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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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作 | |
교황명 | 율리오 2세 (Iulius II) |
본명 |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Giuliano della Rovere) |
출생 | |
제노바 공화국 알비솔라 | |
사망 | |
재위기간 | |
문장 | |
언어별 명칭 |
교황이 되기 전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던 시절에 정치적으로는 숙부덕을 보지 못하고 찬밥 신세였다고 한다. 숙부 식스토 4세는 자신의 누이의 아들들을 선호해서 고종사촌들이 잘나가는걸 지켜만 봐야 했다고... 역시 종조부가 교황 갈리스토 3세였던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과 대립하는 사이였고, 교황 선출에서도 경쟁했다.
그러나 숙부 덕에 수입이 많은 교구와 직위를 차지하고 스페인 추기경들의 몰표를 받은 보르지아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발루아 왕조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국으로 도망갔고, 군사적 야망으로 가득찬 샤를 8세를 선동하여 교황령을 침공하도록 했다.
이후 알렉산데르 6세가 프랑스와 협상하고, 델라 로베레 추기경과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만,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로 대표되는 보르자 가문을 박살내는데 온 힘을 쏟아 결국 성공했다.
그러나 숙부 덕에 수입이 많은 교구와 직위를 차지하고 스페인 추기경들의 몰표를 받은 보르지아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발루아 왕조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국으로 도망갔고, 군사적 야망으로 가득찬 샤를 8세를 선동하여 교황령을 침공하도록 했다.
이후 알렉산데르 6세가 프랑스와 협상하고, 델라 로베레 추기경과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만,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로 대표되는 보르자 가문을 박살내는데 온 힘을 쏟아 결국 성공했다.
교황이 된 이후에는 군사력을 이용해 이탈리아를 교황령의 주도로 통일하기를 꾀했고, 이에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중세 이래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도시국가들과 공국들로 나뉘어져 분쟁이 지속 중이었다. 그 와중에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이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간섭하려고 했다. 율리오 2세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령의 영토 확대를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이 점은 전임 교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전 교황들이 주로 돈을 이용한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방식을 사용했다면 율리오 2세는 성직자라는 본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혀가며 적극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중세 이래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도시국가들과 공국들로 나뉘어져 분쟁이 지속 중이었다. 그 와중에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이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간섭하려고 했다. 율리오 2세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령의 영토 확대를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이 점은 전임 교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전 교황들이 주로 돈을 이용한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방식을 사용했다면 율리오 2세는 성직자라는 본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혀가며 적극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먼저 교황령의 볼로냐를 선동해서 독립을 지원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격분하여 스스로 갑옷을 입고 말을 타며 전쟁에 참전했다. 이 결정을 모든 추기경들이 말렸으나, 율리오 2세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왕국 및 아라곤 왕국과 함께 1509년에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여 베네치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 앞서 세금을 내기를 거부하던 볼로냐와 베네치아 지도자들을 파문했는데, 그들은
"교황님께서 우리의 복잡한 사법 체계를 잘 이해못하시네요 ㅋㅋㅋ"
라며 교황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렸지만 '전사 교황'에게 비참하게 패배한 이후, 스스로 헤진 옷을 입고 맨발로 기어 나오자 당시 관례대로 매를 몇대 때리는 시늉으로 관대하게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율리오 2세는 캉브레 전쟁을 통해 볼로냐의 독립을 저지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세력이 약해진 자리는 프랑스가 채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율리우스는 1510년에 캉브레 동맹을 해체시키고, 적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및 아라곤 왕국과 신성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이탈리아 남부 지배[2]를 인정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졌다.[3]
율리오 2세는 캉브레 동맹 전쟁과 신성 동맹 전쟁을 연이어 치르며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적으로, 어제의 적을 오늘의 친구로 삼는 등 철저히 이해타산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전쟁은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로 합의되면서 종전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축소되었지만 율리오 2세가 끌어들인 스페인의 영향력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강해졌고, 이에 율리우스는 스페인을 물리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이 두 나라는 서로 싸우기는커녕 결혼 동맹을 맺어 버린다. 결국 이탈리아 반도는 위아래로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에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으며, 율리우스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 1527년에 신성 로마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의 란츠크네히트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를 포로로 잡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로써 교황령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율리우스의 꿈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이탈리아는 250년 뒤에 교황령이 아닌 다른 나라의 손에 의해 통합되었다.
이후 1527년에 신성 로마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의 란츠크네히트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를 포로로 잡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로써 교황령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율리우스의 꿈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이탈리아는 250년 뒤에 교황령이 아닌 다른 나라의 손에 의해 통합되었다.
