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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로트미스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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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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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상원수
Главные маршалы артиллерии
소련 포병상원수 계급장(견장)
제2차 세계 대전기

니콜라이 보로노프
기갑상원수
Главные маршалы бронетанковых войск
소련 기갑상원수 계급장(견장)
항공상원수
Главные маршалы авиации
소련 항공상원수 계급장(견장)
비고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공병·통신상원수도 존재하나 임명되지 않음.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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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수
이반 페레십킨
P: 정치장교, A: 포병, T: 기갑, Si: 통신, Sa: 공병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공군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소비에트 연방 초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Па́вел Ро́тмистров | Pavel Rotmistrov
pavel-rotmistrov...
본명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트미스트로프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
Pavel Alexeyevich Rotmistrov
출생
러시아 제국 트베리현 오스타시코프구 소코보로보 마을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트베리주 셀리자로보군 스코보로보 마을)
사망
1982년 4월 6일 (향년 80세)
묘소
재임기간
초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시골 대장장이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골 학교를 졸업한 뒤 철도 노동자, 화물 운송업자로 일하다 노농적군에 입대했다.
멜레케스 봉기를 진압하다 말라리아에 걸려 입원했다. 한 달 후 서부전선의 제16군 제42대대에 파견됐으나 백군과의 교전은 없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지휘 하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1940년 초부터 북서전선 예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으나 본인의 요청에 따라 제7군 제 5경전차여단 전차대대장을 역임하게 됐다. 만네르헤임선 돌파 당시 비보르크 인근에서 전투를 치른 뒤 적성훈장을 수여받았다. 12월부터 발트 군관구 제3기계화군단 제5전차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개전 5일차, 독일 국방군이 제3기계화군단 사령부, 제2전차사단 사령부를 포위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두 달 넘게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다 탈출에 성공했다. 9월 14일, 제11군 제8전차여단장으로서 250km급 행군을 하루 만에 완수한 뒤 칼리닌그라드 근처 칼리키노 마을에 도착했다. 니콜라이 바투틴과 함께 며칠 간 교전하다 10월 16일, 도로시하 기차역에서 무리하게 저항하다 제934보병연대가 궤멸됐다. 결국 로트미스트로프는 로고베즈 강을 넘어 철수를 감행했다. 탄원서까지 제출했지만 최고사령부의 지시 없이 후퇴했다는 이유로 이반 코네프는 로트미스트로프가 바투틴과 함께 군사 재판에 회부될 것을 강요했다. 바투틴이 코네프의 성향에 맞게 부대를 배치하고 작전을 재구상한 덕분에 처벌을 피하게 됐다.
로트미스트로프 동무, 찰나의 시간도 낭비하지 말고 제185보병사단과 함께 메드노예를 점령하자. 우리가 비겁한 겁쟁이가 아니란 걸 증명할 때다!

재편성을 끝낸 바투틴이 로트미스트로프에게 한 말
이후 로트미스트로프는 칼리닌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뒤 초고속으로 르제프까지 진격했다. 1942년 1월 11일, 제8전차여단은 제3근위전차여단으로 개칭됐고 로트미스트로프는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스탈린그라드 근처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부대가 포위되자 12월 12일부터 제2근위군의 도움을 받은 로트미스트로프가 반격에 나섰다. 이틀 간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제87전차여단, 제7차량화소총여단이 1km 정도 떨어진 독일 공군의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후 1943년 1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부대를 궤멸시킨 덕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기갑원수로 진급하게 됐다.
7월 10일, 쿠르스크 남쪽까지 접근한 독일 국방군이 주요 방어선까지 뚫어내자 바투틴이 제5근위전차군, 제5근위군을 보로네시 전선에 배치했다. 7월 12일, 제5근위전차군은 프로호로프카 기차역에서 독일 육군 전차사단 2개의 위치를 찾아 공격했다. 비교적 좁고 높은 지형에 대비하지 못해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당시 소비에트 지상군은 6호 전차 티거는커녕 최신 개량형 4호 전차를 뚫을 만한 대전차포가 없었다. 심지어 전차병들의 숙련도까지 독일 국방군이 우세였다. 전차 640여 대, 자주포 절반을 잃은 것에 더해 제5근위군도 큰 피해를 입어 작전 실패 직전까지 다다랐다. 로트미스트로프에 대한 스탈린의 신뢰가 깨져버렸지만,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변호해준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게 됐다.[2]
2.3.2.3. 벨고로드-하르코프 공세[편집]
1943년 8월 18일부터 교전을 치르다 23일 독일 국방군의 첫 번째 방어선을 돌파했다. 80km를 진격하고 나서야 두 번째 방어선이 뚫렸다. 2월 17일, 포위된 독일 국방군이 완전히 궤멸되자 코네프, 스탈린이 로트미스트로프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했다.
1982년 4월 6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노보데비치 묘지에 매장됐다.

3. 진급 이력[편집]


[1] 구력: 6월 23일[2] 일부 정보통에선 바실렙스키가 아닌 니키타 흐루쇼프라고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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