받고 있었다. 1990년, 르완다에서는 투치족들이 이끄는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르완다 내전을 일으켰다. [7]
초반공세로 RPF는 르완다 북중부 영토 일부를 장악하며 상당한 세를 얻었으나 프랑스와 벨기에, 자이르 등이 하뱌리마나 정부군을 지원함으로써 RPF는 점차 밀리게 되었다. RPF는 정부군의 대반격으로 한달 만에 르완다 국경지대로 퇴각했으며 RPF 대원들은 2천명도 남지 않았다. 이때 카가메가 미국에서 귀국해서 새로운 RPF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효과적으로 반군을 지휘해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1992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다가 마침내 1993년 아루샤 조약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4년 후투족 출신 르완다부룬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프랑스 등의 주장으로 카가메의 소행이란 설이 있어서 프랑스와 르완다 간의 외교 갈등이 벌어졌으나, 2012년 프랑스 법원의 재조사에서 최종적으로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둘이 동시에 암살당한 전례가 없는 국가원수 복수 암살인데, 둘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다가 1994년 4월 6일에 키갈리 근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맨패즈의 공격으로 격추당했다. 이후 2012년에 프랑스에서 파견한 조사단에 의해 저 둘의 암살은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에 의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후투족들이 결성한 인테라함웨나 임푸자무감비 등의 단체는 투치족 학살을 시작했다. 약 세 달 동안 최대 100만 명, 르완다 인구의 20%가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인원은 대개 투치족이었으나 일부 온건파 후투족과 피그미족의 일파인 트와족도 학살당했으며, 투치족의 70%, 트와족의 30%가 학살당했다. 이에 RPF는 반격을 개시해 수도 키갈리를 점령했으며, 이어 르완다 전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사이 UNAMIR 소속 평화유지군들은 수백 명으로 감축되었다. 주력이었던 벨기에군이 총리 부부를 보호하던 벨기에 병사들이 학살된 사건으로 자국 내 여론이 악화되어 철수하게 되자 아예 규모를 줄여버렸다. 프랑스는 UN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민간인 보호를 (비공식적으로 - 반쯤은 거의 대놓고 - 후투족을 지원) 명분으로 내세워 투크쿼이 작전을 개시하여 안전지대를 구축하였다. 그러자 후투족은 이 기회를 잡아 자이르, 즉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런데 이 피난민 중에는 수십만 명의 인테라함웨가 섞여 있었다. 이에 카가메는 이들을 진압한답시고 자이르를 침공했고, 침공한 김에 자이르 동부의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8] 게릴라와 연합해 1,600km를 진격해 모부투 세세 세코의 자이르 독재정권을 전복하고 카빌라를 대통령으로 하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를 세운다. 그러나 카빌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 카빌라가 르완다와 거리를 두자 다시 콩고민주공화국을 재침했고, 이 내전 동안 540만 명의 콩고인이 숨졌다. 당시 내전 기간 동안 르완다군과 동맹군 우간다군은 수많은 콩고인을 학살했으며, 내전이 끝난 후에도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여러 반군을 지원하며 자원을 챙겨갔다고 한다.

2.2. 대통령 당선 후[편집]

한편 카가메는 2000년 4월 22일에 장관들과 의회의 간접선거로 당선된 후 2003년 8월 25일에 비로소 치러진 정식 대선에서 95.05%의 엄청난 지지율로 당선되어 정식으로 르완다 대통령이 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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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새마을운동 시범사업

카가메 통치 하의 르완다의 경제발전상에 다룬 기사

카가메가 취임한 르완다에선 인종, 종교, 민족에 대한 차별이 금지되었고 여성 의원 할당제가 실시되어 의원의 56%가 여성인 국가가 되었다.

카가메는 싱가포르에서 영감을 얻은 경제 자유화, 정경유착 감소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연평균 7%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3차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으며, 르완다를 아프리카IT 허브로 만드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 2300km 정도의 광섬유 통신 네트워크를 완성했고, 청소년 교육을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연간 예산의 17%를 교육에 할당해 의무교육 12년(초등학교 6년+중학교 6년) 동안 국영 학교에서 무상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부패인식지수도 2006년부터 2022년까지 25점(163개국 중 121위)에서 54점(180개국 중 54위)으로 올라 '상당히 부패'로 분류되긴 해도 세이셸, 보츠와나, 카보베르데를 제외하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로 분류된다.[10] 연도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보다도 청렴한 국가로 분류되기까지 했을 정도면 말 다했다.

