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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폰 보이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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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슈츠슈타펠 문장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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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첨자P : 질서경찰 계급 겸임
보이르슈
이름
Udo Gustav Wilhelm Egon von Woyrsch
우도 구스타프 빌헬름 에곤 폰 보이르슈
출생
1895년 7월 24일, 독일 제국 슐레지엔주 슈바노비츠
(現 폴란드)
사망
1984년 1월 14일,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비베라흐안데어리스
복무
슈츠슈타펠 (1930년 ~ 1945년)
무장친위대 (1945년)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질서경찰 대장
주요 참전
1. 개요2. 초기 행적3.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가입4. 제2차 세계 대전5. 전후 재판과 행적

1. 개요[편집]

보이르슈2
우도 폰 보이르슈 (Udo von Woyrsch)
나치 독일의 친위대 대장이다.

2. 초기 행적[편집]

독일 제국 프로이센령이던 슐레지엔의 슈바노비츠[1]에서 보이르슈는 군인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척중, 레무스 폰 보이르슈는 독일제국군의 원수였다. 사립학교를 졸업한 뒤 베를린의 리히터페르데 사관학교에 입학해 제1차 세계 대전때 소위로서 종군해 병참부대와 기관총 부대, 기병부대 등에서 근무하여 패전 당시 중위계급으로 1,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독일의 패전 후 실레지아의 국경부대에 배속했던 보이르슈는 1920년 10월에 제대하여 부동산을 경영했다.
192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문의 토지를 상속받아 관리하게 되었는데 1929년 10월 1일나치당에 입당한 후 1930년 6월 10일나치 친위대에 가입했다. 1934년장검의 밤 사건당시 라이벌이던 친위대 상급대령 에밀 젬바흐를 처형하였는데 1935년 1월 1일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우도 폰 보이르슈
1935년 1월부터 1940년 4월에 걸쳐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참모로 일했던 보이르슈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인 1939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폴란드령이었던 서 프로이센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을 지휘해 유대계 주민과 반독주의자를 총살했다. 1940년 4월부터 1944년 2월까지 엘베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를 역임했다. 1941년 질서경찰 대장으로 승진한 보이르슈는 마르틴 무치만과의 갈등으로 1944년 2월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의 직위에서 해임되어 후임으로 루돌프-헤르만 폰 알펜슬레벤이 임명되었다. 힘러의 지시에 따라 직위에서 해임된 보이르슈는 자신의 영지로 추방되었다가 1945년 1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여 민간인 송환 업무를 맡았다.

5. 전후 재판과 행적[편집]

전후 보이르슈
전후의 우도 폰 보이르슈
1945년영국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의 피고 중 한명인 요아힘 므루고프스키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했다. 이후 1948년 재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은 보이르슈는 1952년에 석방되었다가 1957년장검의 밤 사건 관련 혐의로 다시 재판에 세워졌지만 1960년에 석방되어 1984년에 사망했다.
[1] 현재의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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