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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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Karl Friedrich Otto Wolff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
출생 | |
사망 | |
신장 | 189cm |
복무 | 슈츠슈타펠 (1931년 ~ 1945년) |
최종계급 | |
주요 참전 |
나치 독일의 친위대 대장.
세계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1년 10월 7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볼프는 다시 친위대에도 입대했다. 뮌헨에서 광고회사를 꾸려 나가면서도 뮌헨의 친위대 활동에 종사한 볼프는 1932년 2월에 친위대 소위가 되었다.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당무에 전념한 볼프는 친위대 대위로 승진해 나치당의 간부였던 프란츠 리터 폰 에프의 부관이 되어 독일 국방군과의 사이에서 연락장교의 역할을 맡았다. 얼마 후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든 볼프는 1933년 6월부터 힘러의 부관부서인 친위대 국가지도자 개인참모부의 장관이 되었다. 1937년에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한 볼프는 1939년 8월부터 히틀러의 친위대 연락장교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볼프는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이어서 친위대 서열 3위로 올라앉게 되었다. 볼프의 친위대 국가지도자 참모부에는 친위대의 모든 서류 사본이 모아졌다.[1]
1942년 5월에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으로 인해 힘러와 볼프의 관계는 나빠졌다. 이 때 힘러는 볼프를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시키는 한편으로 이탈리아로 파견해 그와 멀리하게 되었다.[2] 볼프는 1943년 2월부터 이탈리아 지역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에서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7월부터는 경찰최고지도자로 승격했다.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이탈리아 북부의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서 근무한 볼프는 이때 아내와 이혼했다. 한편 로마 가톨릭 산하의 이탈리아 신문인 <Avvenire>에 의하면 히틀러는 로마 교황인 비오 12세의 납치를 볼프에게 명령했지만 볼프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1945년에 연합군이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하자 볼프는 이탈리아 방어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가 되어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총력전을 명령했지만 1945년 5월에 독일의 항복으로 볼프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말년의 볼프 |
전후 볼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연합국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친위대의 지도자로서 서독 정부에게 기소되어 1948년 11월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7개월 후 징역 4년으로 감형된 후 가석방된 볼프는 1949년부터 다시 광고회사를 개업했다. 이 때 미국의 CIA에 협력했다고도 하는데 1962년에 다시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때 볼프가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의 강제수용소 이송에 조직적으로 관련했다는 혐의로 서독 정부는 그가 30만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것을 확인하여 다시 볼프를 기소했다. 서독 재판소는 다시 그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지만 1969년에 건강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볼프는 1984년에 로젠하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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