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헤르만 프랑크
최근 수정 시각:
이름 | Karl Hermann Frank 카를 헤르만 프랑크 |
출생 | |
사망 | |
국적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8년 ~ 1945년) |
최종계급 |
카를 헤르만 프랑크(Karl Hermann Frank))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고향인 카를스바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로서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했다. 프랑크는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뷔코비츠에서 공무원으로 일한 후 서점에서 근무하다가 1932년부터 카를스바트에서 서점을 경영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독일 우익단체에 소속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한 프랑크는 1933년 10월 1일에 '주데텐 독일향토전선'이라는 단체에 참가했다. 프랑크는 주데텐 독일향토전선의 준군사조직 창설에 관여했는데 1935년 4월 19일에 결사명이 '주데텐 독일인민당, 약칭 SdP'로 바뀌면서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5년 5월 19일에 이루어진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선거에서 카를스바트의 선거구에 SdP의 후보로 출마한 프랑크는 바로 당선되었다. 1935년 12월에 SdP 당수 대리로서 당 중앙정치국 국장에 취임한 프랑크는 주데텐란트의 나치 독일 편입 입장을 견지했다. 1938년 10월에 주데텐란트 지방이 독일에 할양되자 프랑크는 11월 1일에 SdP에서 나치당으로 이적하여 이 날, 하인리히 힘러의 초청으로 친위대에 입대해 친위대 소장 계급을 부여받았다. 1938년 12월 4일에는 주데텐란트에서 선거에 출마해 나치 독일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5.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의 행적[편집]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카를 헤르만 프랑크 |
1939년 4월 28일에 나치 독일에 병합된 체코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가 된 프랑크는 유대인과 반체제 분자의 색출에 열을 올렸다. 원래 총독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였지만 그는 히틀러의 눈 밖에 나 1941년 9월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프랑크는 하이드리히의 자리를 노렸기 때문에 처음엔 하이드리히와 대립했지만 이후 하이드리히와 가까워져 부관으로서 함께 했다. 그러던 와중에 1942년 5월 27일, 하이드리히가 영국의 체코망명정부의 암살부대에 의해 습격당하여 사망하자 프랑크는 바로 체코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심되는 체코인 157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하이드리히가 죽자 실권을 노렸지만 히틀러와 힘러는 후임으로 쿠르트 달루게를 보냈다. 새로운 부총독인 달루게는 총통 명령에 근거하여 체코인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실시했다. 9월 1일까지 3,188명의 체코인이 체포되어 그 중 1,357명이 즉결처형되었다. 1943년 8월에 달루게가 병석에 누우면서 부총독을 사임하자 드디어 프랑크가 체코의 실권을 잡기 시작했다. 1943년 8월 20일에 히틀러 내각의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체코) 담당장관직이 신설되자 프랑크는 그 장관으로 취임했다. 대전 말기에 일어난 프라하 폭동에서 프랑크는 잔인무도한 진압을 실시하여 라디오에서
"폭동을 일으킨 자는 피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다."
라고 경고했다. 프랑크는 연합군을 환영하려는 군중에게 독일군과 경찰을 동원해 발포하여 수많은 체코인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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