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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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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에리트레아 국장
에리트레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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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초대 대통령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Isaias Afwerki | ኢሳይያስ ኣፍወርቂ
Afwerki Intervie...
출생
영국 군정 하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아스마라
재임
기간
초대 대통령
초대 국회의장
초대 민주정의인민전선 의장
서명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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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아세마 메하리
자녀
아브라함, 엘사, 베르한
신체
190cm[1]
학력
아디스아바바 대학교 (공학)
약력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 수장 (1987년 - 1994년)
에리트레아 과도정부 서기장 (1991년 - 1993년)
종교
정당

1. 개요2. 이름 표기3. 생애4. 철권 통치5. 기타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에리트레아 국회의장과 집권여당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의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1993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31년 동안 현직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다.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을 만든 것과 독재자가 되기 전에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북한김일성[2],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와 비견된다. 독재자가 된 영웅의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한물 간 줄 알았던 '아프리카의 김정은'의 놀라운 컴백: 2023년 9월 28일 발행된 영국 언론인 미겔라 롱의 이사이아스 분석 기사로 80세를 목전에 둔 그가 동아프리카의 위협적 변수로 부상한 것과 동시에 그의 생애 전체를 소개하고 있다.

2. 이름 표기[편집]

그의 이름을 표기하는 티그리냐어암하라어의 통일된 라틴 문자 정서법이 없기 때문에 통용 표기인 Isaias Afwerki 만으로는 발음 유추가 어려워 이사이아스 아퍼워르키·아페웨르키·아프웨르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티그리냐어 표기 역시 ኢሳይያስ ኣፈወርቂ(Isayyas Afäwärqi)와 ኢሳይያስ ኣፍወርቂ(Isayyas Afwärqi)가 둘 다 혼용되는데 통용 표기는 후자를 채택한 것으로, 후자 기준으로 티그리냐어 발음은 [isajas afwɐrkʼi](이사야스 아프와르키)에 가깝다. 국립국어원의 규정 용례는 전자의 영향을 받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다.

아페웨르키는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의 사례와 유사하게 성씨가 아닌 부칭(부계명)[3]에 해당하므로 이사이아스를 누락하고 아페웨르키 단독으로 표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는 별도의 성씨를 사용하지 않고 본명과 부칭이 덧붙는 작명 방식을 사용한다.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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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투쟁 당시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1946년 2월 2일아스마라에서 태어난 그는[4][5] 1960년대 초부터 에리트레아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아디스아바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다가 1년 만에 중퇴한 후 에리트리아 해방전선(ELF)에 합류했으며 1970년에 ELF에서 분리된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6]의 지도자로 선출된 후 1977년에는 사무차장, 1987년에는 사무총장으로 승진하며 에리트레아 독립전쟁을 주도했다. 에티오피아 대기근 당시 구호물자가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문제와 암하라인 관리들의 구시대적 학정에 맞서 티그리냐인들과 티그레인들은 힘을 합쳐 1961년부로 무장항쟁에 들어갔으며 결국 그가 이끄는 에리트레아 측은 1993년 미국과 UN의 중재로 독립을 쟁취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김일성이라는 멸칭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로서는 위인이라는 평을 받는다. 독립운동 당시의 그는 적어도 김일성처럼 무능한데다가 거짓 전과를 선전해대던 똥별은 절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덕망이 높은 지도자로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명장이었다.[7]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독립 투쟁 당시의 그는 열악한 상황 하에서도 군인들의 처우 및 기강 확립에 신경쓰던 덕장이기도 했다는 것이다.[8] 어느 정도였냐면 에티오피아군 포로들을 학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직업과 기술까지 가르쳐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내전 지역이나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들과 갱 조직, 미얀마의 소수민족 반군 등이 소년병을 납치해서 노예만도 못한 대우를 하는 것과 다르게 그가 지휘하던 에리트레아 독립군은 독립전쟁 당시에는 범죄도 적었고 사기와 전투 의지도 높았으며 병력 규모와 장비 면에서 더 강력했던 에티오피아군에 맞서서 선전했다.

1998년에는 국경 문제로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렀는데 이 전쟁으로 그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전시 상황 때 단결하던 무슬림과 기독교인 부족들이 에리트레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 다시 토지 소유권을 두고 서로 갈등하며 싸우기 시작했는데[9] 그는 비상사태 선포 후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이 제어되는 효과를 보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비상사태를 유지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비상사태를 해제하지 않고 있다.

