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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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아우구스트 에들러 폰 마이츠너 August Edler von Meyszner | |
출생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라츠 | |
사망 | |
국적 | |
직업 | 군인 |
복무 | |
신체 | 193cm |
계급 | |
참전 |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의 군인, 정치인이다.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는 1886년 8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귀족 루돌프 에들러 폰 마이츠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폰 마이츠너는 왕립 연대에서 장교 생활을 했으며, 1914년 오스트리아 헌병대에서 복무하기 사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폰 마이츠너는 헌병대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패전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지면서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다.
1925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폰 마이츠너는 우익 정치인, 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치당을 금지하면서 폰 마이츠너는 의원직을 상실했고, 헌병대에서도 강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폰 마이츠너는 돌격대에 들어갔고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 나치 지도자들을 만났다. 7월 폭동으로 체포된 폰 마이츠너는 탈출하여 유고슬라비아로 도주했고, 동료였던 콘스탄틴 카머호퍼[1]도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했다.
독일에 도착한 폰 마이츠너는 일반친위대에 입대 신청을 하여 1935년 2월 14일 상급대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또한 5월에 독일 시민권을 얻었으며 질서경찰에도 합류했다. 그는 돌격대에서 명예 제대를 했고, 아직 경찰이 친위대의 일원이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10월 친위대에서 사임했다. 이후 1937년 10월 친위대 재입대가 허용되었고 상급대령으로 복귀했다. 1938년 3월 18일 경찰 대령으로 승진했고, 4월 12일부터 오스트리아 질서경찰의 감독관으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배정되었다. 그러나 폰 마이츠너는 칼텐브루너와 충돌했고 결국 쿠르트 달루게가 개입해야 했다.
전쟁이 발발한후 폰 마이츠너는 여러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1940년 초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에 의해 풀다-베라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임명됐다. 9월 10일 하인리히 힘러는 노르웨이에서 친위대 대장 빌헬름 레디스와 협력할 질서경찰 지휘관으로 폰 마이츠너를 지명했다.
1942년 1월 1일 폰 마이츠너는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경찰 중장으로 승진했다.
폰 마이츠너는 1942년 1월 24일부터 1944년 4월 1일 세르비아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부임하면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실제로도 "나는 살아있는 세르비아인보다 죽은 세르비아인이 더 좋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폰 마이츠너는 1942년 1월 24일부터 1944년 4월 1일 세르비아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부임하면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실제로도 "나는 살아있는 세르비아인보다 죽은 세르비아인이 더 좋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폰 마이츠너와 아르투어 플렙스 |
[1] 폰 마이츠너처럼 나중에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으로 승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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