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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나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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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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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과 재판
학살 사건
생체 실험
기타
※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슈츠슈타펠 문장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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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P : 질서경찰 계급 겸임
에리히 나우만
이름
Erich Naumann
에리히 나우만
출생
사망
1951년 6월 7일 (향년 46세)
서독 바이에른주 란츠베르크 형무소
복무
슈츠슈타펠 (1935년 ~ 1945년)
최종계급
1. 개요2. 초기 행적3. 제2차 세계 대전4. 전후 재판과 처형

1. 개요[편집]

2. 초기 행적[편집]

작센 왕국 마이센에서 태어난 에리히 나우만은 16세에 학업을 마친 후 상점에서 견습점원으로 일했다.
에리히 나우만1
돌격대원 시절의 나우만

1929년나치당에 입당한 그는 돌격대에도 가입했지만 긴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친위대로 이적했다. 1935년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친위대 본부 대외첩보부 부장이던 하인츠 요스트 휘하에서 일한 나우만은 뉘른베르크의 보안경참 감독관을 지냈다.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아인자츠그루펜 VI의 사령관이 된 나우만은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인 1941년 11월아인자츠그루펜 B 부대의 사령관이 되어 1943년 2월까지 1년간 이 부대를 이끌었다. 그 사이 유대인을 비롯한 수많은 포로를 총살하였는데, 특히 스몰렌스크에서 17,000명을 처형한 책임자이기도 했다. 1942년 12월에 나우만은 베를린에 134,298명을 처형했다고 보고했었다.

4. 전후 재판과 처형[편집]

나우만 재판

1943년 9월부터 1944년 7월까지 네덜란드의 보안경찰 및 친위대 사령관으로 일한 나우만은 베를린 공방전 때 시내에 있었지만 살아남아 전후 뉘른베르크 특수작전집단 재판에서 아인자츠그루펜 사령관으로 기소되었다. 나우만은 총살형 및 가스로 인한 처형도 했다고 인정했다. 사형판결을 받은 그는 1951년 6월 7일에 다른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들과 함께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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