4. 철권 통치[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에리트레아 문서
번 문단을
인권 탄압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그의 철권 통치 때문에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의 북한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21세기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에리트레아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 시리아언론자유지수 꼴등 경쟁을 벌이다시피 할 정도로 언론 자유가 말 그대로 바닥을 기고 있으며 세계의 자유 지수는 2023년 기준으로 총합 3점으로 북한과 함께 195개국 중 공동 192위를 차지했고[10] 2022년 기준으로 취약국가지수는 19위를 기록해 위험군에 오른 파탄국가가 되었다.[11]

심지어 그는 자기랑 함께하며 고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동료들조차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 같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기도 한다. EPLF 사령관이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제3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세브하트 에프렘(Sebhat Ephrem, 1951 ~)도 2019년에 암살당할 뻔했고 EPLF의 창립 멤버에 에리트레아 독립전쟁의 최대 전투인 아파벳 전투[12]를 승리로 이끈 독립영웅에 제2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메스핀 하고스(Mesfin Hagos, 1947 ~)도 그를 반대하다가 2013년에 동료들이 숙청되자 독일로 망명했으며 역시 EPLF 사령관으로 에리트레아의 독립에 중대한 공헌을 하면서[13] 초대 국방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페트로스 솔로몬(Petros Solomon, 1951 ~)과 EPLF 간부 학교[14] 교장 출신에 제1재무장관, 외무부 장관, 통상산업부 장관을 역임한 하일레 월덴세(Haile Woldense, 1946 ~)도 2001년에 그를 반대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가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심지어 EPLF 회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페트로스 솔로몬의 아내까지 2003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후 바로 구금되었다.[15]

5. 기타[편집]

  • 한비야가 자신의 여행서에서 얼굴도 잘생기고 엘리트인데 덕망도 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에리트리아의 지도자가 바로 그다. 물론 한비야가 에리트레아 지역을 탐방한 시점은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와의 독립전쟁으로 죽어라 싸우고 있었던 1990년대 중반으로, 당시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 독립전쟁을 이끄는 투사였기 때문에 제대로 악명을 떨치기 전이라서 좋게 봤을 수밖에 없었다.
  • 1997년 5월 4일에는 경제협력 등 한국과의 관계증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방한하기도 했는데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시대와 내전을 겪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이적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을 향후 국가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어렵게 독립을 쟁취한 정신력으로 똘똘 뭉쳐 이제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충만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하지만 세월이 30년 가까이 지났어도 에리트레아는 북한, 말라위, 니제르 같은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며 오히려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보다 민주적이고 경제 상황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군부 정권 시절인 1970, 80년대의 암담했던 상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을 넘어 조만간 최빈국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이는 나라다.
    그로부터 27년 후인 2024년 6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방한했다. 참석한 정상 모두와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어 이전의 비공식 방한과 달리 첫 한-에리트레아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6월 5일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이 성사되었다. #
  • 에리트레아를 독립시킨 장본인이기에 현재 북한 수준의 억압적인 학정을 펼치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우상화 없이 상당수의 에리트레아인에게 독립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 북한 이상으로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통치를 일삼는데다 밑의 사람들이 매우 부패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부정축재를 일삼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부정부패로 막대한 돈을 축적하고 사치를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고 있다. 집무실은 어디 중소기업 사장 사무실만도 못하고, 옷차림은 대충 간단한 셔츠차림에 샌들이 전부라서 동네 이장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위의 사진처럼 옷을 잘 입고 다니는 경우는 해외 순방이나 해외 국가원수의 국빈방문 등 공식 석상에 나와야 할 때뿐이다.[16] 그를 여러 차례 인터뷰한 에리트레아 전문가 댄 코넬의 말에 따르면 그의 관심은 오직 "권력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그와 비교되는 김일성과 로버트 무가베가 부정축재와 사치에 몰두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17][18]

6. 둘러보기[편집]

[ 아시아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아미르가 겸직하여 사실상 군주에 가깝다.
*** 이란의 국가원수는 라흐바르이며, 대통령은 정부수반이다.
**** 현직 장성급 장교들이 국회의원을 겸직하는 정당이라 사실상 미얀마군 소속에 가깝다.
라이칭더 (초선)
나지브 미카티 (권한대행)
민 슈웨 (권한대행)
라샤드 알알리미
(대통령 지도 위원회 의장)
[ 유럽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산마리노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 아닌 두 명의 집정관이다.
***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은 헌법상 이원집정부제이나 사실상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 아메리카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조 바이든 (초선)
찬 산토키 (초선)
[ 아프리카 ]
*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현재 군사정권이거나 혹은 사실상 해당 국가의 군 소속
마마디 둠부야 (권한대행)
모하메드 알 멘피 (대통령위원회 의장)
아시미 고이타 (권한대행)
파스테프당
압델파타흐 알부르한 (주권위원회 의장)
폴 비야 (7선)

