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코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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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897년 출생
- 1973년 사망
- 키로프주 출신 인물
- 제1차 세계 대전/군인
- 러시아 내전/군인
- 독소전쟁/군인
- 소련군 원수
- 소련 육군 총사령관
- 바르샤바 조약군 최고사령관
- 서부군집단 총사령관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영웅
- 몽골 인민 공화국 영웅
- 크렘린 벽 묘지 안장자
- 소련 최고회의 1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2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3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4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5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6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7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8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3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4기 중앙위원회 위원
- 전승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그랑도피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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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코네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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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2대 지상군 총사령관 | ||||||||||||||||||||||
초대 바르샤바 조약 기구 통합군 최고사령관 이반 코네프 Ива́н Ко́нев | Ivan Konev | ||||||||||||||||||||||
본명 |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Ivan Stepanovich Konev | |||||||||||||||||||||
출생 | ||||||||||||||||||||||
사망 | ||||||||||||||||||||||
묘소 | ||||||||||||||||||||||
재임기간 | 제2대 지상군 총사령관 | |||||||||||||||||||||
초대 WTO 통합군 최고사령관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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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군인이다.
1897년 지금의 포도시노프스키에서 부농이었던 스테판 이바노비치 코네프와 예브도키야 스테파노브나 코네바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을 보인 코네프는 마을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교육을 더 받기로 결정했고, 고향 마을엔 3년제 교구 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옆 마을까지 10 킬로미터 거리를 걸어 다니며 4년제 학교에서 추가 교육을 이수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5세부터 포도시노베츠와 아르한겔스크의 목재 공장에서 시간 관리원으로 5년 동안 일하다 1916년에 군대에 징집당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체격이 좋고 똑똑했기 때문에 원래 해군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육군 보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12연대에 보내진 코네프는 상관의 부츠를 닦고 막사 동기에게 폭행을 당할 뻔하고 40도의 땡볕 아래에서 풀을 깎는 등 군대의 쓴맛을 맛보았다고 한다. 당시 육군에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 교육을 받은 후 부사관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포병사단에서 복무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주코프와 비슷하다.
그러다가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의 정치장교로 극동으로 파견되어 장갑열차에 탑승해 백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내전 종전 이후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예하의 보병사단에서 정치위원을 담당하던 중 당시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자 스탈린의 친구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안면을 트게 되고, 이 때 보로실로프의 눈에 들어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되고 난 후 코네프를 지휘관으로 전임시키게 된다.
보로실로프의 후원 아래 1926년 프룬제 군사대학의 고급 지휘관 코스를 밟고 원 소속 부대로 돌아갔지만, 정치장교가 지휘관이 되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하일 투하쳅스키에 의해 5년 동안 연대장 직에서 머물러야 했다. 사단장이 된 이후 다시 보로실로프의 도움으로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코네프는 모스크바 군관구, 벨로루시 군관구의 지휘관 보직을 지내면서 예로님 우보레비치[4]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37년부터 벌어진 대숙청에서는 보로실로프와 그의 파벌의 영향력으로 살아남아 되려 숙청당한 상급자들의 자리로 쾌속 승진하여 1939년에는 2급 사령관으로 임명됨과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0년에는 자바이칼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으며, 1년 뒤에는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5세부터 포도시노베츠와 아르한겔스크의 목재 공장에서 시간 관리원으로 5년 동안 일하다 1916년에 군대에 징집당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체격이 좋고 똑똑했기 때문에 원래 해군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육군 보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12연대에 보내진 코네프는 상관의 부츠를 닦고 막사 동기에게 폭행을 당할 뻔하고 40도의 땡볕 아래에서 풀을 깎는 등 군대의 쓴맛을 맛보았다고 한다. 당시 육군에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 교육을 받은 후 부사관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포병사단에서 복무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주코프와 비슷하다.
그러다가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의 정치장교로 극동으로 파견되어 장갑열차에 탑승해 백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내전 종전 이후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예하의 보병사단에서 정치위원을 담당하던 중 당시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자 스탈린의 친구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안면을 트게 되고, 이 때 보로실로프의 눈에 들어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되고 난 후 코네프를 지휘관으로 전임시키게 된다.
