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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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7-22대 국회의원 조경태 趙慶泰 | Cho Kyoung-ta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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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대 국회에서 활동할 당시 쇠고기 문제로 청문회에서 정운천 당시 농림수산식품부장관에게 강경하게 나가 조포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후로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조포스라고 ID를 쓰는 거 보면 좋아하는 듯. ## 아이러니하게도 8년 후인 2016년 조경태가 민주당을 탈당해 새누리당에 입당하면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20대 총선 때 둘 다 같은 당 후보로 당선되기까지 했는데 정운천은 새누리당 분당 사태 당시 탈당해 바른정당-바른미래당으로 간 반면 조경태는 탈당하지 않고 자유한국당에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020년 미래통합당 출범 이후 정운천이 합류하면서 21대 국회에서도 같은 당 소속으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 위에 설명되어 있듯이 보수 지지세가 강한 부산광역시에서 민주당 깃발로 3선을 한 것으로 유명하여 지역주의 타파의 선봉장 중 하나로 불렸다. 그 3선 중에 17대 총선, 18대 총선은 운이 좋은 케이스[11]였고, 당선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매우 놀라워했다고 하는데, 이런 탓에 당시 당선자들 중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유일하게 호출을 받아 대통령을 독대하여 극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2000년대 후반까지도 야권 내 대표적인 친노 인사로 분류되었다. 심지어 참여정부 시절 대연정 파동 때 당내외 여론이 악화되는 와중에 대연정 제안을 강력히, 꽤 문제되는 발언까지 섞어가며 옹호하기도 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이 6.4 지방선거 때 적지인 대구광역시에 출마하였으나 안타깝게 석패 후 20대 총선에서 되었고,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예산폭탄 공약을 내걸고 민주당의 텃밭인 전남의 순천시·곡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상대측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서갑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바가 있지만 2000년대 이후 최초는 조경태였다.
- 민주당 시절에는 다선인 것과는 별개로 비주류에 인지도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탓에 당내 지지층이 전무했다. 한 예로, 2012년 19대 총선 당시 한명숙 지도부는 문재인 후보가 출마한 사상구는 자주 들렀지만 사상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 그의 사하구 을 선거구에는 한 번도, 아니 아무도 방문을 안 했다.[12] 의외로 그의 지역구에서 당시 유력한 대권 후보이자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었던 박근혜가 이곳에서 적극적인 유세 활동을 벌였는데 이는 새누리당 측에서 조경태 의원이 상당한 강적임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 2012년 이후로는 본인이 당내 지지층을 갉아먹는 행보를 보인 것도 있었다. 김한길 대표 시절에 최고위원을 했던 당시에도 지역 현안과 관련된 내용을 읊었던 정치인이라 지역민의 평판은 좋았지만 당 주류이자 부산시당의 다수를 이루는 친문 인사들과 다양한 현안에서 끝없이 대립각을 펼친 탓에 당 지지층뿐만 아니라 지역 당원으로부터도 지지를 잃은 정황들이 포착되었다. 재선 의원 당시 부산시당위원장 선거에서 낙마한 적도 있고, 막말 논란으로 징계위에 회부되었을 때 그의 지역구인 부산 사하 을 당원들이 그에 대해 중징계를 내리라고 청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또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 언론사가 지역 여론을 취재했는데 몇몇 노년층 유권자들이 ''조경태가 일은 정말 잘한데이. 그런데 요즘 들어 와 자꾸 문재인한테 개겨서 일을 만드노?"라는 말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13]
- 이렇게 민주당 내에서 입지가 약했던 탓에 누구도 어려울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최고위원직에는 자력으로 당선된 적이 있다. # 하지만 2014년 7.30 재보궐선거 패배 책임으로, 지도부 총 사퇴와 동시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때문에 정무감각이 없다는 소리도 듣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 정계 입문 후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당론과 다른 행보를 자주 보여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정체성을 의심받는 일이 더러 있었고, 특히 골수 강경파인 정청래 의원에게 자주 공격받았다. 이 때문에 둘의 사이는 굉장히 견원지간이다. 