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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묜 티모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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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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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RGeneralissim...투명
소비에트 연방 대원수
Генералиссимус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USSRMarshal투명
소비에트 연방 원수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제2차 세계 대전기

라브렌티 베리야
USSRAdmiralofthe...투명
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Адмирал Флота Cоветского Cоюза
비고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소비에트 연방 대원수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추대되었으나 공식 승인되지 않음.
※ 공군은 최선임이 상원수(4성장군)였고, 연방원수(5성장군)가 없었다.
세묜 티모셴코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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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수
이반 페레십킨
P: 정치장교, A: 포병, T: 기갑, Si: 통신, Sa: 공병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공군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소비에트 연방 제2대 국방인민위원
세묜 티모셴코
Семён Тимоше́нко | Semyon Timoshenko
세묜 티모셴코 (흑백 사진 2...
본명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1]
Semyon Konstantinovich Timoshenko
출생
러시아 제국 베사라비아현 아케르만구 오르만
(現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킬리야구 푸르마니우카)
사망
1970년 3월 31일 (향년 75세)
재임기간
제2대 국방인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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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콘스탄틴 가브릴로비치 티모셴코
어머니 파라스카 아다르모브나 티모셴코
형제자매
형 에피메, 프로코피
(17남매 중 막내)
배우자
예카테리나 스뱌토슬라보브나 레오노바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티모셴코 (재혼)
자녀
아들 콘스탄틴[3]
딸 예카테리나[4], 올가[5]
복무
1946년 ~ 1960년
최종 계급
특무상사[6]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참전
주요 서훈
1. 개요2. 생애
2.1. 출생부터 겨울전쟁 이전까지2.2. 그의 리즈시절, 겨울전쟁2.3. 그의 몰락, 독소전쟁2.4. 전후에서 사망까지
3. 수훈내역
3.1. 러시아 제국3.2. 소련
3.2.1. 국토수호메달3.2.2. 공세/점령메달3.2.3. 군사 기념메달3.2.4. 민간 기념메달
3.3. 해외 훈장
4. 평가

1. 개요[편집]

소련의 군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무시무시했던 대숙청의 피바람에도 살아남았을 만큼 처세에 유능하고 신뢰가 두터웠던 인물이었으며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공훈을 세웠고 겨울전쟁에서 그 정점에 달하나, 독소전쟁 당시 온갖 악재로 인해 자신이 지휘하는 전투마다 대패하고 스탈린의 신뢰를 잃어 이후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등 후배 장군들에게 일선 지휘를 맡기고 후방으로 밀려난 이후 은퇴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출생부터 겨울전쟁 이전까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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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초상화
티모셴코는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우크라이나인 가계이며, 러시아 제국 베사라비아현 아케르만군 오르만(현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킬리야구 푸르마니우카·Фурманівка)에서 카자크족 출신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국 육군 기병으로 징집되었다.