율리오 2세는 무력을 이용해 이탈리아 반도를 교황령의 주도로 통합하고자 했으나 이는 처음부터 한계가 명확한 것이었다.
- 또한 한 나라의 힘을 빌려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작전을 쓴 것은 좋았지만, 그 오랑캐 가운데 하나가 배신하고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는 전혀 해놓지 않았던 것이 패인이라고 할 수 있다.[4] 사실 율리오 2세가 보여준 정치적 목적 자체는 결국 (평생의 정적이자 원수였던) 알렉산데르 6세와 거의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교황인 자신이 주도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려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종교적 권위만으로도 교황에게 강한 영향력이 보장되던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서유럽 각국이 중앙집권적인 영토형 대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율리오 2세의 노력은 애초부터 시대 역행이었던 것이다[5].
- 교황들은 고령에 즉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정복 전쟁을 장기간 지속할 수 없었으며, 환갑의 나이에 즉위한 율리오 2세 자신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6]
라파엘로를 율리오 2세에게 소개하는 브라만테를 그린 그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 밖에도 도나토 브라만테와 그의 제자인 라파엘로 산치오를 포함한 예술가들도 크게 후원하여 예술을 중흥시키기도 했다. 라오콘 상을 사들인 것이 그의 재위 4년째인 1506년이었는데, 이때부터 교황들은 예술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506년은 바티칸 미술관이 시작된 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특히 숙부 식스토 4세가 지은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시켜 유명한 천정화인 <천지창조>를 그리게 했으며, 브라만테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과 벨베데레 궁전(Cortile del Belvedere)[7]의 건축을, 라파엘로 산치오에게는 <아테네 학당> 같은 벽화, 자신의 초상화, 바티칸의 건축 일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작업을 의뢰했다.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면서 그 중앙에 위치할 자신의 영묘에 쓸 조각상들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의뢰했다. 그 조각상들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모세 상, 죽어가는 노예상, 반항하는 노예 상들이다. 그러나 영묘 건설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대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강제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천직을 조각가로 생각했고 그전까지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강제로 천장화를 그리게 하는 것을 탐탁치 못하게 생각했으며, 율리오 2세가 전쟁 때문에 돈이 없어 미켈란젤로가 이미 구매한 영묘 조각에 쓸 대리석 대금을 지불하지 못한 적도 있어 미켈란젤로의 큰 불만을 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반항하며 고향 피렌체로 도망갔다가 율리오 2세가 보낸 사람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문하는 율리오 2세.[9][10]
율리오 2세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개축하는 선에서 끝내려고 하다가 계획이 마음에 안 든다며 폐기해 버리고는 아예 처음부터 훨씬 웅대한 건물을 새로 지으려고 했다. 이러한 큰 건축적인 야심은 여러 곳에서 도전받는 가톨릭의 위상을 고전에 기초한 르네상스적인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통해 재정립하려고 했던 시대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15세기 초의 로마는 심각할 정도로 황폐화되어[11] 로마 전체를 새롭게 재개발하는 것이 교황청은 물론 로마 시의 숙원 사업이 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계획의 핵심이었다.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기 설계는 율리오 2세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맡았으며, 당초에는 율리오 2세의 영묘가 성당의 중앙에 자리잡을 예정이었으나 영묘는 흐지부지되었다.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중앙부에 거대한 기둥벽(pier)들을 올리며 옛 성당은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철거하던 중 율리오 2세가 사망했다. 율리오 2세가 죽자 노쇠한 브라만테는 다른 건축가들로 교체되었으며, 설계는 이후의 건축가인 라파엘로[12] 등이 전면적으로 변경했다.
흔히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가 재정을 악화시켜 면벌부를 팔게 만들어 교회 분열을 불러오고, 개신교를 탄생시킨 원흉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후임 교황 레오 10세의 사치와 전쟁질로 인한 재정 파탄 문제가 더 컸다.
르네상스라는 말을 학술 용어로 고착시킨 대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율리오 2세를
교황령의 구세주
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부르크하르트는 대학자이긴 하지만 문화사 중에 미술사 전공으로, 주전공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였으니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한 율리오 2세에게 좋은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율리오 2세와 동시대 인물로 교황령 소속 관료로 근무한 적도 있는 역사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율리오의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율리오 2세와 동시대 인물로 교황령 소속 관료로 근무한 적도 있는 역사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율리오의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치명적인 동맹, 치명적인 무기.
