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톨부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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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초대 남부군집단 총사령관 표도르 톨부힌 Фёдор Толбу́хин | Fyodor Tolbukhin | |
본명 | 표도르 이바노비치 톨부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олбу́хин Fyodor Ivanovich Tolbukhin |
출생 | |
사망 | |
묘소 | |
재임기간 | 초대 남부군집단 총사령관 |
초상화 |
모스크바 북동부 야로슬라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업 학교를 졸업한 뒤 회계사로 일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군에 기병으로 자원 입대했고,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성 안나 훈장과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등을 수여받고 대위까지 진급했다. 이후 레닌이 이끈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수립되자 1918년에 붉은 군대로 옮겨 제56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적백내전에 참전했다.
적백내전 종결 후에도 계속 일선 부대를 돌며 참모장을 맡았고, 1927~30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 장교 교육을 받았다. 대숙청으로 군부 고위 장교들이 우수수 갈려나가자 1937년에 처음으로 사단장이 되어 야전 업무를 시작했지만, 1년 뒤 다시 자캅카스 군관구의 참모장으로 옮겨 계속 참모 업무를 수행하면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0년에는 소련군 장성 계급이 부활하자 소장으로 처음 별을 달았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크림 전선군 참모장으로 이임했고, 이듬해에는 스탈린그라드 군관구의 부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부터 참모 업무에서 본격적인 야전 업무가 주가 되었고, 1942년 7월에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소속이었던 제57야전군 사령관에 부임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톨부힌은 제62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추이코프와 함께 독일군의 대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몫을 해냈고, 전투 종결 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3년에는 잠시 제68야전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남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남부 지역에 있던 독일군을 대거 격퇴시킨 공로로 같은 해 4월에 상장으로 진급했다. 이어 8월에는 우크라이나를 탈환하기 위한 드녜프르 대공세와 뒤이은 드녜프르-카르파티아 대공세에서 남서부 전선을 맡은 말리놉스키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구 남서전선군)과 합동 작전을 벌여 독일 남부집단군을 쓸어버렸다.
이 공로로 9월에 대장으로 계속 진급했고, 10월에 남부전선군이 제4우크라이나전선군으로 개칭된 뒤에도 1944년 5월까지 계속 부대를 지휘했다. 이후 말리놉스키가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으로 이임하자 그가 맡고 있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이 되었고, 이전의 두 대공세 때와 마찬가지로 말리놉스키와 공동으로 루마니아에 대한 공세를 벌여 루마니아를 추축국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이 공로로 말리놉스키와 동시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
이후 말리놉스키가 북서부로 방향을 돌려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세를 벌이는 동안 불가리아를 점령해 마찬가지로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이탈시켰고, 이후 말리놉스키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이 심한 병력과 물자 손실을 입자 지원과 조공을 맡아 유고슬라비아의 미점령 지역과 헝가리 남부 지역에서 공세를 진행해 유럽 전선의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전후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헝가리 등에 주둔한 남부군집단사령관을 맡아 해당 지역의 공산당 정권 수립을 지원했고, 1946년에는 소비에트 최고 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947년 1월에는 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으로 이임했는데, 이 시점부터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해 1949년에 모스크바에서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대다수의 소련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고, 1965년 5월에는 소련영웅 칭호를 사후 수여받았다.
적백내전 종결 후에도 계속 일선 부대를 돌며 참모장을 맡았고, 1927~30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 장교 교육을 받았다. 대숙청으로 군부 고위 장교들이 우수수 갈려나가자 1937년에 처음으로 사단장이 되어 야전 업무를 시작했지만, 1년 뒤 다시 자캅카스 군관구의 참모장으로 옮겨 계속 참모 업무를 수행하면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0년에는 소련군 장성 계급이 부활하자 소장으로 처음 별을 달았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크림 전선군 참모장으로 이임했고, 이듬해에는 스탈린그라드 군관구의 부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부터 참모 업무에서 본격적인 야전 업무가 주가 되었고, 1942년 7월에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소속이었던 제57야전군 사령관에 부임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톨부힌은 제62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추이코프와 함께 독일군의 대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몫을 해냈고, 전투 종결 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3년에는 잠시 제68야전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남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남부 지역에 있던 독일군을 대거 격퇴시킨 공로로 같은 해 4월에 상장으로 진급했다. 이어 8월에는 우크라이나를 탈환하기 위한 드녜프르 대공세와 뒤이은 드녜프르-카르파티아 대공세에서 남서부 전선을 맡은 말리놉스키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구 남서전선군)과 합동 작전을 벌여 독일 남부집단군을 쓸어버렸다.
이 공로로 9월에 대장으로 계속 진급했고, 10월에 남부전선군이 제4우크라이나전선군으로 개칭된 뒤에도 1944년 5월까지 계속 부대를 지휘했다. 이후 말리놉스키가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으로 이임하자 그가 맡고 있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이 되었고, 이전의 두 대공세 때와 마찬가지로 말리놉스키와 공동으로 루마니아에 대한 공세를 벌여 루마니아를 추축국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이 공로로 말리놉스키와 동시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
이후 말리놉스키가 북서부로 방향을 돌려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세를 벌이는 동안 불가리아를 점령해 마찬가지로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이탈시켰고, 이후 말리놉스키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이 심한 병력과 물자 손실을 입자 지원과 조공을 맡아 유고슬라비아의 미점령 지역과 헝가리 남부 지역에서 공세를 진행해 유럽 전선의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전후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헝가리 등에 주둔한 남부군집단사령관을 맡아 해당 지역의 공산당 정권 수립을 지원했고, 1946년에는 소비에트 최고 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947년 1월에는 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으로 이임했는데, 이 시점부터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해 1949년에 모스크바에서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대다수의 소련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고, 1965년 5월에는 소련영웅 칭호를 사후 수여받았다.
항상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나는 화난 톨부힌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항상 흠잡을 곳 없는 리더십, 용기를 갖춘 톨부힌은 부하 장교는 물론 사병들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이 분명히 드러났다. 사망 몇 분 전에도 그는 내일 아침에 복무를 행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모든 전선 사령관 중 가장 겸손하고 친절한 자로 기억한다. 작전을 구상할 때도 부하 장교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 소비에트 연방 영웅 (1965. 사후 수여)
- 전승훈장 (1945)
- 레닌훈장 2회 (1944, 1945)
- 적기훈장 2회 (1922, 1944)
- 수보로프훈장 1급 2회 (1943, 1944)
- 쿠투조프훈장 1급 (1943)
- 적성훈장 (1938)
-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훈장 (1945)
- 불가리아 영웅 (1979. 사후 수여)
- 불가리아 무공훈장
- 불가리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훈장
- 헝가리 공화국훈장 1급
- 헝가리 해방훈장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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