카가메의 교육 지원에 힘입어 르완다의 대학교 수는 1994년에 단 1개밖에 없던 게 2010년에는 29개, 2024년에는 50개 이상로 늘었고, 문해율도 1991년의 58%에서 2009년에는 71%로 증가했다. 덤으로 카가메는 거리에 플라스틱 병과 비닐봉지를 버리는 것을 금지하여 거리의 청결도도 높였다.

치안사정도 개선되어 현재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에서도 주변국을 보통 출국권고국(콩고민주공화국, 부룬디)이나 여행자제국(우간다)으로 지정해 놓았지만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과 부룬디 국경을 제외하면 여행유의국에서 그치는 수준이다.

그리고 카가메는 말라리아, 폐렴, 설사, AIDS 등의 전염병영양실조가 국민들을 위협하던 르완다에서 의료 정책에 집중적인 힘을 기울였다. 카가메는 아주 고급의 서비스는 아니더라도 의료보험의 적극적 도입을 추진했는데, 2008년에는 모든 개인에게 의료보험을 의무화하는 법률이 발효되었고, 2010년까지 인구의 90% 이상에 이 보험이 적용되었으며, 카가메의 집권 기간 동안 의료의 질이 높아지며 산모신생아의 파상풍 감염률과 말라리아 사망률도 급격히 낮아졌고, 영유아 사망률도 2000년에 185명이었던 것에서 2020년에는 41명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카가메에 대해 르완다를 지옥에서 건져낸 인물이라고 호평했을 정도였다. 아랫나라이자 냉전 종식 후 르완다와 똑같이 후투족투치족 간 부족갈등으로 내전을 겪었던 부룬디가 내전이 끝난 이후에 여전히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카가메의 코로나 19 대처도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실제로도 르완다는 자원도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의료 시스템이 덜 발달되어 있는 나라지만, 카가메는 그동안 갖춰온 의료 시스템과 신속한 검사, 의료 당국에 대한 높은 신뢰도를 발판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감염률과 사망률을 보이는 국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르완다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거주자가 비필수적인 여행을 위해 EU 국가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2022년 4월 기준으로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인구의 60% 이상이 COVID-19에 대해 완전 백신을 접종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21년에 카가메는 '국가 비전 2050 정책'에 따라 르완다가 2035년까지 중상위 소득 국가, 2050년까지 고소득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11]

자신의 경제 발전을 위해 카가메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했다.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한국을 보고 "한국이 한 것들을 우리도 하면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며 한국을 모범으로 르완다를 아프리카의 IT 강국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 바가 있으며,(#) 2015년 유엔 회의에 참석해서는 "르완다의 고도성장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받아들인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2.2.1.1. 폴 카가메 정권의 경제성적표는 초라한가?[편집]
  • 세계은행의 2022년도 경제 자료를 토대로 작성함.

폴 카가메 집권기(2000년 이후)와 한국(1961~83), 싱가포르(1960~82)의 경제성장률을 서로 비교하여 박정희리콴유 등 다른 개발독재자에 비해 초라하다는 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한국 및 싱가포르가 고도경제성장을 누릴 때와 현재 폴 카가메 집권기는 상황이 다르다. 당시 세계의 경제성장률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2022년까지 르완다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7.3%고, 동시기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2.85%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961년부터 1983년까지 9.5%, 싱가포르의 경제성장률은 1960년부터 1982년까지 9.0%였고, 1960년부터 1983년까지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12%였다. 즉, 1960~80년대 세계 경제성장률은 2000~20년대보다 훨씬 높았다.

1인당 소득성장률을 보더라도 르완다는 2000~2022년 연평균 4.8%고, 동시기 세계 1인당 소득성장률은 1.65%다. 특히 르완다가 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연평균 1.22%에 불과하며, 이는 세계 평균보다도 낮다. 한국의 1인당 소득성장률은 1961부터 1983년까지 7.4%, 싱가포르의 1인당 소득성장률은 1960년부터 1982년까지 6.7%였다. 그리고 1960년부터 1983년까지 세계 1인당 소득성장률은 2.27%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르완다의 경제성장률이 1960~80년대 한국과 싱가포르보다 낮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국제 경기 자체가 비교가 안 되니까.