애초에 16세기에는 프랑스나 신성 로마 제국은 거대화된 관료 국가가 되어서 이탈리아 중부의 손톱만한 영지의 국력인 교황령 자체로는 도저히 상대하거나 조종할 위치는 진작에 지나갔었다. 중세 교황권이 세속 군주보다 높았던 시절은 황제가 제국 내 정적들인 공작들의 반발을 이용하거나, 황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어이없게 남계가 단절되어 명맥이 끊겼을 때나 가능했다. 세속 군주들은 황제나 왕만 되었다 하면 신앙심이 줄어드는(?) 기적을 보여왔다. 사실 중세 초기엔 동로마 황제와 그의 대리인이었던 라벤나 총독에게 들볶였고 랑고바르드족이니, 고트족이니, 노르만족이니 하는 오랑캐(?)들도 이탈리아를 노렸기 때문에 세속적인 보호는 황제에게 더 의지하거나 영향력하에 놓인 기간이 길었다. 현재에 와선 개인의 정치적 능력을 제외하면 르네상스 시대 최악의 교황으로 비판받는 알렉산데르 6세보다 더 못한 평가를 내리는 자도 있다. 알렉산데르 6세가 개인적인 정욕과 공사 분간이 안 된 경우라면, 율리오 2세는 교황보다는 세속 군주나 장군이 더 어울릴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교황 역사상 레오 9세와 함께[13] 스스로 갑옷을 입고 정벌에 나선 둘 뿐인 사례이다. 문제는 그것이 세금을 안내는 신자들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온건한 가톨릭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뮈스는 갑옷 입은 군인 교황이 천국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익명의 비판극을 발표했고 사후에 에라스뮈스의 저작임이 드러나서 이 때문에 사후에 파문당했다. 더불어 기록까지 말살당했다.[14] 종교 개혁 시기 개신교 진영에선
또한 교황 역사상 레오 9세와 함께[13] 스스로 갑옷을 입고 정벌에 나선 둘 뿐인 사례이다. 문제는 그것이 세금을 안내는 신자들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온건한 가톨릭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뮈스는 갑옷 입은 군인 교황이 천국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익명의 비판극을 발표했고 사후에 에라스뮈스의 저작임이 드러나서 이 때문에 사후에 파문당했다. 더불어 기록까지 말살당했다.[14] 종교 개혁 시기 개신교 진영에선
전쟁에 미쳐서 피에 굶주린 흡혈귀
- 미국 드라마 더 보르지아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콜름 피오.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추기경으로서 나오며,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라는 본명으로 나온다.
[1] 일단 비오 3세는 재위기간이 1개월 미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즉위할 때 이미 병이 깊은 몸이었기에 보르자 가문을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었으며, 그래서였는지 체사레 보르자의 교회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와 로마냐 공작이라는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2] 1504년에 정복.[3] 이는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4]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흑역사 취급을 받는 알렉산데르 6세를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율리오 2세와는 달리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협력하여 최대한 자주적으로 진행하려 했고 로마냐 공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여, 오랑캐가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5] 이 점에서도 알렉산데르 6세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데, "교황인 자신이 주도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것은 같으나 율리우스는 교황령 자체가 통일하려 했던 반면 알렉산데르는 로마냐 공국이라는 나라를 따로 세운 다음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냐 공국은 대국은 아니었으나 체사레 보르자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였다.[6] 간혹 예외가 나오기도 하는데, 율리오 2세의 후임 교황인 레오 10세 같은 경우 38세에 즉위했다.[7] 사부아 공자 외젠의 소유였던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전과는 다른 건물이다.[8]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 역을, 렉스 해리슨이 율리오 2세 역을 맡았다.[9] 에밀 장 오라스 베르네, 1827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10] 헌데 브라만테가 들고 있는 설계도는 브라만테가 죽은 이후 라파엘로가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로, 실제로 있었을 광경을 그린 것은 아니다.[11] 교황청이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로마 시의 인구가 격감하여 100,000명의 인구 중 20,000여 명으로 줄었고, 귀환 당시 건물 사이로 여우가 굴을 파고, 밤중엔 성벽 사이로 늑대가 출몰하며, 주요 건물들은 거의 허물어져간 상태였다고 한다.[12] 브라만테의 제자였다.[13] 11세기 초 교황 레오 9세가 스스로 토벌군을 이끌고 정벌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노르만인들이 이탈리아 남부를 침략해서였다... 그런데 노르만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이탈리아 남부에 교황 소유의 장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전투 결과 사로잡혔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14] 생전에는 레오 10세와의 친분으로 교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그 덕분에 여러 이단 논쟁에서 면책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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