정청래 의원은 운동권 출신이라 진보 성향이 뚜렷해 보수 성향이 진한 조경태 의원과는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정청래는 조경태를 향해 "내무반에 총질 말라.",[14] "민주당에 쓴소리 하듯이 박근혜 정부를 비판해 본 적이 있는가."라고 비난했고 이에 대해 조경태는 원전 비리, 밀양송전탑 문제, 대일 외교 저자세 등에 대해 비판해 왔다고 반박했다. 세월호 참사 관련 김현 의원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 때도 조경태 의원의 "당에 물의를 일으킨 김현을 출당시키고 일벌백계해야 한다."라는 발언에 정청래 의원은 "조경태를 출당시켜야 한다."라고 반박했다. 이 때문인지 민주당에 오랫동안 몸담았고 PK 3선 의원이라는 민주당 입장에서 나오기 쉽지 않은 기록을 세운데다 한때 원조 친노로 분류됐을 정도였음에도 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15] 위에 나온 정청래와의 설전이 대표적인 예. 과거 보수정당에 몸 담았다가 민주당계 정당으로 넘어온 손학규나 진영, 김부겸이 양대 정당의 험악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당 소속, 심지어 범친박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과도 아직까지 막역한 사이인 것을 보면 꽤 씁쓸한 부분이다.[16]
- 사실 애초에 조경태는 정계 데뷔부터가 진보 정치인들과는 연관이 없는 편이다. 민주당에 있을 때도 당 내에서 보수적인 편이었던 데다 신보수인사라고 분류되었으니, 진보 강경파인 정청래 의원과 마찰을 빚는 건 당연지사일 터. 이는 조경태가 친문을 친노의 후예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17] 꼬마민주당에서 정계 데뷔를 했으나, 합당 때 조순, 이기택, 김부겸, 강창성, 제정구와 같이 넘어왔다가 16대 총선 공천 때 진영과 다르게 고배를 마시고 탈당 직후 민주당으로 넘어왔다. 국립대인 부산대학교를 다닐 때도 가난했던 집안 때문에 고학으로 졸업할 정도였으니 운동권과 연이 없기도 했다.[18] 다만, 군사정권 자체는 운동권보다도 적대적으로 본다. 2019년 정의당에서 한창 비례대표제 확대를 요구했을 당시, "비례대표는 유신정우회 때 나온 것이다. (독재)정권의 거수기 역할을 한 것이 비례대표인데 무슨 확대요?"라고 비판하며, 정의당은 물론이고 군사정권까지 세트로 비판했을 정도.# 다만 해당 발언은 사실관계가 명확히 잘못된 발언이다.[19]
- 개인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한다. 정계 입문도 노무현에 의해 영입되었고,[20] 한때 원조 친노라고 불렸을 정도로 줄곧 노무현의 최측근으로 있었다. 대표적으로 반노였던 후단협이 맹비난할 당시, 끝까지 노무현을 비호한 적도 있었고, 보수 정당으로 당적을 바꾼 지금까지도 노무현 추도식에 매년 참석하고 있다. 이는 노무현 10주기 추도식 때도 보여지는데,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황교안이 불참했을 때도 조경태는 자유한국당 의원 신분으로 참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통합 뜻을 받들어야 한다."며 여야 모두를 비판한 적도 있었다. 다만 친노의 후예로 여겨지는 문재인 및 친문 세력과는 사이가 나쁘다. 조경태가 처음부터 문재인을 비판한 건 아니었고, 노무현 사후 문재인이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노선이 달라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첫 당선 당시, 노무현이 "조경태 학습법을 배워야 한다."고 극찬했을 정도다. #
- 은근히 김범수와 외모가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정말 닮았다.
- 보수 정당 소속 PK 다선 의원들 중 인지도, 지역구 장악력, 인기가 높은 편이라 차기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매년 주목받고 있다. 그간 차기 부산시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었던 김세연 의원이나 박민식 전 의원에 비해 의원 선수도 높고 본래 민주당 출신이라 중도 확장성도 저 둘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 이 때문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김세연 의원과는 은근히 기싸움이 오갔다. 대표적으로 강남 병 공천 사태 당시 김세연 의원이 "이 정도는 쿨하게 넘어가주자"라고 했던 데에 조경태 수석 최고위원이 절대 안 된다며 공관위를 압박해서 공천을 철회시키는 일이 있었다. 한편 해운대구 갑에서 조경태와 비슷한 스코어[22]로 민주당 후보를 털어버린 하태경 의원도 부산시장 후보군에 꼽혔으나, 22대 총선을 앞두고 서울 출마를 선언했던 만큼 다시 부산에 내려올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 민주당계 정당에 소속되었던 시절에는 소속 의원들이 종편 채널 출연을 거부하던 것과는 달리 박지원 의원과 더불어 종편 채널에 자주 출연하였다.
- 국제 문제에 관심이 많고 다문화 정책 제정에도 힘쓰고 있는 국회의원 중에 한 명이다. 2017년 자유한국당 의원 시절 다문화가족 지원센터협회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2018년에는 한국당 난민대책특위 위원장으로 일했다.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자신의 보좌관 출신이었던 노재갑을 계속해서 공천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노재갑이 5회 지방선거에서 민주당(2008년) 소속으로 비례 시의원으로 당선되긴 했지만 6회 지방선거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사하구청장 선거에서 새누리당 이경훈 후보에게 25%p차로 대패하였고 이후 당적을 옮겨 7회, 8회에서는 사하구청장 예비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경선에서 패배했다.