무엇보다도 한국과 싱가포르는 구 개발도상국 중에서 가장 성장한 국가에 속한다.[12] 전교 1, 2등의 성적표와 비교하니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두 나라는 또한 르완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한국은 미국의 대(對) 공산주의 전선의 최전선이었으며, 싱가포르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인 말라카 해협에 자리한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바다와 면한 나라로서, 이런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막대한 원조를 받고 중공업, 경공업과 무역을 적극 육성할 수 있었다. 더구나 한국은 박정희 이전에도 경제 상황과 비교하면 인적, 교육 인프라가 풍부한 편이었고,[13] 싱가포르도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영국이 항구로서 개발해놨기에 박정희와 리콴유는 시작부터 폴 카가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했다.

반면에 르완다는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동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나라이며 해안선과 맞닿아 있지 않아 무역이 까다로운 내륙국이다. 심지어 르완다는 1990년대 초기 후투족과 투치족 간 내부 민족 갈등이 내전으로 폭발하여 1994년 르완다 내전으로 단 3달 만에 자국민 50~100만 명이 대량학살당하는 참상을 겪었다. 카가메가 집권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6년 후인 2000년이다. 사실상 싱가포르는커녕 한국과 비교해도 경제 성장이 불가능한 것과 다를 바 없던 상황인 셈.

이런 시대적, 지리적,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르완다의 경제성적표는 오히려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역내 국가들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폴 카가메는 한편으로는 독재자로서 많은 비판도 받고 있다. 애초에 카가메는 집권 시기가 블라디미르 푸틴과 비슷하다. 폴 카가메의 의중에 따라 기상천외한 법률이 제정되는데 비닐봉투환경을 어지럽힌다는 말을 들은 후 즉각적으로 비닐봉투 사용을 금지하고 이것을 사용하다 걸리면 징역 1년에 처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고 있다.

르완다의 언론자유지수는 2023년 기준으로 전 세계 180개국 중 131위를 기록했는데 심지어 그것도 이전보다 높아진 것으로 2019~2020년에는 155위, 2021년에는 156위였던 것이 2022년에는 136위로 급상승(?)했다. 다만 이는 2022년에 언론자유지수 산정 기준이 바뀌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대선 직전 의문의 폭발사고가 일어나거나 정치인에 대한 체포 혹은 실종 등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1996년에는 1995년 연합내각 붕괴 당시 그와 격렬하게 대립하다가 케냐로 망명한 온건파 세스 센다송가(Seth Sendashonga, 1951~ 1998년 5월 16일) 가 케냐 나이로비에서 암살시도를 당했는데 문제는 이 암살을 시도한 사람들이 르완다 대사관 직원들이었다. 이 암살 시도로 인해 센다송가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의 조카가 중상을 입었고, 케냐와 르완다의 외교 관계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하지만 암살시도에도 불구하고 센다송가는 포기하지 않고 부상에서 회복되자마자 탄자니아우간다에서 카가메에게 대항하는 반군을 조직하는등 계속해서 저항을 이어갔다.

1998년 5월 16일 저녁, 센다송가는 나이로비에서 아내와 함께 유엔환경계획의 차량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명의 암살자가 그가 탄 차량을 향해 총탄을 난사했다. 이로 인해 센다송가와 그의 운전수가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아내만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이 암살의 배후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암살에 르완다 대사관 직원이 관여했다는 의혹과 케냐에서 석방된 암살 용의자중 한명이 르완다로 귀국했다가 살해되는등 여러 수상한 정황때문에 사실상 카가메가 배후라고 추정되고 있다.[14]

