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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그라이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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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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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과 재판
학살 사건
생체 실험
기타
※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울리히 그라이펠트의 주요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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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츠슈타펠 문장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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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P : 질서경찰 계급 겸임
그라이펠트1
이름
Ulrich Heinrich Emil Richard Greifelt
울리히 하인리히 에밀 리하르트 그라이펠트
출생
독일국 베를린
사망
1949년 2월 6일 (향년 52세)
독일 란츠베르크
복무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질서경찰 대장
주요 참전
1. 개요2. 초기 행적3.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입대4. 제2차 세계 대전5. 전후 재판과 최후

1. 개요[편집]

2. 초기 행적[편집]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던 베를린에서 약사였던 부모아래 태어난 그라이펠트는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8월에 제48 보병연대에 배속되어 제3 근위저격병 대대에 입대했다. 1915년 3월에 사관후보생이 되어 7월에 소위로 임관했는데 1916년 8월에 항공대로 이적하여 조종사가 된 후 정찰비행을 담당하다가 패전 후 리가의 군정부에서 일했다. 전후 의용군에 참가한 그라이펠트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베를린의 전기회사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회사가 도산하면서 실업자가 된 그는 히틀러 내각이 성립된 후인 1933년 4월 1일나치당에 입당해 6월 18일나치 친위대에 입대했다. 친위대 국가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의 참모가 되어 친위대 본부에서 근무했다. 그라이펠트는 사상보다는 통계학에 능한 인물이었는데 1935년 6월부터 1937년 2월까지 친위대 본부의 참모장이 되어 1937년에 친위대 국가지도자의 참모부에 설치된 4개년 계획 사무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38년 3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친위대 본부의 관방장관으로도 일했다. 4개년 계획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인력보충을 위해 300만명에 달하는 국외거주 독일인, 독일계 국민의 귀환사업으로 1939년 7월에 이탈리아의 남 티롤지방의 독일계 민족이 독일귀환을 그라이펠트가 진두지휘했다.
울리히 그라이펠트와 장군들
그라이펠트와 친위대 지도자들[1]
1939년 10월 7일에 독일민족성강화 국가위원사무국장으로 취임한 그라이펠트는 동유럽의 독일계 민족을 독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다시 지휘했다. 그리고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기업과 농지를 차례로 빼앗은 후 이를 독일계 이민자들에게 주었다.

5. 전후 재판과 최후[편집]

그라이펠트 재판1
그라이펠트 재판2
재판에 회부된 그라이펠트
전후 연합군에게 체포된 그라이펠트는 친위대 인종 및 이주본부재판에 넘겨져 1948년 5월 10일종신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1949년에 옥중에서 병사했다.

[1] 맨 오른쪽이 그라이펠트이다. 맨 왼쪽부터 고틀로프 베르거, 콘라트 마이어-헤틀링, 막스 토마스, 쿠르트 크노블라우흐[2], 오토 폰 욀하펜이다.[2]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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