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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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대 콘스탄티노 | → | 제89대 성 그레고리오 2세 | → | 제90대 성 그레고리오 3세 |
출생 | |
사망 | |
재위기간 | 제89대 교황 |
축일 |
그레고리오 2세는 제89대 가톨릭의 교황이다.
669년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교황 세르지오 1세 재임 중(687~701) 로마 교구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715년 5월 19일 교황으로 선출되자 보니파시오에게 독일 선교를 명령하고(719년), 722년에 그를 주교로 서임하여 아직 완전히 개종하지 않은 독일권의 가톨릭 신앙 전파를 맡겼다.[1] 이를 위해 교황은 보니파시오가 당시의 관례에 따라 수석 대주교에게 행하는 순명 서약을 하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프랑크족 지도자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교황의 서한을 보내도록 하여, 독일(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혼란과 아랍군의 공격으로 이전보다 동로마 제국의 국세(國勢)가 위축되어 이탈리아 반도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줄어든 점을 이용해 교황이 정치적 자립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독립적인 군사력이 부족하였으므로 이를 벌충해 줄 상대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그레고리오 2세가 낙점한 것이 새로 대두하고 있는 강국 프랑크였다. 독일권 선교를 위해 보낸 보니파시오로 하여금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서한을 보내도록 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교황은 내심 프랑크 왕국을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 맞선 후원자로 점찍었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린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대처였다. 동로마 제국이 위축된 틈을 노린 랑고바르드족의 세력 확대로 교황 역시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동원할 군사력이 없는 교황은 직접 충돌을 일으키지 보다는 랑고바르드족을 잘 달래는 쪽으로 대응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다시 개입해 올 경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교황의 이런 노력으로 그레고리오 2세 재임 중에는 랑고바르드족과 큰 갈등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한편 교황의 대외적 트러블은 서유럽의 게르만족(프랑크, 랑고바르드)보다는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관계에서 터졌다. 717년 아랍 우마이야 왕조의 대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황제 레온 3세는 성상 파괴주의자였다. 황제는 726년 칙령을 내려 성상파괴를 명하고 자기 지지세력인 군대를 동원해 이를 철저히 집행했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이를 강력하게 규탄함으로써 황제와 결정적인 마찰을 일으켰다.
교황은 서신 2통을 황제에게 보내 '정통 교리'를 설명하고 교의(敎義, 도그마)를 정의하는 동로마 황제의 권리에 도전하였다. 이에 격노한 황제는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로마 시민들이 황제군에 맞서 싸워 격퇴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나라)로마인과 (도시)로마인의 싸움 이런 치열한 갈등과 충돌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교황과 황제 사이의 정치적, 종교적 간극과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되었고 이것의 정점이 300년 뒤 찾아온 상호 파문에 따른 동서 대분열이다.
그레고리오 2세는 731년 2월 11일 선종했다.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됐고, 사후 시성됐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혼란과 아랍군의 공격으로 이전보다 동로마 제국의 국세(國勢)가 위축되어 이탈리아 반도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줄어든 점을 이용해 교황이 정치적 자립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독립적인 군사력이 부족하였으므로 이를 벌충해 줄 상대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그레고리오 2세가 낙점한 것이 새로 대두하고 있는 강국 프랑크였다. 독일권 선교를 위해 보낸 보니파시오로 하여금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서한을 보내도록 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교황은 내심 프랑크 왕국을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 맞선 후원자로 점찍었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린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대처였다. 동로마 제국이 위축된 틈을 노린 랑고바르드족의 세력 확대로 교황 역시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동원할 군사력이 없는 교황은 직접 충돌을 일으키지 보다는 랑고바르드족을 잘 달래는 쪽으로 대응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다시 개입해 올 경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교황의 이런 노력으로 그레고리오 2세 재임 중에는 랑고바르드족과 큰 갈등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한편 교황의 대외적 트러블은 서유럽의 게르만족(프랑크, 랑고바르드)보다는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관계에서 터졌다. 717년 아랍 우마이야 왕조의 대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황제 레온 3세는 성상 파괴주의자였다. 황제는 726년 칙령을 내려 성상파괴를 명하고 자기 지지세력인 군대를 동원해 이를 철저히 집행했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이를 강력하게 규탄함으로써 황제와 결정적인 마찰을 일으켰다.
교황은 서신 2통을 황제에게 보내 '정통 교리'를 설명하고 교의(敎義, 도그마)를 정의하는 동로마 황제의 권리에 도전하였다. 이에 격노한 황제는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로마 시민들이 황제군에 맞서 싸워 격퇴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그레고리오 2세는 731년 2월 11일 선종했다.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됐고, 사후 시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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