2010년 6월 19일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요하네스버그에서 전직 육군 참모총장이던 카얌바 냥와사(Kayumba Nyamwasa, 1962~)가 집에다 주차한 차에서 내리던 중 르완다인에게 총을 맞았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는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언론인이 키갈리에서 차를 세우다가 의문의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직 해외정보부장인 패트릭 카레게야[15]는 2013년 마지막 날에 요하네스버그 교외의 호텔에서 폴 카가메의 부하들에게 목이 졸려 죽었으나, 카가메는 2014년 1월 12일에 있던 기도 모임에서 "누구든지 나라를 배반하는 자는 아직 살아 있는 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누구든 시간 문제입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도 이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당시 기사 이후로도 카가메의 정보기관은 해외에 망명한 반카가메 인사들을 암살하기 위해 요원들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가 집권할 동안 사망하거나 실종된 언론인이 8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2020년 8월에는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폴 루세사바기나를 체포해서 법정에 세우고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문제는 이 사람은 미국 영주권자로, 폴 카가메를 비판하다가 1996년 벨기에로 망명한 상태였고 체포당시 해외에 있었다는것이 알려졌다[16]. 그러니까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미국 영주권자를 불법으로 납치해서 르완다 법정에 세운것이다.

폴 루세사바가나는 르완다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미국 영주권자를 불법으로 납치,감금하고 고문한 르완다 정부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압력이 점점 심해지자 결국 2023년 3월, 르완다 정부는 카타르의 중재로 폴 루세사바가나를 석방했다.# #

그리고 2010년 대선에서는 약 93%의 지지율로 당선되어 7년 임기를 시작했는데, 대선 과정에서 유력 야당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살해되거나 강압에 의해 재집권에 성공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콩고민주공화국의 반군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대선 출마가 좌절된 빅투아르 잉가비르 민주세력연합(UDF) 총재는 "자유 투표가 보장되지 않았다"면서 대선 결과에 반발했다. 또한 르완다에서 스웨덴 망명자들을 감시하다가 외교관이 쫓겨난 사례도 있으며, 무엇보다 폴 카가메는 콩고 내전르완다 내전 당시 이뤄진 여러 가지 전범 혐의를 받고 있기도 하다. [17]

게다가 폴 카가메가 이끄는 RPF는 르완다의 모든 부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르완다 기업인들이 주축이 돼 지난 2009년 설립한 투자회사 크리스탈 벤처스는 그 자산만 5억 달러(약 5700억 원)로 평가되는 우량기업이다. 현재 서류상으로는 카가메 대통령이 소속된 여당 소유로 돼 있으나 사실상 카가메 대통령 본인의 소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탈 벤처스는 각종 인프라와 부동산, 모바일 사업 등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 UN은 콩고민주공화국의 광물 자원을 탈취한 범죄에 카가메 대통령의 회사가 연루돼 있다고 공개한 바 있다. 게다가 르완다의 경제 성장 성과도 수도의 엘리트에게 중점적으로 돌아가지 농촌 지역은 소외되었다는 지적도 많다.[18]

2.3. 3선 달성[편집]

2015년에 3선 개헌을 성공시켰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 대통령들의 3선 혹은 부정선거를 비판한 것과 모순되는 행보다. 2015년 4월 이웃나라 부룬디에서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3선 도전을 선언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번져나갔다. 은쿠룬지자가 군대와 경찰을 보내 시위를 진압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고, 폴 카가메는 TV에 출연해 "부룬디의 국민들이 매일 살해당하고 있다. 시신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다", "은쿠룬지자가 살인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고 은쿠룬지자를 비판했다.[19] 그보다 훨씬 이전인 2008년에는 짐바브웨의 대통령인 로버트 무가베가 부정선거를 통해서 모건 창기라이 후보를 꺾고 연임에 성공하자 카가메가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르완다 의회는 폴 카가메 현 대통령의 3선 도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헌법 개정안을 2015년 10월 29일 승인했다. 만약 헌법이 개정되면 무려 2034년까지 대통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르완다 학살 이후 정권을 잡은 이래 40년 이상 통치할 가능성이 높다.# [20] 폴 카가메 측근들은 전체 유권자의 60%가 카가메 정권 연장을 희망하는 청원서에 서명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근데 하도 젊은 나이에 집권해서 2034년까지 집권해도 77세 밖에 안된다.