3년 간 복무한 후 1918년 붉은 군대에 가담했고 1919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애초부터 줄타기에 일가견이 있었나 보다[7] 러시아 내전 동안 여러 전선을 오고 갔으며 여러 전투 중 하나인 차리친(現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만났다. 1920-1921년엔 세묜 부됸니 휘하 제1기병군 소속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러시아 내전과 소-폴 전쟁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벨라루스(1933년), 키예프(1935년), 캅카스 북부, 하리코프(1937년) 다시 키예프(1938년)의 군관구 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그는 기갑 부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기존의 학설로는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처형 이후 부됸니, 보로실로프 등 기성 군인들이 시대착오적으로 기병만을 밀어주고 기갑을 소홀히 해왔지만 티모셴코 정도만 BT 전차[8] 등에 신경써왔다는 주장이 주류였으나 최신 연구결과로는 오히려 기존에 그토록이나 욕을 먹어왔던 보로실로프와 함께 부됸니 등의 툴툴거림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기계화를 지원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9] 또한 1939년에는 서부 국경 전역의 지휘권을 맡고, 폴란드 침공 당시엔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었다. 이렇게 엄청난 권한을 수여받을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과의 친분 덕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대숙청으로 야기된 장성들의 공백을 젊은 장성들로 메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ㅈ니ㅣ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무사했던 몇 명 안 되는 장성이기도 하다. 이는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과 함께 일한 것이 큰 보호막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오나 야키르[10]처럼 스탈린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력하게 피력하다가 모가지가 날아간 다른 고위 장성들과는 달리 터무니없는 명령에도 순응하는 척하며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면서 뒤로는 자기 권한 안에서 최대한 이런 문제점을 완화시키려고 애썼다.
핀란드와 벌인 겨울전쟁에서 티모셴코는 보로실로프의 후임으로 붉은 군대를 지휘했다. 당시 소련군의 수준은 한심해서, 소련군의 포격은 항상 일정한 시각에 전 전선에 시작되었고 항공 폭격 또한 마찬가지였다. 핀란드군은 이런 뻔히 예측할 수 있는 공격을 비웃으면서 소련군의 공격을 잘 피할 수 있었다. 티모셴코는 기본적인 '집중'의 원리조차도 잊어버린 핀란드 전선의 소련군에게 다시 상식적인 지휘와 전술을 부여했고, 그 결과 소련군의 포격 정밀도는 더욱 향상되었고 포격과 항공 공격의 집중도는 훨씬 늘어났다. 그리고 티모셴코는 몇 개 전차 여단과 기타 지원 부대들로 구성된 기동 집단들을 구성해 전선 돌파에 써먹는 등 자신이 기갑덕후임을 인증하며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티모셴코는 겨울전쟁 이후 소련 원수로 진급해 기존의 원로 장성들을 능가했고, 국방인민위원(국방장관)에 임명되며 군부의 1인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 곁의 티모셴코', '정치위원 티모셴코의 노래', '티모셴코 원수의 노래'까지 합해서 군가 3곡이 작곡되었고, 각종 기념일마다 군부의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대숙청때 살아남은 고급 군인들 중 보리스 샤포시니코프와 함께 몇 안되는 개념군인으로서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적극 실현하려다가 숙청의 구실이 된 군의 기계화를 조용히 계속 추진했다. 어쨌든 현대전에 대한 개념이 있는 사람이 독소전쟁 개전전에 국방장관을 맡은 것은 소련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리고리 쿨리크 같은 무개념 똥별들이나 세묜 부됸니 같이 시대에 뒤떨어진 장성이 국방장관을 맡았더라면 아마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때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렇게 티모셴코의 리즈시절은 찬란하였다. 그러나...

2.3. 그의 몰락, 독소전쟁[편집]

파블로프와 푸르카예프와 메레츠...
사령관들과 지형을 조사 중인 모습[11]
독소전쟁 개전 당시 티모셴코는 국방장관이었다. 일본 제국에 파견되어 있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베를린에 파견해 두었던 소련 간첩 등 소련의 각 정보망은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계속 알려 왔으나, 스탈린은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일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루프트바페 정찰기가 소련 국경을 침범한 사례가 몇백 회를 넘었는데도 스탈린은 대응 사격을 하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티모센코와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는 소련군에 경계령을 내릴 것을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간청했으나 스탈린은 전쟁을 우려해 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탈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대비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총체적인 대비 없이 일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1941년 6월 22일 전격적으로 개시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군은 초기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동부로 퇴각해야 했다.

독소전쟁이 개전하자, 그는 중앙전선군을 맡아서 페도어 폰 보크가 지휘하는 독일 중앙집단군과 대결하였다. 겨울전쟁에 앞서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을 박살낸 게오르기 주코프도 있었으나, 그는 개전시 총참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야전 지휘에는 나서지 못했다.[12] 이때 그나마 독소전 초기 소련 장성들 중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다고 평가를 받지만 워낙 대비 태세가 불충분한 데다가 독일군의 실전 경험이 뛰어났다.[13] 게다가 당시 소련군은 전쟁 이전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 병력을 전진 배치시켰으며, 이 때문에 스탈린 라인 등 몇 년 간 구축한 방어 진지를 뒤로 하고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최전선에 배치된 병력 수도 독일군에게 뒤지는 상태에 있었다.

티모셴코는 답이 안 나오는 세묜 부됸니, 클리멘트 보로실로프[14] 등 원로 장성들과는 달리 화끈하게 민스크 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강력한 편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인츠 구데리안헤르만 호트 휘하 기갑군이 민스크를 포위했고 이어진 포위전에서 병력 40만을 잃었다.[15] 또한 모스크바 앞을 막는 마지막 관문인 스몰렌스크에서도 군대를 싸그리 말아먹었으니...[16] 공식적으로는 남서 전선에서의 포위 섬멸도 티모셴코가 남부 전선군 지휘관을 역임하였을 때 생긴 일이라,[17]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의 피해 400만 중 200만에 육박하는 손실의 책임은 세묜 티모셴코에게 지워졌다.[18]

그 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이 중부집단군을 격파하면서, 주코프의 주가는 엄청 뛰었고, 그에 비해서 3대 포위전의 피해자 아닌 피해자인 티모셴코는 스탈린에게서 주코프와는 극명히 대비되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수비전으로 주코프가 티모셴코보다 유능하단 것이 증명되었다." 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비난당했다.[19]