보로실로프의 후원 아래 1926년 프룬제 군사대학의 고급 지휘관 코스를 밟고 원 소속 부대로 돌아갔지만, 정치장교가 지휘관이 되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하일 투하쳅스키에 의해 5년 동안 연대장 직에서 머물러야 했다. 사단장이 된 이후 다시 보로실로프의 도움으로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코네프는 모스크바 군관구, 벨로루시 군관구의 지휘관 보직을 지내면서 예로님 우보레비치[4]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37년부터 벌어진 대숙청에서는 보로실로프와 그의 파벌의 영향력으로 살아남아 되려 숙청당한 상급자들의 자리로 쾌속 승진하여 1939년에는 2급 사령관으로 임명됨과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0년에는 자바이칼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으며, 1년 뒤에는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코네프는 비텝스크에 배치된 제19군의 사령관이 되어 독일군과 맞서게 된다. 비텝스크에서는 공을 세워 상관들이 패전의 책임을 쓰고 처형되는 와중에 오히려 상장까지 진급했던 코네프였지만, 바쟈마에서는 대패하여 보로실로프의 질책을 받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러나 코네프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코네프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의 반격을 이끌었고, 주코프가 총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주코프의 후임 서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질 당시 아군을 구원하러 갈 수 없도록 붙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본 코네프는 북서전선군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 작전에 관해 스타프카와 갈등을 빚어 후방의 스텝 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코네프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의 반격을 이끌었고, 주코프가 총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주코프의 후임 서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질 당시 아군을 구원하러 갈 수 없도록 붙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본 코네프는 북서전선군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 작전에 관해 스타프카와 갈등을 빚어 후방의 스텝 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중)와 지형을 조사 중인 코네프 상장(우) |
그러나 쿠르스크 전투 당시 루먄체프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하르코프를 점령해 스탈린의 눈에 들게 된 코네프는 대장으로 진급한 뒤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과 함께 우크라이나 탈환을 이끌었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적을 격멸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수로 진급한다. 포위전 당시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잔인함과 공격성을 보여주었는데, 독일군이 점령중인 러시아 마을 위에다 인화성 폭탄으로 폭격을 퍼부은 뒤 T-34 전차와 코사크 기병을 돌입시켜 항복하는 적군까지 포함해 2만 명을 사살하고 8천 명(사살자 수가 포로보다 한참 높은 것에 주목.)을 포로로 잡았다. 코네프는 후에 코사크 기병의 용맹성을 칭찬하면서 "걔네들은 독일군이 항복한다고 든 손까지 잘라버리더군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코네프의 개인적인 성품은 온화한 편이었고, 책벌레로 유명해 전선에서도 소설이나 역사서를 가져가 짬날 때마다 읽곤 했다.
이후에도 독일 남부집단군을 무너뜨리며 루마니아까지 진출한 코네프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이후 바투틴을 대리하던 주코프의 후임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된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슐레지엔 지방으로 진격한 코네프는 독일 A 집단군을 상대로 잠시 밀려났지만, 곧장 재반격을 개시해 A 집단군을 밀어내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진격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이 젤로 고지에서 발이 묶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이의 전투 지경선을 없애버리면서 경쟁을 부추겼고, 코네프는 베를린을 점령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젤로 고지를 겨우 넘은 주코프가 코네프에게 질 수 없다면서 광속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베를린 점령의 영광은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코네프는 이에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 대신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은 베를린 남방을 돌아 서쪽으로 진격해, 엘베 강에서 오마르 브래들리가 이끄는 미군과 조우했다. 직후 스탈린의 지시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했고, 프라하 공세로 프라하를 해방시켰다. 코네프는 이 공로로 종전 후에 체코슬로바키아군 원수 직함을 받았다.
