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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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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슈츠슈타펠 문장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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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데크피르몬트 후국 공세자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
Josias, Erbprinz zu Waldeck und Pyrmont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
이름
요시아스 게오르크 빌헬름 아돌프 추 발데크피르몬트
(Josias Georg Wilhelm Adolf zu Waldeck und Pyrmont)
출생
사망
1967년 11월 30일 (71세)
서독 라인란트팔츠주 디츠 샤움부르크 성
배우자
올덴부르크의 알트부르크 여공작 (1922년 결혼)
자녀
마르가레테, 알렉산드라, 잉리드, 비테킨트, 구다
아버지
발데크피르몬트 공 프리드리히
어머니
샤움부르크리페의 바틸디스 공녀
형제
막시밀리안, 헬레네, 게오르크
복무
슈츠슈타펠 (1930년 ~ 1945년)
최종계급
주요 참전
1. 개요2. 초기 행적3.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입당4. 친위대 행적5. 전후 전범 재판과 사망6. 여담

1. 개요[편집]

독일의 왕공족.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카를 에두아르트의 사촌이다.

2. 초기 행적[편집]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의 수도였던 아롤젠(Arolsen)에서 태어난 요시아스는 아버지가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프리드리히였다.[1] 1912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요시아스는 제1차 세계 대전독일제국군 육군에 복무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1917년에 소위로 승진한 후 1,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한 그는 대전 말기에 독일 혁명에 의하여 독일 제국발데크피르몬트 공국이 붕괴하자 작위와 계승권을 잃고 말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에서 요시아스는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반혁명 의용군에 참가했다.
잠시 농학 공부를 하다가 1929년 11월 1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한 요시아스는 1930년 3월 2일에 친위대 대원이 되었다. 뮌헨의 친위대 제1연대, 친위대여단 바이에른, 친위대 남방집단사령관으로 일하다가 6월하인리히 힘러의 개인부관이 되었다. 나치 정권이 탄생하기 전부터 친위대에 입대한 요시아스는 공족가문 출신자여서 힘러로부터 중용되었다. 1933년 11월뒤셀도르프 서부지구에 출마하여 나치당의 국회의원이 된 요시아스는 1934년 6월 30일장검의 밤 사건당시 체포된 돌격대 지도자들의 사형집행을 주도했다.

4. 친위대 행적[편집]

요시아스 발데크 피르몬트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요시아스
1934년 6월부터 1935년 6월에 해체되기 전까지 친위대의 연락사무소인 제5 특무집단 참모부 부장으로 일한 요시아스는 1935년 5월부터 1936년 12월 31일까지 라인지구 친위대 상급지도자가 되었다. 1937년 1월에 훌더 벨라 친위대 상급지구가 조직되자 그 사령관으로도 취임했다. 1938년부터 고다와 바이마르, 카셀, 그리고 자신의 고향인 구 발데크피르몬트 영지에서 친위대와 경찰관료로 일했는데 본부는 부친의 옛 성이었다. 이후 독일이 패전하기 전까지 현지의 지위를 유지했다. 바이마르 교외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도 그의 관리하에 있었지만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장이던 카를 오토 코흐 SS 대령과 사이가 나빠 1941년부터 그의 부패 경력을 조사하여 조사를 진행하자 하인리히 힘러의 동의를 구한 후 그를 체포했다. 친위대 재판권을 갖고 있던 요시아스는 코흐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는데 당시 전선에 보내어 죄를 치르게 하던 일반적인 관행을 막기 위하여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를 떠나기 직전에 그를 총살형에 처했다. 패전직전에 그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을 타 수용소로 이송시 남겨진 수용자들을 모두 말살하려고 했었다.

5. 전후 전범 재판과 사망[편집]

피르몬트2
재판에 회부된 요시아스
1945년 4월에 연합군에 체포된 요시아스는 1947년 8월다하우에서 미군의 군사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12월에 건강악화를 이유로 가석방된 그는 1953년에 헤센 주총리로부터 사면받고 벌금형이 감경되었으며, 1967년라인란트의 샤움부르크 성에서 사망했다.

6. 여담[편집]

  • 요시아스는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의 막내여동생 알트부르크[2]과 결혼했는데, 니콜라우스는 반대로 요시아스의 유일한 여동생인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와 결혼했다. 즉 남매가 겹사돈이다. 흥미롭게도 니콜라우스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사실상) 1남 3녀 중 유일한 아들이였고, 아내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는 반대로 3남 1녀 중 고명딸이였다. 또한 자녀들의 성별도 정반대인데 니콜라우스와 헬레나 부부는 슬하에 아들이 딸보다 많지만(6남 3녀), 성별이 바뀐 요시아스와 알트부르크는 슬하에 아들보다 딸이 더 많다.(1남 4녀)
  • 아들 비테긴트 추 발데크피르몬트는 슬하 3남을 두었다.
  • TNO에서 카우카지엔의 지도자로 등장하는데, 설정상 서러시아 전쟁에서 자캅카스 빨치산에게 고문을 받았던 흔적이 초상화의 긴 흉터로 남아있고, 고문받기 전엔 오스트란트와 같이 모범 식민지, 즉 온건적 통치를 했지만 고문받은 후엔 후유증 때문에 빨치산 소탕과 부르군트 체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 어머니는 샤움부르크리페 후작 빌헬름의 딸인 바틸디스이다.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넷째 누나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빌럼 3세의 두번째 왕비가 되어 빌헬미나 여왕을 낳았다. 프리드리히의 다섯째 누나인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와 결혼해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카를 에두아르트를 낳았다. 이런 관계로 빌헬미나 여왕, 앨리스 공녀, 카를 에두아르트는 요시아스의 고종사촌이다. 또한 빌헬미나 여왕은 요시아스의 아내인 알트부르크 여공작의 외숙모이기도 하다.[2]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막내딸로, 알렉산드리네 왕비체칠리에 황태자비,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여왕의 고종사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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