다음해인 1942년 5월,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압박과 하르코프 탈환을 통한 우크라이나 수복 가능성의 확신으로 62만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작전술적 전차 집단들을 편성하며 이줌 돌출부에서 하르코프를 향해 반격 작전을 수행하였지만 독일군 제6군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제1기갑군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손발이 척척 맞는 플레이에 되려 공세 부대들이 돌출부가 차단되며 포위당해 처절하게 역관광당한다. 이쯤 가면 스탈린이 극도의 티모셴코 안티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사지에 몰아넣고 패배하면 욕하고[20] 훗날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티모셴코는 철저하게 역관광을 타서 30만의 인명 손실을 내었고, 이 손실은 후에 청색 작전에서의 소련의 방어 체계에 큰 공백이 되었다. 이때 스탈린은 티모셴코가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하자 "사단은 시장에서 파는 게 아니라 지원 못해 주겠다"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결국 판돈까지 잃고 완전히 시망한 티모셴코는 게오르기 주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반 코네프 등 유능하고 젊은 장성들에게 지휘권의 바통을 넘기고 국방인민위원으로서의 군정권만 유지하며 버로우를 탔다. 참 갈수록 불쌍해지는 양반... 사실 비교 대상이 주코프, 코네프, 바실렙스키라서 그렇지 군경력이나 대조국 전쟁 발발시 짬은 투하체프스키, 블뤼헤르, 예고로프 등에 비교해야 하고, 이들에 비교해선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으니 비교적 행운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님 스탈린 본인도 일부러 사지에 몰아놓고 희생양으로 버렸다는건 알고 있어서 적어도 목숨은 붙여 놓았던 것이거나.

그래도 전투를 눈앞에 두고 안드레이 예료멘코와 교체되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하긴 했다. 그 이후엔 총사령부에서 각 전선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3차례의 포위전에서 당한 패배가 항상 따라다니다 보니 스탈린의 눈 밖에 나도 너무 나서 두 번 다시 야전 지휘를 맡지 못했다.

2.4. 전후에서 사망까지[편집]

전후엔 벨로루시 군관구(1946년 3월), 남부 우랄 군관구(1946년 6월), 벨로루시 군관구(1949년 3월)의 사령관이 된다. 티모셴코의 경우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전쟁 때는 용맹한 장성이 좋더라도, 평시엔 온순한 장성이 좋다는 높으신 분들의 정서는 똑같으신가 보다. 티모셴코보다 훨씬 공을 많이 세웠던 주코프는 성격이 불같고 오만하여 원래부터 적이 많은 데다가 정치적인 야심도 의심받았기 때문에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직을 맴돌았다.[21]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머문다. 1960년 4월, 명예직인 국방부 고문관에 임명되었으며, 1961년에 소련 참전용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전쟁 후엔 평탄히 살다가 197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다른 장군들과 함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다른 원수들과는 달리 회고록은 남기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인데 맏딸 예카테리나 티모셴코가 스탈린의 차남인 바실리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이기도 했다. 그것도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결혼했다는 점에서는 스탈린의 신임은 없어졌지만, 인간적으로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듯 하다. 하지만 3년만에 이혼했다.

3. 수훈내역[편집]

3.1. 러시아 제국[편집]

  • 성 게오르기 십자장 2/3/4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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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국토수호메달[편집]

3.2.2. 공세/점령메달[편집]

3.2.3. 군사 기념메달[편집]

3.2.4. 민간 기념메달[편집]

3.3. 해외 훈장[편집]

  •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 훈장 1등급(루마니아)
Order of Tudor V...
1920px-TCH CS Vo...
Order of the par...
  • Medal "30 Years of Victory in the Khalkhin-Gol" (몽골)
Med XXXth annive...

4.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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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티모셴코를 기념해 발행된 우표.
군사적, 행정적 능력을 두루 갖추고 실제로 그 능력을 입증까지 한 인물이지만 억세게 운이 나빴던 장군. 국방장관으로서의 군정력과 행정력, 통찰력은 괜찮았으며 훗날 펼쳐질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의 기계화 등을 도우며 반격에 도움을 주었고 핀란드와의 전쟁 때는 훌륭한 공세를 펼친 것으로 보아 군사적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불운, 동료들과 상사들의 무능함, 스탈린의 안티 등으로 인해 저평가되고 있는 인물. 그러나 어쨌건 대숙청으로 막장이 되었던 소련군을 추스려 재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인물임은 분명하다.

주코프도 여러번 티모셴코를 높이 평가했으며, 1941년 개전후 총참모장 시절 스탈린에게 상신한 보고서나, 전후 작성된 회고록에서도 티모셴코는 독일군의 진격을 상당히 지연시켰으며, 그가 전쟁 조반 소련군의 대패를 초래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분명히 밝혔다.