실제로 일반 르완다인들 사이에서도 경제성장과 치안 안정을 시킨 것은 사실이므로 르완다 사람들도 폴 카가메는 좋아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르완다에서 이번 헌법 개정 시도는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의 대통령들처럼 그저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와 똑같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유럽이나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폴 카가메는 르완다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충분히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니 이제 탄자니아 줄리어스 니에레레[21]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슨 만델라, 나미비아 샘 누조마, 잠비아 케네스 카운다, 앙골라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전 대통령처럼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물러나는 게 좋지 않겠는가"라고 민주적인 사퇴와 권력이양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르완다 국민들은 다시 폴 카가메를 대통령 자리에 올려줬다. 무려 98%의 지지율로.[22]

그리고 2024년, 4선 도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3.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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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제4차 세계개발원조총회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키 188cm의 장신이다. 그의 자식들은 2m가 넘는다.# 다만 투치족은 북유럽인들보다도 커서 190cm가 넘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키는 투치족 중에서는 되려 조금 작은 편이다.[23]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터뷰에서 새마을 운동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다. 행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인의 롤모델임을 밝혔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책과 행보와 비슷하다고 해서 아프리카의 박정희, 흑정희, 검정희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며 해외에서도 가끔씩 카가메를 박정희와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2024년 6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박정희를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2024년 6월 4~5일 한-아프리카 정상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후 6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행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

프랑스어 배제 정책을 펼치고 영어 우대 정책을 펼치고 있다.[24]

아스날 FC의 팬이라고 한다. 그래서 2018-19시즌에 아스날 유니폼 어깨에 르완다 홍보 글귀를 내고 3년 동안 430억 원이 넘는 돈을 내며 계약했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전광판에 종종 보이는 'Visit Rwanda'라는 문구가 이 인물의 의뢰를 받은 것이다. 2021-22시즌 아스날이 승격팀 브렌트포드에게 개막전에서 패하자 트위터에 분노의 글을 올렸다.

코로나 19에 대한 대처격으로 2020년에는 3월부터 11월까지 사실상 모든 학교를 폐쇄하고는 원격 학습을 위해 TV, 라디오 교육 방송을 충원했으나, 많은 학생들이 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자 재개교 후에는 2019년 당시의 학년의 공부를 다시 하게 했다.

영연방 국가 치고는 특이하게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어, 정부수반을 겸하고 있다. 대부분 영연방 국가들은 입헌군주제공화제의원 내각제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골때리는 점. [25] 그와 별개로 카가메 본인은 반벨기에, 반프랑스 성향이 강하고 친미, 친영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당장 영국이 난민을 추방하려 했던 나라가 르완다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멜레스 제나위 생전에, 폴 카가메와 상당히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나이대도 비슷하다.

4.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3
2003년 르완다 대통령 선거
3,544,777 (95.06%)
당선 (1위)
초선
2010
2010년 르완다 대통령 선거
4,638,560 (93.08%)
재선
2017
2017년 르완다 대통령 선거
6,650,722 (98.80%)
3선

5. 관련 문서[편집]

6. 둘러보기[편집]

[ 아시아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아미르가 겸직하여 사실상 군주에 가깝다.
*** 이란의 국가원수는 라흐바르이며, 대통령은 정부수반이다.
**** 현직 장성급 장교들이 국회의원을 겸직하는 정당이라 사실상 미얀마군 소속에 가깝다.
라이칭더 (초선)
나지브 미카티 (권한대행)
민 슈웨 (권한대행)
라샤드 알알리미
(대통령 지도 위원회 의장)
[ 유럽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산마리노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 아닌 두 명의 집정관이다.
***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은 헌법상 이원집정부제이나 사실상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 아메리카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조 바이든 (초선)
찬 산토키 (초선)
[ 아프리카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현재 군사정권이거나 혹은 사실상 해당 국가의 군 소속
마마디 둠부야 (권한대행)
모하메드 알 멘피 (대통령위원회 의장)
아시미 고이타 (권한대행)
파스테프당
압델파타흐 알부르한 (주권위원회 의장)
폴 비야 (7선)