이후에도 독일 남부집단군을 무너뜨리며 루마니아까지 진출한 코네프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이후 바투틴을 대리하던 주코프의 후임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된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슐레지엔 지방으로 진격한 코네프는 독일 A 집단군을 상대로 잠시 밀려났지만, 곧장 재반격을 개시해 A 집단군을 밀어내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진격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이 젤로 고지에서 발이 묶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이의 전투 지경선을 없애버리면서 경쟁을 부추겼고, 코네프는 베를린을 점령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젤로 고지를 겨우 넘은 주코프가 코네프에게 질 수 없다면서 광속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베를린 점령의 영광은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코네프는 이에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 대신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은 베를린 남방을 돌아 서쪽으로 진격해, 엘베 강에서 오마르 브래들리가 이끄는 미군과 조우했다. 직후 스탈린의 지시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했고, 프라하 공세로 프라하를 해방시켰다. 코네프는 이 공로로 종전 후에 체코슬로바키아군 원수 직함을 받았다.
종전 후 코네프는 잠시 중앙군집단사령관 겸 오스트리아 지역 연합군 고등판무관을 지내다가 주코프의 후임으로 소련 지상군총사령관 겸 제1국방차관이 된다.[5] 그러나 종전 후 명성을 얻은 여러 장성들을 쫓아내던 스탈린에 의해 얼마 뒤 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당중앙위원회에서도 쫓겨난 주코프와 달리 당중앙위원회에 남을 순 있었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여 이후 죽을 때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였다.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 과정에서 라브렌티 베리야를 숙청하는데 협조하면서 복권되었고,[6] 잠시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복직했다가 초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맹국 합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합동군 총사령관을 지내던 때, 코네프는 헝가리 혁명 진압을 지휘했다.[7] 1960년 군직에서 물러나 국방부 총감찰단[8]으로 이동했던 코네프는 1년 뒤에 독일 주둔 소련군집단 사령관으로 복귀했고, 베를린 장벽 건설을 지휘했다. 1962년 다시 국방부 총감찰단으로 이동한 코네프는 군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여 이후 죽을 때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였다.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 과정에서 라브렌티 베리야를 숙청하는데 협조하면서 복권되었고,[6] 잠시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복직했다가 초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맹국 합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합동군 총사령관을 지내던 때, 코네프는 헝가리 혁명 진압을 지휘했다.[7] 1960년 군직에서 물러나 국방부 총감찰단[8]으로 이동했던 코네프는 1년 뒤에 독일 주둔 소련군집단 사령관으로 복귀했고, 베를린 장벽 건설을 지휘했다. 1962년 다시 국방부 총감찰단으로 이동한 코네프는 군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복무 생활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지휘권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전투를 계획하고 부대를 배치했다. 작전에 필요한 모든 것은 코네프가 지지하는 원칙에 따라 준비됐다.
항상 냉철한 결단력을 갖춘 사령관으로 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코네프의 강한 정신력을 부러워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 했으며,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그의 관찰력은 부하 장교들까지 긴장하게 했다.
-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중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제60군이 해방시켰다. 수용소에 대해 보고받은 코네프는 충격을 금치 못하며 끔찍한 현장을 직접 보면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타격을 받아 전투 지휘에 영향이 갈까 봐 수용소에 방문하지 않았다.
- 프라하를 해방시킬 때 프라하를 점령한 사령부와 몇 시간 동안 연락이 끊기는 사고가 벌어졌었다. 프라하에 있는 부대 중 아무도 보고를 보내지 않았고 연락을 하기 위해 비행기와 차를 보내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중정찰을 해보니 더 이상 전투는 없고 거리에 사람들이 꽉 들어찬 것으로 보아 해방된 것이 분명하다는 결과가 나왔으나 여전히 돌아오는 보고는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점령하고 적은 어디로 후퇴했는지 물어오는 스탈린에게 아무 답도 줄 수 없었던 코네프는 큰 불안에 휩싸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 장교가 나타나면 환희에 찬 프라하 시민들이 에워싸고 키스와 꽃을 퍼부으며 포위시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프라하에서 실종됐던 지휘관은 렐류셴코, 리발코등이 있다.
