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그라이펠트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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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Ulrich Heinrich Emil Richard Greifelt 울리히 하인리히 에밀 리하르트 그라이펠트 |
출생 | |
독일국 베를린 | |
사망 | |
독일 란츠베르크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
최종계급 | |
주요 참전 |
대공황의 여파로 회사가 도산하면서 실업자가 된 그는 히틀러 내각이 성립된 후인 1933년 4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해 6월 18일에 나치 친위대에 입대했다. 친위대 국가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의 참모가 되어 친위대 본부에서 근무했다. 그라이펠트는 사상보다는 통계학에 능한 인물이었는데 1935년 6월부터 1937년 2월까지 친위대 본부의 참모장이 되어 1937년에 친위대 국가지도자의 참모부에 설치된 4개년 계획 사무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38년 3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친위대 본부의 관방장관으로도 일했다. 4개년 계획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인력보충을 위해 300만명에 달하는 국외거주 독일인, 독일계 국민의 귀환사업으로 1939년 7월에 이탈리아의 남 티롤지방의 독일계 민족이 독일귀환을 그라이펠트가 진두지휘했다.
그라이펠트와 친위대 지도자들[1] |
재판에 회부된 그라이펠트 |
전후 연합군에게 체포된 그라이펠트는 친위대 인종 및 이주본부재판에 넘겨져 1948년 5월 10일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1949년에 옥중에서 병사했다.
[1] 맨 오른쪽이 그라이펠트이다. 맨 왼쪽부터 고틀로프 베르거, 콘라트 마이어-헤틀링, 막스 토마스, 쿠르트 크노블라우흐[2], 오토 폰 욀하펜이다.[2]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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