[1] # 실제로 링크 속에 있는 10세 때 형제들과 찍은 사진과 2023년 5월 31일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만 봐도 엄청난 장신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2] 물론 북한에서 과대선전하는 것을 제외해도 김일성의 실제 무장투쟁 성과는 거의 없다시피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실제 전과를 떠나 보천보 전투를 통해 이름이 알려지면서 한반도 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3]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부계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인명이다. 예시로는 윌리엄(William)의 아들을 의미하는 윌슨(Wilson), 스테판(Stefan)의 아들을 의미하는 스테파노비치(Stefanović) 등이 있다.[4]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운동가가 된 아들과는 정반대로 아버지는 에리트레아의 에티오피아 국영 담배 회사에서 일한 것을 넘어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합병을 추진하는 정당 소속인, 한국으로 치면 일진회 회원이랑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5] 다만 매국노, 부역자의 자식들이 독립운동가가 되는 일은 은근히 흔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각 나라의 매국노는 자식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해 주기 마련인데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 현실에 눈을 뜬 사람은 식민지 본국과 본래 민족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마침내는 자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만 해도 을사오적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 정미칠적 이재곤의 자식들인 이관용, 이순용 형제가 독립운동가였다. 덤으로 북한김성일 사건처럼 독재정권의 고위층 집안의 자제들이 체제의 모순을 실감하며 민주화 운동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6] 1994년 2월 16일에 민주정의인민전선으로 변경되었다.[7] 더욱이 무가베조차 독립영웅 시절에 독선적인 면모로 주위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면모가 더욱 돋보인다.[8] 아이러니하게도 현 시점의 에리트레아군은 조선인민군과 비견될 정도로 군인들의 처우가 열악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9] 기독교를 믿는 티그리냐인들은 주로 농경에 종사하고 이슬람을 믿는 티그레인들은 주로 목축에 종사하였는데 티그레인들이 키우는 가축들이 티그리냐인들의 밭을 망쳐 놓거나 티그레인들이 방목하는 목초지를 티그리냐인들이 개간하면서 분쟁이 발생하였다.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의 흔한 갈등 레퍼토리이다.[10] 이들보다 세계의 자유 지수가 낮은 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2점), 시리아&남수단(1점) 3개국밖에 없다.[11] 참고로 그로부터 16년 전인 2006년의 에리트레아의 취약국가지수는 높은 경고군에 속하는 54위였다.[12] 1988년 3월 17 ~ 20일에 에리트리아 북부의 아파베트(Afabet)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전투다. 15,000명 규모에 외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게릴라에 가까웠던 에리트레아군은 4,000 ~ 5,000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소련의 지원을 받던 20,000명 규모였던 에티오피아군 최고의 사단은 무려 8,000 ~ 9,000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5,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아프리카판 디엔비엔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전투다.[13] 솔로몬은 단독으로 EPLF의 정보 부서를 조직했고, 에티오피아군과의 전투를 여러 번 이끌었으며 독립전쟁의 막바지이자 멩기스투가 축출된 직후인 1991년에 아스마라를 포위한 EPLF 군대를 지휘하고 아스마라를 수복하면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오기 전까지 아스마라를 관리했다.[14] 한국으로 치면 신흥무관학교 포지션이다.[15] 그나마 솔로몬 부부의 자식 4명은 수용소에 가지는 않았지만 모두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16] 사실 민주주의 국가의 국가원수들도 공식 석상에서는 옷을 잘 차려 입을 수밖에 없다. 국가원수로써 당연한, 최소한의 품위 유지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17] 무가베도 부정부패와 사치를 일삼은 건 맞지만 최소한 먹는거 한정으로는 본인 생일잔치 때를 제외하면 평소에는 채식 위주로 소식하는 등 검소한 식생활을 추구했던 인간이었다.진짜 김일성 이새끼는 도대체가[18] 아페웨르키처럼 북한과 가장 근접한 수준의 독재를 했다고 평가받는 엔베르 호자도 개인적으로는 사치스럽기는커녕 인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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