- 웃통을 까면서까지 선거에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설명하겠다는 의미에서 메가스터디 정치와 법 강사 최적이 1996년 국회의원 포스터를 '선거게임' 강좌에서 활용했다.
소속 | 기간 | 비고 |
1988 - 1990 | 입당[25] | |
1990 | 탈당[26] | |
1990 - 1991 | 창당 | |
1991 - 1995 | 합당[27] | |
1996 - 1997 | 합당[28] 정계 입문 | |
1997 - 2000 | 합당[29] | |
2000 | 탈당[30] | |
2000 - 2003 | 입당 | |
2003 | 탈당[31] | |
2003 - 2007 | 창당 | |
2007 | 탈당[32] | |
2007 - 2008 | 창당 | |
2008 | 합당[33] | |
2008 - 2011 | 당명 변경 | |
2011 - 2013 | 합당[34] | |
2013 - 2014 | 당명 변경 | |
2014 - 2015 | 창당[35] | |
2015 - 2016 | 당명 변경 | |
2016 | 탈당[36] | |
2016 - 2017 | 복당[37] | |
2017 - 2020 | 당명 변경 | |
2020 | 창당[38] | |
2020 - 현재 | 당명 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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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67년 12월 11일[2] #[3] 24세손 ○태(泰)자 항렬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30세손 ○래(來)자 항렬이다. 그리고 족보명은 태래(泰來)이며, 아버지는 조재제(趙在濟)다.#[4] 석사 학위 논문 : 軟弱地盤(연약지반)의 盛土(성토)에 따른 近接構造物(근접구조물)의 影響抑制(영향억제) 對策(대책)에 관한 硏究(연구)(1994).[5] 박사 학위 논문 : 一次元(일차원) 壓密試驗(압밀시험)에 의한 洛東江(낙동강) 河口(하구) 粘土(점토)의 크리프 特性(특성)에 관한 實驗的(실험적) 硏究(연구)(1999. 2).[6] 소집해제[7] 예장합동 소속 신평로교회의 집사이다.[8] 국민의힘 3차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마하며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규정' 제26조 6항'에 따라 당직에서 사퇴했다.[9] 국민의힘에서 한 지역구에 내리 6선 이상 눌러앉은 사람은 조경태가 유일하다. 주호영도 내리 6선이지만 수성구 을 4선+수성구 갑 재선으로 수성구 내에서 지역구를 한 번 옮겼다. 더불어민주당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대전 서구 갑과 시흥시 을에서만 6선을 한 박병석 前 국회의장(16~21대)과 조정식 의원(17~22대) 정도밖에 없다. 이들의 나이가 현재 각각 60~70대이고 당직 생활에서 두각을 드러낸 후 40대에 정치를 시작한 것에 비하면 36세부터 60세까지 24년을 국회의원으로 보내게 된다는 것은 인생의 본업이 국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20대부터 정치인으로 살아왔고, 만 28세부터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을 감안하면 인생 자체가 정치인이었다.[10] 22대 총선에서 부산 유일의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전재수도 개인 기량이 뛰어나고 지역구 내에서 평판이 좋은데, 실제로 21대 국회에서 조경태 다음으로 부산광역시 국회의원 공약이행률이 높은 사람이 전재수다.[11] 초선 당시에는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높았던 시절이었고, 한 번은 친박, 비박 이렇게 보수 후보가 2명이 나와 보수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도 있었다.[12] 여기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조경태가 "나야말로 원조 친노"라는 발상 + 친문 선거전이 선거에 유리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지도부와 처음부터 거리감을 드러냈다는 것, 혹은 친문에서 조경태를 동지가 아니라고 생각해 경원시했다는 설이 있다. 이후에 벌어진 역사를 고려하면 이 세 가지가 모두 작용한 것 같다(...)[13] 이 당시 문재인은 노무현의 남자였고, 사상구에서 과반으로 당선된 것을 보아도, 노년층의 지지율도 어느 정도 가져와서 이긴 것도 있었다.[14] 근데 정작 정청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어서 군면제를 받았다.[15] 다만 정청래도 자신의 지역구 관리는 조경태 뺨칠 정도로 잘 한다. 17대부터 21대까지 그의 지역구를 아예 손혜원이 물려받아서 했을 정도로 정청래의 지역구 파워는 대단했다. 그도 그럴게 마포구의 숙원 사업이 정청래한테 가니까 다 해결됐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 거기에 정청래나 조경태나 절대 상대방에게 지고는 못 사는 쌈닭들이라, 애초 섞일 수가 없는 존재였다.[16] 손학규는 민주당계 정당에 10년 이상 몸담으며 대표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한때 보수정당 소속으로 활동한 기간도 꽤 길었기 때문에 이명박, 홍준표, 이재오, 김문수 등과는 막역한 관계라고 한다. 진영의 경우에는 문재인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됐음에도 불구하고 현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서 "지금 당하고는 잘 맞는거 같냐?", "다시 우리 당에 오면 안 되냐?"라는 식의 말을 주고받는게 청문회장이나 국정감사장에서 나올 정도. 여담이지만, 진영은 "다시 우리 당에 오면 안 되냐"는 말에 "안 갑니다."