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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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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슈츠슈타펠 문장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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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P : 질서경찰 계급 겸임
친위대 여단지도자
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
Karl Eberhard Schöngart
쇤가르트1
이름
Karl Georg Eberhard Schöngart
카를 게오르크 에버하르트 쇤가르트
출생
사망
복무
최종계급
주요 참전
1. 개요2. 행적3. 제2차 세계 대전4. 전후 재판과 최후

1. 개요[편집]

쇤가르트2
나치 독일의 친위대 및 질서경찰 소장이다.

2. 행적[편집]

독일 제국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쇤가르트는 1922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 에어푸르트의 독일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했다. 이 해 나치당에 입당하고 돌격대에 가입한 쇤가르트는 1923년뮌헨 폭동에 참가하여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하지만 나치당의 해산으로 인해 잠시 나치당을 떠난 그는 1924년에 은행에서 사직하고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했다.
쇤가르트3
나치당원 쇤가르트
1928년 7월 28일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쇤가르트는 1933년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 복당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1933년부터 1935년에 걸쳐 빌렌페르트, 도르트문트, 뮌스터의 주 경찰지휘관으로 일한 쇤가르트는 1936년부터 친위대 본부에 배속되어 1939년엔 작센 주의 보안경찰 감독관이 되었다.
1941년폴란드 크라카우의 보안경찰 및 친위대사령관으로 부임한 쇤가르트는 1942년 1월 20일의 유대인 처리를 위한 반제 회의에 보안경찰과 친위대 대표로 참석했다. 1943년 7월무장친위대 제4 SS 경찰장갑척탄병 사단에 배속된 쇤가르트는 1944년네덜란드의 하그에서 보안경찰 및 친위대 사령관으로 이동했다.

4. 전후 재판과 최후[편집]

독일의 패전 후, 하멜른에서 영국군에 체포된 쇤가르트는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반제 회의의 책임자, 전쟁지휘자로 사형판결을 받고 1946년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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