행정 능력이 훌륭한 점에서 레슬리 맥네어 중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멕네어와 달리 무작정 자신의 고집대로 밀어붙이진 않았지만.

[1] 우크라이나어: 세몐 코스탼티노비치 티모셴코 (Семе́н Костя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2] 러시아력으로는 6일.[3] 1930.~2004.10.1. 바실리 추이코프의 딸인 넬리와 결혼.[4] 첫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 레오노바 소생(1923.12.21.~1988.6.12.).[5] 1927~2002.[6] 원문은 Подпрапорщик, 한국군 계급의 원사와 비슷하다.[7] 당시 대부분의 장교들이 백군측에 섰던 걸 생각하면 후에 대숙청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8] BT 전차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으나 속도도 괜찮고 그 시절 기준에서 보면 그리 뒤떨어진 놈은 아니다. 또한 1940년대부터 T-34로의 세대 교체도 있었다.[9] KV 전차가 누구의 이름을 따왔는지를 보자.[10] 강제적으로 농업 집단화를 시행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다.[11] 왼쪽부터 드미트리 파블로프, 막심 푸르카예프, 키릴 메레츠코프, 티모셴코[12] 주코프는 키예프에서 후퇴를 금지시킨 스탈린과 언쟁을 벌이다 사임한 후, 레닌그라드 공방전 때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이 되어 야전 사령관으로 복귀했다.[13] 1939년부터 불과 2년 사이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등 실전을 계속 경험했고 그 덕분에 이 당시 독일군의 전투력은 가히 유럽 최강이었다.[14] 보로실로프의 경우엔 북부전선군을 넒은지역에 세분화해 배치한 결과 병력이 집중되지 못하고 화력이 흩어지면서 각계격파당해 결국 레닌그라드에서 독일군과 소련 인민이 강제로 접선하게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레닌그라드 공방전 참고.[15] 사실 민스크, 스몰렌스크, 그리고 키예프에서 일어난 이른바 3대 포위전의 실책은 퇴각을 승인하지 않은 스탈린에게 75%의 잘못이 있다는 게 정설이긴 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그렇지만 포위공격을 눈치챈 상황이라면 포위 직전 퇴로는 열려있다.[16] 그나마 이것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적절하게 병력을 빼돌려 모스크바 공방전에 병력 충원해서 다행이었다.[17] 키예프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 스탈린은 남서전선군의 사령관을 부됸니에서 티모셴코로 교체했다(...).[18] 그러나 키예프 전투 패배의 실질적 책임도 스탈린이 저질렀다. 그 무능한 부됸니조차도 기병장교였기에 독일군의 기동포위를 눈치채고 후퇴를 건의했지만 스탈린이 전부 씹었다. (부됸니가 해임된 이유도 이 후퇴건이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 티모셴코와 후에 남겨진 미하일 키르포노스(전투 중 전사)는 뒷수습을 하다 그만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이다.[19] 사실 이건 스탈린이 원래 잘하는 짓이다. 보로실로프 버리고, 티모셴코 버리고, 전후엔 주코프도 팽당했다. 철권통치를 위해선 군부도 자신에게 순응할 필요가 있었고, 군부에서 한명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또다시 대숙청급 피바람이 불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미리 싹을 잘라둔거에 가깝다.[20] 사실 이 전투도 스탈린이 무리하게 춘계공세 한답시고 고위장성들 말 싹다 무시하고 무리하게 밀어붙히다 일어난 일이니 티모셴코 입장에선 억울할만 하다.[21] 전쟁 후 이름을 날리던 원수들은 당의 견제를 받아 요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한직을 맴돌았지만(사실 문민통제의 원칙으로 보면 이렇게 군인이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는 게 맞다. 소련도 2차 대전 이후 군부의 힘이 너무 세졌지만, 독재자 스탈린 앞에서는 강력한 군부도 어쩔 수 없었던 듯), 희대의 똥별 그리고리 쿨리크를 제외하면 처형당한 원수는 없다.[22] 1940년 3월 21일[23] 1965년 2월 18일[24] 1938년 2월 22일[25] 1940년 5월 21일[26] 1945년 2월 25일[27] 1965년 2월 18일[28] 1970년 2월 18일[29] 1968년 2월 22일[30] 1920년 7월 25일[31] 1921년 5월 11일[32] 1930년 2월 22일[33] 1944년 11월 3일[34] 1947년 9월 6일[35] 1943년 10월 9일[36] 1944년 9월 12일[37] 1970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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