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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파블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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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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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수
이반 페레십킨
P: 정치장교, A: 포병, T: 기갑, Si: 통신, Sa: 공병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공군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소비에트 연방 제3대 전차군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Дми́трий Па́влов | Dmitry Pavlov
드미트리 파블로프
본명
드미트리 그리고리예비치 파블로프
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
Dmitry Grigorievich Pavlov
출생
러시아 제국 코스트로마현 콜로그리프구 보뉴흐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코스트로마주 파블로보)[2]
사망
1941년 7월 22일 (향년 43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레포르토바 교도소
재임기간
제3대 전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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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파블로프
어머니 예카테리나 스테파노브나 파블로바
배우자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파블로바[3]
자녀
아들 보리스,[4] 딸 에이다[5]
복무
최종 계급
대장 (노농적군)
병과
주요 참전
주요 서훈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4년제 체육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러시아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1914년부터 제120보병연대, 제20보병연대, 제202예비연대에서 복무하다 상급 부사관으로 진급했다. 1916년 6월, 코벨 전투에서 독일 제국 육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 광산에서 일했다. 1919년 1월 전쟁이 끝난 뒤 귀국했다.
1919년 8월 25일부터 노농적군 제56보급대대에서 식품 보급을 감독했다. 1920년 12월부터 남서부전선, 남부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1922년 6월부터 제6독립기병여단 제56기병연대 부연대장으로 임명돼 바르나울에서 반공 세력을 진압했다.
1928년 6월 프룬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지휘 하에 동부철도 분쟁에서 중화민국군을 궤멸시켰다. 이후 전차부대를 크게 발전시켜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1936년 10월부터 1937년 6월까지 공화당 정부 편에서 싸웠으며, '파블로'라는 가명의 전차여단장을 역임했다. 최고사령관은 아니지만 1937년 7월부터 공화당 정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
핀란드 육군의 전차부대 규모를 직접 조사한 뒤 1940년 2월 29일까지 예비군[6] 사령관을 역임했다. 만네르헤임선을 따라 후방을 타격할 예정이었지만 도하 실패와 함께 작전이 취소됐다. 겨울전쟁 참전 전, 파블로프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게 전차 개선을 요구하는 청원을 보냈다.
T-26의 호위는 보병에게 맡겨야 하며, T-28T-35엔 초속 560m로 포탄을 날릴 수 있는 76mm급 주포가 장착돼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구를 거절하신다면 새로운 중전차가 개발돼야 할 겁니다.
파블로프의 제안이 수락돼 T-28, T-35에 포구 속도 초속 555m짜리 76mm급 주포가 탑재됐다. 하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보로실로프 전차 개발이 착수됐다. 이후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도움에 따라 조직된 전차군단을 폴란드에 투입시켰더니 파블로프의 지휘가 별로였다는 이유로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세묜 티모셴코에 의해 파블로프의 전차군단이 해체됐다.
파블로프는 다시 이렇게 요구했다.
모든 소총사단에 독립 전차대대를, 기병사단에 독립 전차연대를 창설해주십시오. 해체된 전차군단 4개를 대체하기 위해 신설된 보병사단 15개는 우수한 전력을 보유했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 15개 보병사단이 차량화소총사단으로 재편성하기 위해선 별도의 전차부대가 필요합니다.
이 제안이 할힌골 전투에서 시험됐는데, 나름 괜찮은 성과를 냈다.
파블로프와 푸르카예프와 메레츠...
사령관들과 지형을 조사 중인 모습[7]
1941년 6월 21일부터 서부전선 사령관을 역임했다. 민스크 전투 당시 큰 피해를 입고 1941년 6월 28일 파블로프는 독일 육군에 의해 민스크를 잃었다. 1941년 6월 30일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불렸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게오르기 주코프가 사면해준 덕에 서부전선 부사령관으로 복직하게 됐다.[8]
파블로프와 참모장인 블라디미르 클리몹스키흐는 러시아 SFSR 형법 58-1B, 58-11조에 따라 '반공 혐의에 가담해 최전방 부대를 허가 없이 후퇴시켰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1. 군사 작전 초반부터 나치 독일군에게 무력한 모습을 보인 뒤 지휘를 제대로 내리지 않아 조국의 무기를 버리고 방어선을 뚫리게 했다.
2. 통신망을 구축하지 않아 반격 첫 날부터 지휘체계가 마비됐다.
(중략)
파블로프를 포함한 4명의 사령관은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을 배반하고 상급 장교들을 모욕하며 조국 수호 정신을 망각해 서부전선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따라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941년 7월 28일, 소련 대법원 판결
나는 군인으로서의 맹세와 조국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고 붉은 군대를 위험에 빠뜨리고 탈영하는 겁쟁이들에게 경고한다. 싸우지 않는 배신자들은 군법에 따라 무자비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1941년 7월 28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250호 명령
파블로프는 사망 전까지 유죄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1년 7월 22일, 그는 계급과 모든 재산, 훈장을 몰수당한 뒤 총살됐다. 이후 부토보 마을 근처 NKVD의 처형장에 매장됐다.

2.7. 사후 복권[편집]

1957년 7월 31일, 소련 대법원은 증거 부족으로 유죄를 기각했다. 니키타 흐루쇼프 역시 스탈린의 섣부른 판단을 비난하며 파블로프 복권에 동의했다.
솔직히 서부전선의 피해를 생각하면 파블로프의 유죄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복권에도 동의한다. 근본적 책임은 스탈린에게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프는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인물이었으나 스탈린이 멋대로 주요보직에 앉힌 게 큰 실수였다.

니키타 흐루쇼프
파블로프의 부모는 시베리아로 망명했으나 파블로프가 무죄 판결을 받기 전 사망했다.

3. 진급 이력[편집]


[구력] 10월 23일[2] 파블로프를 추모하기 위해 개명됐다.[3] 1901년 ~ 199?년[4] 1923년 ~ 200?년[5] 1930년 ~ 201?년[6] 보병사단 3개, 기병사단 2개, 전차여단 1개[7] 왼쪽부터 파블로프, 막심 푸르카예프, 키릴 메레츠코프, 세묜 티모셴코[8] 당시 사령관은 세묜 티모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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