라고 답변해서 웃음을 줬다. 20대 총선 당시, TK에서 당선된 적이 있는 김부겸은 대구경북의 보수정당 국회의원들이 김부겸을 통해서 행정이나 예산문제를 처리했다고 했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인데다 홍준표, 주호영 등과도 상당히 친한 사이다.[17]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해찬도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나와서 "노무현과 문재인은 노동운동 시절부터 다른 행보를 보였던 사람."이라며, 그 둘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꺼낸 적도 있다. 문재인은 줄줄이 경위서를 다 썼지만, 노무현은 단 한줄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18] 이후 민주당계 정당에서 조경태처럼 고학으로 졸업해, 운동권과 거리가 멀었으나 시민단체를 거치며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는 이재명이 계승한다. 이재명 또한 애초 장학금을 받고 들어온 케이스에다 형인 이재선의 취업까지 도와줘야했던 시절이라 운동권에 관심을 둘 여유 따윈 없었다. 둘 다 노무현 때문에 정계에 들어온 것도 비슷하다. 언더독이였다가 주류로 올라온 것까지. 다만, 현시점에서는 조경태한테든 이재명한테든 이 둘을 언더독이라곤 하지 않는다.[19] 일단 '한국에서' 비례대표제의 전신인 전국구 제도는 박정희 정권 당시 시작된 것이기는 하나 유신 이전인 6대 국회에 처음 도입된 것이고, 게다가 이 시기의 전국구 국회의원 제도는 양당제 구도 촉진을 위한 인위적 가공이 가해져 있는 등 보편적인 비례대표제의 제도적 지향점에 비주어보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최소한 유권자가 어느 정당에 투표할지는 직접 선택할 수 있던 제도로 아예 대통령이 직접 거수기를 임명하는 제도였던 유신정우회와 비교할 수는 없다.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주장한 것이거나 비례대표제에 대해 나쁜 인상을 주기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이 아닌가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 결정적으로 비례대표는 내각제를 시행하는 일본이 이미 몇십년 전부터 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석패율제로 해서 지역구에서 떨어져버리면, 비례로 구제하는 방법까지 한국 여야 정치권에서 논의됐을 정도.[20] 이 때 같이 영입됐던 인사가 철완으로 유명한 야구선수 최동원이였다.[21] 지식경제위원회에 함께 소속되었을 당시 예산안 삭감 문제를 가지고 날선 공방이 나왔고, 이 외에도 여러번 언쟁이 있었다.[22] 조경태 58%, 하태경 59%.[23] 17대 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함께해온 5선 의원 가운데 김진표 후반기 국회의장은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중도에 사퇴했다가 남경필 후보에게 지고 낙선한 이력이 있기에 19대 국회 이력이 2년 비는데다, 기존 지역구인 수원시 정(구.수원시 영통구) 선거구는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박광온 의원이 당선되었기에 20대 총선부터는 신설된 수원시 무 선거구로 옮겨 당선되었으며, 국회의장 역임 후 정계에서 은퇴하는 관례 때문에 22대 총선에는 불출마하였으며, 더불어민주당 안민석(경기 오산시), 변재일(충북 청원군→충북 청주시 청원구) 의원은 컷오프,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 후 국민의힘으로 이적한 이상민 의원(대전 유성구→대전 유성구 을)은 낙선하였다.[24] 주호영의 경우에는 17~20대에는 대구 수성구 을에서 활동하다가 21대 총선부터는 인접 지역구인 수성구 갑으로 옮겼다.[25] 당시 노무현 부산 동구 국회의원 후보 선거봉사단 활동으로 입당[26] 3당 합당 반발로 인한 탈당[27]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28]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29]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30]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31]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32] 대통합민주신당 입당을 위한 탈당[33]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당 합당[34] 시민통합당과 합당[35]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3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37] 16년 만의 복당이다. 한나라당에서 짧은 기간 동안 있었고 한나라당 당적으로는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는데다, 탈당한 지가 오래돼 기억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대부분의 언론들이 '입당'이라고 표현했지만 엄밀히는 '복당'이 맞다.[38]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39]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탈당, 새누리당 복당.[40] 2017.02.13 새누리당→자유한국당 당명 변경.[41] 2020.09.02 미래통합당→국민의힘 당명 변경.[42] 역사 순으로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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