[1] 폴 카가메 대통령 취임 후 총리제로 변경.[2] 자녀들은 대부분 벨기에 출생이고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았다.[3] 자녀가 모두 장신인데 아들들은 모두 2m가 넘고 딸 또한 194cm의 장신이다.[4] 많이 잊혀진데다 아민에 비하면 임팩트가 약하기는 하지만, 오보테도 집권할 동안 얼마나 폭정이 심했는지 이디 아민의 학정을 겪은 우간다 주민들 중에서도 아민을 증오하던 사람들조차 오보테의 복권만큼은 절대로 원치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오보테는 아민 이전에 대통령으로 집권하다가 자신의 충직한 부하와도 같던 아민에 의해 쿠데타로 쫓겨났다.[5] 참고로 무세베니는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처음엔 아프리카의 신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았으나 이디 아민이라는 사상 최악의 독재자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무세베니도 200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둔 악랄한 독재자다.[6] 무려 우간다 군사 정보국장이 되었는데 카가메가 외국인이었던것을 생각하면 무세베니가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수있다.[7] 내전 초반 카가메는 미국에서 유학중이어서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8] 카가메의 지원을 받기 전에 카빌라가 이끄는 게릴라는 민간인 납치로 먹고 사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9] 다만 그는 대통령이 되기 이전 1995년부터 부통령과 국방장관을 지내며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얻은 상태였다.[10] 모리셔스,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처럼 아프리카에서는 부국으로 꼽히는 나라들도 르완다보다 부패인식지수가 낮다.[11] 얼핏 보면 예상 경제성장 속도가 굉장히 느린 것 같지만 한국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 해는 IMF 외환위기 극복에 성공하고 인간개발지수 30위권 안에 처음으로 들어간 2001년인데, 2001년은 6.25 전쟁이 휴전한 지 48년밖에 안 된 해다. 한국이 2차 대전 후 독립한 국가들 중 비정상적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케이스라는 것을 감안하면 르완다 내전 종전 56년 뒤까지 르완다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카가메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하술하듯 르완다가 경제개발 시작 당시 한국보다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12] 한국과 싱가포르 이상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가 보츠와나, 오만, 적도 기니처럼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방대하게 매장된 양질의 다이아몬드(보츠와나)/석유(오만, 적도 기니) 덕분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기에 한국, 싱가포르와는 비교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보츠와나와 적도 기니는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특히 적도 기니는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라는 희대의 독재자 때문에 기껏 얻은 부도 제대로 써먹지 못해 자원의 저주에까지 빠져들었다. 그나마 오만이 좋은 결말을 맞이했다.[13] 덤으로 이승만 시기의 화폐가치가 실제에 비해 2배나 고평가된 것을 감안해도 1인당 GDP도 세계 최하위권이 아닌 중하위권 수준이었다.[14] 물론 르완다 정부는 당연히 부정했다.[15] Patrick Karegeya, 1960~2013. 참고로 카레게야는 "카가메는 전쟁으로 쫓겨나지 않는 한 권력을 떠나지 않을 독재자"라고 평했으며, 카가메가 정적에 대한 암살을 지시했다는 증언을 했다.[16] 당시 그는 분명 아랍에미리트에서 부룬디행 비행기를 탔는데 눈을 떠보니까 부룬디가 아니라 르완다였다고 증언했다.[17] 미국과 유엔은 르완다가 콩코 동부에서 깽판을 치고 있는 반군 M23을 몰래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18] 실제로 르완다의 농촌 지역의 빈곤율은 42%로 도시 지역의 빈곤율 15%보다 훨씬 높다.[19] 은쿠룬지자와 폴 카가메는 한때 호형호제할 정도로 좋은 관계였으나, 2012년부터 사이가 나빠졌다.[20] 2023년 기준 40년 이상 집권중인 아프리카 독재자는 적도 기니테오도로 오비앙카메룬폴 비야 2명이다. 그나마 비야는 아프리카 독재자 중에서는 온건하다고 평가받지만, 오비앙은 풍부하게 매장된 석유를 자기 일족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써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빈곤층으로 만든 최악의 독재자다.[21] 이 사람도 1960, 70년대까지 장기 독재를 했지만 결국 1985년에 대통령직에서 사퇴했다.[22] 당연하지만 부정선거다. 유력 야당후보들은 모조리 출마가 금지되었다.[23] 참고로 키가 가장 큰 민족은 딩카족이다.[24] 다만, 르완다는 프랑스어가 주요 외국어에 속해 있어서 프랑스어도 영어와 함께 쓰이고 있다.[25] 영연방 회원국 대부분이, 기존 영국 국왕이 자국 국왕을 겸하거나(영연방 왕국), 자체적으로 군주가 따로 있거나(말레이시아 등), 군주제를 폐지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써 대통령을 두거나(싱가포르, 인도, 파키스탄 등) 하는 식인데 르완다는 좀 특이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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