- 중앙군집단 사령관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있을 때 오랫동안 앓고 있던 위궤양이 터져 출혈이 발생했다. 소련 의사들은 즉시 모스크바로 가서 위절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코네프는 모스크바에 가는 대신 저명하다는 오스트리아 의사를 초빙해 진찰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의사는 코네프의 병력과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경악하며 "나치당원으로 히틀러를 위해 일했던 우리 전문가들은 절대 이 상태까지 내버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네 의사들은 형편없습니다!"라고 소련 의학계를 디스했다. 코네프는 의사면 진료나 하라고 쏘아붙였고 오스트리아 의사는 수술할 필요성이 없다며 일어나서 낚시하고 사냥을 하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대답했다. 오스트리아 의사의 말대로 하니 코네프의 몸은 정말 회복되었다. 정확한 진단을 내린 오스트리아 의사는 이후 인체실험을 한 전범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사냥과 낚시를 좋아했다. 젊을 때는 사냥을 즐겨 하다가 나이가 든 말년엔 낚시를 주로 했다고 한다.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1944, 1945)
- 전승훈장 (1945)
- 레닌훈장 7회 (1944, 1945, 1947, 1956, 1957, 1967, 1972)
- 10월 혁명 훈장 (1968)
- 적기훈장 3회 (1938, 1944, 1949)
- 수보로프훈장 1급 2회 (1943, 1944)
- 쿠투조프훈장 1급 2회 (1943 2회)
- 적성훈장 (1936)
- 체코슬로바키아 영웅 (1970)
- 몽골 영웅 (1971)
- 몽골 수흐바토르훈장 2회 (1961, 1971)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2급) (연도 불명)
- 세계 정복자 3 등 세계 정복자 시리즈에서 현질 장군인 주코프를 제외하면 포병 능력 1인자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주코프와 더불어 레벨 5짜리 소련군 장성으로 등장하며 참모진에서도 은폐능력을 버프시켜주는 참모로 등용할 수 있다.
[1]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지상군 총사령관 직위 폐지.[2] 출산 중 사망.[3] 후처인 안토니나 소생.[4] 스탈린의 측근으로 대숙청 당시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이었지만 스탈린의 보직 변경 명령에 항명하다가 숙청된 인물로, 개인적인 능력은 매우 뛰어났고 코네프, 주코프,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의 스승으로 존경받았으며, 투하쳅스키의 칭찬을 받은 군인이었다. 그러나 부패했고 군사모험주의적이었으며, 정치에 과도하게 간섭했으며 군을 사유화하자 결국 스탈린의 손에 의해 숙청된다.[5] 당시 주코프가 숙청당할 위기에서 그를 제일 먼저 변호한 것이 다름아닌 코네프였다고 한다. 정확히는 주코프를 실컷 욕한 뒤, 그를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6]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재빨리 개혁적 성향을 가졌던 과두정에 편승했으나, 동독을 서독과 통일시키자는 등의 너무 막나간 주장을 한데다, 스탈린 시절 한 짓들로 인해 대중과 당, 군부 모두에게 찍혀 있었다. 오죽하면 철천지 원수 관계였던 주코프와 코네프가 베리야 제거에는 합심을 했다.[7] 이로 인하여 헝가리 국민들은 코네프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다. 코네프의 사진과 기념물을 모조리 찢겨지거나 파괴되어 불태워질 정도로 코네프에 대한 증오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니 말이다.[8] 소련군에는 정년이 없기에 은퇴나 예비역 전환을 원하지 않는 고위 장성들이 총감찰단으로 이동한다.[9] 개인의 연애사에 참견하는 게 이상해 보이는데, 코네프는 첫 번째 아내와의 불화 때문에 스트레스로 전쟁 내내 위궤양을 앓으며 골골거렸다. 안토니나도 1942년에 처음 만난 코네프의 첫인상을 '아파 보인다'라고 서술했다. 아마 스탈린도 이런 점 때문에 코네프의 연애 사정에 예민하게 반응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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