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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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대 테오도로 1세 | → | 제74대 성 마르티노 1세 | → | 제75대 성 에우제니오 1세 |
마르티노 1세는 가톨릭의 제 74대 교황이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교황 사절로 근무했기 때문에 동방 교회 사정에 정통하므로 동방 교회와 로마 사이를 잘 중재할 것이라고 기대되었고 교황으로 된지 얼마 안돼서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의 승인을 받았다.[1]
하지만 콘스탄스 2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마르티노 1세가 교황이 된 후에 한 첫 번째 공식 활동은 동방 교회에 만연한 단의설을 처리하기 위해 전임 교황 테오도로 1세가 소집했던 라테라노 교회회의를 재소집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 때 단의설의 신앙 고백 문서인 에크테시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지에 관한 논쟁 자체를 금한 콘스탄스 2세의 티포스(Typos) 칙령까지도 비판했다.
마르티노 1세는 5회에 걸친 라테라노 교회회의가 끝나고, 이 회의의 결과를 발간하여 널리 퍼치도록 했다. 이슬람과의 대결에 직면한 황제 콘스탄스 2세는 내부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강경한 마르티노 1세의 조치는 황제의 의지와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결국 황제도 강수를 두어 라벤나 총독 올림피오스에게 교황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올림피오스는 딴 마음을 먹고 자신을 황제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시칠리아를 공략하려 했지만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콘스탄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후임 라벤나 총독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고, 결국 마르티노 1세는 653년 6월 17일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된 마르티노 1세는 주교복이 벗겨지고, 쇠사슬로 묶여 감옥에 수감된다. 감옥에 수감된 후 공개적인 모욕을 받는 고초를 겪다가, 크리미아 지역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그 해 9월 16일에 사망한다. 사후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성되었고, 축일은 4월 13일이다.
하지만 콘스탄스 2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마르티노 1세가 교황이 된 후에 한 첫 번째 공식 활동은 동방 교회에 만연한 단의설을 처리하기 위해 전임 교황 테오도로 1세가 소집했던 라테라노 교회회의를 재소집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 때 단의설의 신앙 고백 문서인 에크테시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지에 관한 논쟁 자체를 금한 콘스탄스 2세의 티포스(Typos) 칙령까지도 비판했다.
마르티노 1세는 5회에 걸친 라테라노 교회회의가 끝나고, 이 회의의 결과를 발간하여 널리 퍼치도록 했다. 이슬람과의 대결에 직면한 황제 콘스탄스 2세는 내부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강경한 마르티노 1세의 조치는 황제의 의지와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결국 황제도 강수를 두어 라벤나 총독 올림피오스에게 교황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올림피오스는 딴 마음을 먹고 자신을 황제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시칠리아를 공략하려 했지만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콘스탄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후임 라벤나 총독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고, 결국 마르티노 1세는 653년 6월 17일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된 마르티노 1세는 주교복이 벗겨지고, 쇠사슬로 묶여 감옥에 수감된다. 감옥에 수감된 후 공개적인 모욕을 받는 고초를 겪다가, 크리미아 지역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그 해 9월 16일에 사망한다. 사후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성되었고, 축일은 4월 13일이다.
[1] 52일 만에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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